< 121화 > 불나방들 (2)
나는 의자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처음보는 브랜드의 것 치고는 맛이 꽤 괜찮았다. 나름 이 분야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옆에 설탕이 보이길래 잠시 고민하다 두 스푼 정도 퍼서 저어주었다. 엘레나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가. 요즘은 가끔 이지만 달달한 것도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설탕은 좋은 걸 쓰는군. 빅토르."
"끄아아아아악...!!"
"비명말고 다른 건 없나? 계속 똑같은 소리만 입에서 나오니 슬슬 듣기 질리는것 같아."
"닥쳐어어!!! 다 말했잖아!! 이 지랄 맞은 것 좀 풀어어어!!!!!"
내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 빅토르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내게 소리 쳤다. 몸의 굵직한 혈관들이 이곳저곳에 튀어나온 모습이 기괴하게 보인다. 오러를 이용해 기혈을 뒤틀어 놓으니 몸속의 마나가 역류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몸을 움직이고 싶어도 제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고통만이 그를 찾아오니 계속되는 고통에 빅토르의 얼굴은 이미 산자의 것이 아니었다.
입가에 검은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빅토르에게 그가 말한 대로 그의 집에서 찾아낸 단서들을 던졌다. 피가 좀 묻기야 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리 의미 있는 자료는 아니었다.
"그럴리가. 이게 전부라고? 고작 제국에서 금기시한 연구를 했다는 증거 하나 찾겠다고 내가 이러는 줄 아는가? 이미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 건지 원."
"그, 그리 잘났으면 직접 한번 찾아....으아아악!!!"
다시금 오러를 움직이니 이미 붉게 물든 빅토르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심장을 누군가가 쥐어짜는 듯 한 느낌.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닐 테다. 가슴을 부여 잡은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그는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소리를 지르며 연신 바닥을 내리쳤다.
"말할게!!! 말할테니까!!!! 둘쨋 줄 원소학개론!! 그곳!! 그곳에!!!"
빅토르가 손으로 가리킨 곳의 책을 빼내니 책장이 밀리며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벽면에는 마법이 걸려있는 것인지 마력을 진하게 머금은 문 하나가 있었는데 내가 이를 앞에 두고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자 이를 본 빅토르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네,..네놈이 찾는 것은 그 안에 있다. 하지만 섣부르게 행동했다가는 이곳 전체가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네 녀석은 무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저 안에 있는 건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오직 나 만이 온전히 저걸..."
"그거면 됐다."
나는 빅토르의 말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품 안에 챙겨둔 단검을 꺼내들었다. 저리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저 안에 내가 원하는 증거가 있다는 건 확실할테다. 그 이후에 빅토르가 내뱉는 말들은 내게 있어 들을 가치가 없는 내용이었다.
단검에 오러를 불어넣자 검신에 박혀있는 드래곤 하트가 오러와 공명 하며 낮은 검명(劍鳴)을 토해냈다. 단전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린 오러에 의해 전신의 감각이 확장되기 시작한다. 베어야 할 것이 눈에 보인다.
느릿하게 단검을 허공에 긋자 문에서 느껴지던 마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문에 걸려있던 술식이 파괴되었으니 문이 더 이상 마력을 붙잡아두지 못하고 대기 중으로 흘려보낸 것이었다. 이러한 광경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자신 있게 나불대던 빅토르의 입이 절로 다물어 졌다.
벽문을 열어 그곳에 있는 종이를 대충 훑어 본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알려줘서 고맙다. 빅토르 어드워스."
***
헤니웨이의 시신이 루덴 지하수도에서 발견되고 난 후 당연한 말이지만 에스텔리아 아카데미 역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이미 수배범으로 지정된 인물이기는 해도 한때 교수였던 자의 죽음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죽은 헤니웨이의 발견은 마치 멈춰있던 이야기의 흐름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내게 알리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사건사고가 없었다고는 말을 못하겠지만 어쨌든 엘레나, 이 세상의 주적은 이교도 였고 죽었든 살았든 헤니웨이는 그 거대한 이야기의 신호탄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를 죽였는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그가 이교도라는 사실이었고 이제는 그 사실을 아는 이가 나 뿐만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움직일 때가 된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숨겼는지 헤니웨이의 시신에서는 살아 생전에는 검출되지 않았던 외신의 신성력이 발견되었다.
단순히 발견만 가지고는 반대로 그가 이교도에게 살해 당한 것으로 판단될 수도 있겠지만 마나 유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심장과 각 혈도에서 오랜 신성력의 흔적이 발견 되었으니 그가 이교도였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이었다.
덕분에 오르커스가 일전에 발견했던 문서는 헤니웨이의 소유였다는 것이 인정되었고 이는 그가 정식으로 황군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아직 루덴 내에 이교도가 숨어 있다.', 군을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은 확보한 셈이다.
그렇게 곧바로 루덴 전역을 청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오르커스였지만 그는 신중한 사내였다.
한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고 곧바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약간의 뜸을 주기로 했다. 우선 오르커스는 대중들에게 헤니웨이의 사망 사실을 알리는 대신 그가 이교도였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제외 시켰다. 있는 그대로 공표해 민심을 어지럽히기 보다는 단순한 화제 거리로 만들려는 생각이었고 이는 그의 예상대로 잘 먹혀들었다.
어쨌건 헤니웨이의 친구들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그러한 정보는 필요 없을 테니 말이다.
조용히 파문을 일으키지 않고 헤니웨이의 시신이 황실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알려 그들을 압박하는 것. 최종적으로는 불안감에 젖은 그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
그것이 오르커스의 목적이었다.
원래라면 축출하는데 있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겠지만 헤니웨이가 맺은 인연들 중에서 이교도를 걸러내는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은 필요하지 않을테다. 그야 원작을 읽은 내가 있었으니,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도 기존에 있었던 교도들의 수가 줄은 것 뿐이지 굵직한 인물들은 대부분 그대로였다.
헤니웨이가 속해있던 학회, 집단 중 원작에서 등장했던 악당들의 이름 또한 같이 들어가 있는 곳은 오직 한 곳 뿐이었으니 특정 짓는 것도 쉬웠고 말이다. 이는 오로지 나만이 알 수 있는 정보였지만 이를 이교도에게서 얻어낸 것 처럼 꾸미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동과 날조...날조이기는 해도 진실은 진실이니 된거 아닌가? 아무튼 도움이 되었으면 된거다.
"와우...어떻게 심문을 하면 이렇게 바닥이 피바다가 되는 거야? 겉으로 보기에 외상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오르커스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빅토르를 마치 죽은 시체를 검시하는 것처럼 관찰하듯 살폈다. 이지를 상실했을 뿐이지, 그래도 아직 숨은 쉬고 있는데 너무하군.
"왜. 너도 한번 해줘? 이게 잘만 조절하면 약간 따끔하기는 해도 마사지보다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말이지."
"미쳤나. 됐어."
내가 농담을 던지며 손가락을 까딱거리니 녀석은 질린다는 얼굴로 손을 저었다. 빅토르 한테 얻어낸 증거물로 눈을 돌린 오르커스는 신성력을 휘감은 손으로 이를 집고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게 그건가? 생각했던것 보다 빨리 손에 들어왔네. 어디 보자...제도의 수원지 오염, 지방 귀족과 중앙 귀족간의 갈등 악화....연금성 전복?! 연금성을 장악하는게 아니라 그 거대한 시계탑을 진짜 도심 한가운데에서 폭파 시킬려고 했다고?!! 진짜 미친 놈들인가? 아, 이것도 있네. 황족 시해. 원래는 우리를 아카데미에서 죽일 계획이었나 보군. 환장하겠네."
이들의 계획을 살펴보던 오르커스는 화를 내는 것과 동시에 기가 차다는 얼굴로 종이를 보았다. 마치 그들이 처음 계획했던 대로 일을 이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패할 것이라고 조롱하는 것 처럼. 다만 그런 것 치고는 종이를 살피는 오르커스의 눈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내용을 전부 살핀 오르커스는 종이를 고이 접어 마법으로 이를 자신의 아공간에 수납시켰다. 밑에서 기척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오르커스가 부른 황군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자고. 뒷정리까지 우리가 할 필요는 없지."
"현장에 남아있지 않아도 괜찮겠어? 너 답지가 않은데."
이에 오르커스가 웃으며 말했다.
"이쯤 되면 거의 다 떠 먹여준거 아닌가. 여기서 뒷수습 못하면 그게 병신인거지. 제 어깨 위에 놓인 것이 장식이 아닌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열심히 할거야. 못하면...물갈이 한번 더 하고. 계급장 떼지기 싫으면 잘해야지. 안 그래?
이 녀석...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아무래도 이 녀석은 현 황군의 능력을 시험해 볼 생각인가 보다. 그도 그럴게 황군이 오랫동안 잡아내지 못한 이교도들을 학생 두명이서 잡게 된 것이니. 우리가 가진 실력과는 개별적으로 황군이 가진 능력에 의문이 생길만도 하지.
오르커스가 이러한 생각을 가진데에는 내 탓도 약간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그의 결정을 말리지는 않았다. 어떤 조직이든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건 나쁜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제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 중 하나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오르커스가 말 한대로 제 밥그릇 하나 지킬 정도의 능력은 있을테다.
일만 잘하면 된다. 일만.
***
그 일이 있고 난 후, 요 며칠 동안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학교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헤니웨이 건이 잘 마무리 되고 나서 부터는 그에 관해서 완전히 신경을 꺼도 되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엘리트는 엘리트인지 내가 학구로 돌아간지 얼마 되지 않아 황군은 이에 관련된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아무리 내가 준 정보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외의 인물들은 추적하는데 있어 시간이 좀 걸릴거라 생각했더니, 평소에 블랙 리스트라도 만들어 두었던 걸까. 일처리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뭔, 건을 물고 온 이가 차기 황권 계승자이기도 하니 이 점도 나름 압박이 되었을 것이다. 그 녀석이 들고 온 문제가 이교에 관한 건이기도 하고. 원래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이 예민한 편이었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일 거다.
"이교도들의 거점으로 파악된 곳 총 서른 곳 중 절반은 이미 전멸한 상태....이건 대체 누가 그런거지? 헤니웨이를 죽인 이와 동일인물인가? 아니면 이교도 내부에서의 입 막음인건가? 알 수 가 없네."
관계자로서 받은 경과 보고서를 읽던 나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에 머리를 긁적였다.
원작의 흐름이 뒤틀렸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인물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를 않는다. 어느 순간 갑자기 행동을 멈춘 것도 그렇고. 동기가 대체 뭘까. 이교도들 중 특정인에게 원한이 있던걸까? 그런거라면 이해가 간다만.
"아, 엘레나 보고 싶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알고 있는게 어중간 하니 그만큼 잡생각도 많이 든다. 조금 더 단서가 생기고 나서 그때 다시 생각을 하도록 하자.
어쨌든 이리 차근차근 하나 씩 사건을 해결해나가니 그 만큼 그 끝이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교도. 이 녀석들만 어떻게 해서든 제거를 하고 나면 그때 부터는 지금과 같이 아무런 걱정 없는 평온한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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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을 한지 정확히 이틀 후. 나는 황군에게서 엘트먼 에델바이스가 이교도들에게 구금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받았다.
이런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