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악역영애 (5)
꽤나 심하게 얻어 터진것 같아서 우리들은 모두 밑으로 내려가 오르커스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엘레나가 죽일 생각으로 팬 것 도 아니고 애초에 마법으로 보호 받고 있었으니 당연히 무사는 하겠다만은 눈으로 본 장면이 워낙 충격적이었던지라 알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신체적인것 말고도 뭐, 심적인 것이라던가. 그런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다행이게도 우리가 밑으로 내려갔을 때는 아직 일어서지는 못해도 이미 정신을 차린 듯 했는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댔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그것도 단체로 모여서 왔네. 땡땡이인건가? 이런 것들이 기사 학부의 우등생들이라니 기사 학부도 큰일이로군."
평소와 같은 오르커스였다. 장난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길레 우리도 장난으로 답해줬다.
"아주 찰 지게 얻어 맏던데 얼굴은 괜찮냐? 아니다. 머리를 너무 쌔게 맞아서 그런가 아직 제 정신을 못 차렸나 보네. 저기 얼굴 푸르딩딩한것 좀 봐라. 심해에서 기어 올라온 어인이라고 해도 믿겠다."
"그러게 말이야. 그나저나 멀리 까지 맞는 소리가 다 들려 오더군. 이제 말은 그만 하는게 좋겠다. 안정을 취해야지. 가만히 있어도 입이 아플 텐데 그만 입 다물고 쉬어라. 오르커스."
"오라버니! 거기서 그렇게 얌전히 맞아주고만 있으면 어떡해요!! 한 팔로 막으면서 계속 시간을 끌었어야죠!! 그러게 평소 제가 훈련하자고 할 때 같이 하자니까! 저였다면 말이죠. 그 상황에서..."
나, 라인하르트, 노엘 순으로 빈정거리며 인사를 건낸 오르커스를 내리 깠다. 노엘은 악의 없는 순수한 선의에서 하는 말인 것 같았지만 의도야 어쨌건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돌려 까는 것 처럼 들렸다. 우리들이 자신이 처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직관했다는 걸 이제야 알았는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이런 씨...보고 있었어?"
우리가 아무 말 없이 방긋방긋 웃어주자 녀석은 부끄러워 하며 귀를 붉혔다.
내가 오르커스에게 말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하고 있어. 보기 징그러우니까 빨리 일어나라."
"...썩을. 위로 좀 해줘라. 아무것도 못해보고 처 맞았다고."
"엘레나가 너무 대단한 걸 어떡하냐. 그건 그렇고 노엘 말처럼 너도 단련을 해야겠다. 신성력도 사용할 수 있는 녀석이 근접전에서 밀려 버리는 게 말이 되니. 강화 마법은 너도 사용할 수 있잖아. 거기에 신성력까지 더하면 명백히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은 네쪽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져 버린건 니가 평소에 단련을 하지 않아서 그런거야. 그리고 설령 패배를 직감했어도 끝까지 물고 늘어졌어야지. 실전에서도 이렇게 바로 포기해버리고 말거냐?"
내 말을 들은 오르커스가 쯧-하고 혀를 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서 아쉬운 점이 많았기에 이야기를 하다보니 약간 힐난하는 말투가 되어 버렸는데, 이에 별 말 없이 수긍하는 것을 보아하니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빠르게 포기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지금 오르커스의 나이에서 녀석의 성취는 정상의 범주는 아니었다. 엘레나가 너무 사기적인 것이지 오르커스가 어디 다른 녀석이랑 비교해서 꿀릴 수준은 아니다.
녀석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마법은 원거리 전에서 용이한 투사체 형식의 마법에 치중되어 있었다. 신성력은 기본적으로 본인과 아군의 신체능력을 향상, 치유하는데 있고. 직접적으로 전투에 나서서 싸우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녀석의 위치와 걸맞은 전투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도 그럴게 황제나 황태자가 전장의 맨 앞에 나서서 싸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르커스의 진가는 혼자가 아닌 아군이 있는 경우나 군을 통솔해야 하는 상황이 와야 발휘가 된다.
녀석의 마법이 위력적이지 못한 것도 아니고 버프 및 치유까지 담당할 수 있으니 뒤에서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는 매우 적합한 전투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후방에서 보호 받으며 이 모든 것을 행하면 이를 상대하는 적의 입장으로서는 당연 까다로울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다만 오르커스는 일반적인 지휘관이 아닌, 황자. 장차 제국의 황제가 될 이였기에 거기서 그쳐서는 아니되었다.
물론 언제나 그의 곁에는 그를 지킬 수 있는 이가 있을 테지만 예상 외의 변수는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기에 홀로 남겨졌을 때도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한다.
짊어지고 있는 것이 많으니까 전장에서도 방금 전 처럼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최대한 버티고 살아남을 줄 알아야지. 그렇다 보면 원군이 와 살 수도 있는 것이고 훗날을 도모할 수도 있게 된다.
원체 똑똑한 녀석이었기에 내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았을 테다. 나는 이것에 대해서 굳이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에서 안광이 번쩍이는게 이미 마음을 다 잡은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아, 할 것도 많은데..."
"원래 정상에 서 있는 사람이 해야하는 일도 가장 많은 법이지."
내 말에 오르커스가 나와 라인하르트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기야 너희를 부릴려면 그 정도의 노력은 해야겠지. 그런데 미래에 내가 황제가 되면 어쩔려고 이렇게 갈구는 거야. 어? 후일이 두렵지 않은거냐."
"설마 황제 씩이나 되는 인물이 쪼잔하게 어릴때 있던 일로 보복을 하겠어. 그리고 아직 아니니까 갈궈도 됨."
"내가 억울해서라도 빨리 제위에 오른다."
"오라버니. 아바마마가 아직 준다고 하시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을 하시면 어떡해요. 이건 아바마마 이야기도 들어봐야지."
"맞다. 폐하께서 언제 물려주실 줄 알고. 우리 모두가 가주가 되고 한참이 되서야 물러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할아버님이 말씀 하시길 지금 폐하의 건강 상태로는 앞으로 몇십년은 더 공무를 보실 수 있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노엘과 라인하르트의 말에 우리 모두가 웃었다. 오르커스가 황제가 되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때가 언제인지는 황제가 정한다. 어쨌건 지금의 오르커스는 그저 황자였기에 마음껏 갈구어도 된다는 소리다.
오르커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몇 번 흘려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리처드, 그 녀석이 맞는 것도 봐야지."
생각해 보니 아직 실습은 끝이 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엘레나는 계속 이기고 있을 테고 리처드도 마찬가지 일테다. 오르커스의 말 대로 우리는 리처드가 엘레나에게 맞는 장면을 보러 실습대로 향했다.
***
"실습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참관하는 것 뿐이라면 안될 것도 없지요. 부디 많은 것을 얻어가시기를."
전투 실습을 주관하고 있던 교수는 우리의 참관을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왜 이 시간대에 기사 학부 학생이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궁금해 하지 않는 것 같던데 자신이 담당하는 학부가 아니기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우리들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무관심이었다.
엘레나는 여전히 실습대 위에 서 있었는데, 우리가 오르커스와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그새 다른 학생들을 쓰러뜨렸는지 실습대의 모습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오르커스가 남겼던 잔불은 이미 꺼진지 오래였고 강한 충격을 받아 깨진 흔적과 함께 여러 상흔들이 실습대에 새겨져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다.
그녀의 다음 상대는 우리가 기대하고 있던 리처드였는데 그는 오르커스와는 다르게 처음 부터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하기야 앞에서 오르커스가 그리 당했으니. 나는 녀석의 우중충한 분위기도 좀 환기 시킬 겸 소리 내어 리처드를 응원했다.
"야!! 리처드!! 뭘 그리 쫄아 있어! 남자라면 허리 피고 당당히 걸어야지!!!"
"어? 데미안?!"
내 목소리에 녀석이 화들짝 놀라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라인하르트도 내 옆에서 손을 흔들자 리처드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는데 뭐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이 말 없이 알겠다고 답할 뿐이었다.
"음?"
리처드의 맞은 편에서 따가운 시선이 날라오길레 보았더니 엘레나가 뾰루퉁한 얼굴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내가 리처드를 응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이에 노엘이 내게 물었다.
"큰 일 났네. 데미안. 엘레나가 완전 삐져버렸어. 이제 어떻게 할꺼야? 지금이라도 응원하면 엘레나도 봐주지 않을까?"
"괜찮아. 일부러 한거니까."
"뭐?"
나는 엘레나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보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내 웃음과 엘레나의 행동을 보고 난 후 노엘은 그제야 내가 엘레나의 저런 모습을 보기 위해 일부러 장난을 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큭큭큭..어디 한번 잘 버텨 보라고."
오르커스는 리처드를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었는데 아마도 리처드가 자신 보다 더 호되게 당했으면 하는 것 같았다. 저렇게나 속이 좁은 녀석이 미래의 황제라니...제국의 미래가 어둡구나.
"먼저 가도록 할게."
"오세요."
엘레나와 리처드의 전투는 오르커스가 바라던 모습과는 정 반대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오르커스 때와 마찬가지로 엘레나의 상대인 리처드가 선공을 가져갔는데 리처드가 소환해낸 정령의 속성과 동일 속성의 원소 마법으로 파훼하는 것이 이번 전투에서 엘레나가 취한 방식이었다.
당연히 동일 속성의 마법으로 공격을 파훼 시킬려면 시전자의 역량이 상대보다 위에 있어야 했으니 엘레나는 리처드에게 자신과의 격차를 보여준 셈이었다.
둘의 전투는 짧고 간결하게 끝이 났다.
한번 공격이 무효화 될 때 마다 리처드는 각기 다른 속성의 정령들을 불러들였고 엘레나는 또 거기에 맞추어 원소 마법을 시전하였다. 그렇게 모든 공격이 무효화 되자 리처드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순순히 실습대 밑으로 내려갔다. 엘레나는 그런 그를 딱히 막아서지 않았다.
"이야...압도적이네."
"뭐, 뭐야!! 왜!! 왜 나한테만 그렇게 한거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때문에 옆에서 오르커스가 내게 개지랄을 해대었지만 나는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냥 녀석을 때리고 싶었나 보다. 연인이라고 해서 그녀의 속을 유리창 들여다 보는 것 처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오르커스의 질문에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리처드가 내려가고 한참동안 실습대 위에 아무도 올라가지 않아 수업이 끝이 난 줄 알았지만 엘레나가 계속 그곳에 서 있었기에 아직 끝이 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낯이 익은 소녀 한명이 몸을 벌벌 떨며 실습대 위로 올라왔다. 엘레나의 마지막 상대 같았는데 얼굴을 보니 왜 그리 어물쩡 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
"...."
"흑! 흐읍...흐으아아..."
엘레나의 마지막 상대는 얼마전 내게 고백을 한 그 소녀였다. 잔뜩 겁을 집어 먹었는지 눈가에 물기가 비쳤는데 이전에 리처드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엘레나가 이전처럼 마력으로 압박을 한 것도 아닌데 소녀는 엘레나와 눈을 마주한 것 만으로도 몸을 떨어대었다. 신기한건 그런 이가 그녀 한명 만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는데, 소녀가 몸을 떨자 이에 연쇄적으로 실습대 밑에 있던 학생들 또한 반응했다. 대부분 여학생들이었다만...우리가 보지 못했던 엘레나의 실습 상대들인지 다들 옷이 엉망이었다.
결국 실습대 위의 소녀는 제대로 된 전투도 치르기도 전에 먼저 정신을 잃었다. 동시에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참으로 절묘하다고 할 수 있다.
딱히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내가 엘레나였다 하여도 이와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이미 머리에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수는 종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실습장을 떠난 상황이었고 엘레나는 실습대 위에 쓰러진 소녀를 뒤로 한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엘레나의 얼굴은 소녀를 봤기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인지, 내가 리처드를 응원한 것에 삐진 것인지 모를 애매한 얼굴이었다. 그만큼 얼굴에 묻어난 감정이 옅다는 뜻이었지만 그리 좋은 감정인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우선 아까전 리처드의 일에 대한 변명부터 하기로 했다.
"엘레나 아까 리처드를 응원한건....읍."
나는 말을 다 뱉지 못하고 그녀에 의해 입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다가오자마자 갑자기 타이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어떠한 액션을 취할새도 없이 입술을 빼았겼다. 키스를 부끄러워 할 시기는 지난지 오래다만 너무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머리가 혼란스러워 했다.
"이건 좀 느낌이 색다르네요."
담담히 감상을 이야기하는 엘레나의 분위기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던 모습이었다. 어른스럽다고 해야할까. 딱히 무어라 표현을 하지 못하겠다. 이와 비슷한건 본 적이 있는데 지난번 처럼 그녀가 화를 내었을 때였다. 다만 이번에는 어느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분노는 보이지 않아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엘레나는 그리 짧게 이야기하고 살짝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시선에 모든 아이들이 압도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아이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때문에 나는 지금 이 모습이 지난 번 화원에서 하였던 일의 연장선이었음을 깨달았다.
"확실히...색다르네요."
뭔가 대마왕에게 붙잡힌 공주님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아, 나쁘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