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악역영애 (3)
데미안 크라우스.
엘레나에게 있어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는 이름이었다.
그것은 과거 그녀가 용기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계기이자 한때 두려워 하였던 이름이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가장 사랑하는 이가 지니게 된 이름이었으니 그 이름에 담긴 의미가 깊지 않을리가 없다.
엘레나는 옛 기억 속 자신이 데미안의 약혼자 였을 적의 기억을 꺼내보았다.
그다지 좋은 기억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볼건 또 아니었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이미 극복한지 오래이니. 감정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이 또한 오랜 시간동안 풍화되어 남은 잔여물에 불과하다. 엘레나는 잠시 과거에 스며들어 회상을 시작했다.
오래된 기억들 사이로 그녀가 보고자 하는 장면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눈 앞에 그려진다.
"거기 너. 멈춰라."
익숙하지만 정겹지는 않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눈을 돌리자 그곳에는 평소와 다르게 날카로운 눈매를 숨기지 않고 으르렁 거리고 있는 데미안이 보였다. 그와 함께 있던 시간이 길어서 그런걸까. 눈 앞의 남자가 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기분이 오묘했다.
기억 속의 데미안이 노려보고 있는 상대는 자신이 아니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한 남학생이었다. 데미안은 살기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주머니에서 장갑 한장을 꺼내 남학생을 향해 던지고는 동시에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후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고통이 실린 남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학-!!"
"왜 그런 눈으로 엘레나를 본 것이지. 그녀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아니면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아니, 그럴리가. 내가 바로 옆에 서 있었거늘. 그렇다면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음에도 그런 눈으로 그녀를 흝은 것은 나에 대한 모욕인가? 왜 대답이 없지? 내가 지금 여기서 너의 그 두 눈을 파내야지 답을 할 생각인건가?"
목을 움켜쥐고 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있으니 답이 나올리가 없다. 데미안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앞에 있었던 질문의 답이 중요하지 않았음은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데미안은 자신의 주먹에 정신을 잃은 남학생을 아무데나 던져 놓고는 바로 그 옆에 같이 있었던 친구로 보이는 남학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 앞에서 친구가 맞는 모습을 본 남학생은 잔뜩 얼어있었는데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지 작게 비명을 질러댔다.
"히..히익! 나, 나는 안봤어!! 그냥 옆에..."
"닥쳐라. 내가 보았다."
나머지 한 장의 장갑을 마저 던진 데미안은 아까와 똑같이 주먹으로 남학생의 머리를 두들겨 팼다.
죽지는 않았지만 새빨갛게 피떡이 되어버린 두 사람 때문인지 이곳의 분위기는 아주 무거웠다. 혹여 눈이라도 마주쳤다가 저들과 같이 될까봐 다들 데미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엘레나를 향한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저들이 저렇게 된 이유가 엘레나를 음심이 담긴 눈으로 본 것 때문이었으니, 피를 질질 흘리며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도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릴 정도로 간 큰 이는 이곳에 없었다.
그리 팼는데도 아직 분이 덜 풀린 것인지 데미안의 얼굴에 드리운 분노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여전히 그는 피가 맺힌 주먹을 움켜쥔 채 땅바닥에 쓰러진 두사람을 노려보았다.
그가 한번 고개를 돌리자 모두가 눈을 피했다. 데미안이 만들어낸 공포가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데미안은 기세를 갈무리 하지 않고 한번 주위를 둘러보더니 지금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제야 얼굴에 깃든 분노를 꺼트렸다.
데미안은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는 피 묻은 손수건은 자신이 때려 눕힌 이들에게 던져주었다.
"가자."
다시 엘레나에게로 돌아온 데미안은 그녀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데미안이 힘을 줘 붙잡은 것이 고통스러운지 엘레나의 눈에는 작은 눈물 방울이 맺혔지만 데미안은 힘을 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그는 모두를 뒤로하고 엘레나를 끌고 가는 것으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기억의 재생은 거기서 끝이었다.
다른 기억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기에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데미안이 약혼자 였을 때 어째서 자신에게 그러한 시선을 보내는 이가 없었는지를 알기 위함이었기에 이 정도만 보아도 충분했다.
"음..."
확실히 오래된 기억이다 보니 그다지 큰 감흥은 없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데미안과 함께한 시간보다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그런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있어 데미안은 이제 그였고 실제로도 그랬으니. 오래된 기억에 남겨진 감정은 이제는 사라지는게 맞았다.
그렇기에 엘레나는 기억 속 데미안의 모습을 보면서도 감정적이게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예전이라면 과거를 돌아 보았을 때 그저 데미안에 대한 화 밖에 느끼지 못했을 텐데, 데미안의 행동을 보고 그의 무엇이 다른 이들로 부터 자신과의 관계를 차단케 했는지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엘레나는 어째서 과거의 아이들이 자신을 건들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기억 속의 데미안은 주위의 이들은 자신의 힘과 지위로 찍어 눌렀다.
크라우스의 후계자라는 것 만으로도 보통 이들은 그를 건들 생각조차 안 할테지만 데미안은 거기에 한 술 더 떠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앞에서 그랬던것 처럼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니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 할 수 밖에.
앞서 보았던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던 아이들이 데미안에게 품은 공포심은 그런 데미안의 행동으로 부터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데미안에 대한 공포심이 엘레나와 아이들을 가로막는 벽이 되었다.
그녀가 데미안에게 만들었던 벽보다 더 넘기 어렵고 견고한 벽 말이다. 데미안은 이전 부터 폭군으로서의 이미지가 있었고 실제로 말 보다 주먹과 검으로 실력 행사를 했으니 엘레나 처럼 분위기로 압박하는 것 보다 더 효과가 뛰어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와 그녀의 차이는 직접적으로 건들이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 것과 보여주지 않은 것에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똑같이 해버리면..."
엘레나는 그리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데미안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는 건 못할짓이다. 애초에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을 뿐더러 그리 망나니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직접 손을 써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것 만큼은 반대할 수 가 없었는데 그렇게 강경하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전과 같은 일들이 다시금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합법적으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상황이라...전투 실습인가."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적인 분위기의 마법 학부라고 해도 학생들 간의 대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본보기를 보이는 것은 이 시간을 이용하면 될 것이었다.
다른 급우들이 보기에 평소 자신의 이미지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데미안의 공포심 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신을 건들면 안된다는 생각을 심어주기는 해야 했다. 그렇지 아니하면 계속 부딪히고 선을 넘으려 들 테니 말이다.
앞으로 어찌할지 까지 생각의 정리가 되자 갑자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집착인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과거를 돌아보며 보았던 데미안의 모습에서 지금의 자신이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그처럼 과하게 선을 넘는 부분은 없었지만 비슷하다면야 비슷했다.
"아무렴."
엘레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 자신이 그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녀 자신이 그에게 품은 사랑이나 소유욕, 독점욕을 한데 모아 생각한다면 집착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딱히 고쳐야 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한 때 한 사람의 집착에 시달려 고통스러워 했던 경험이 있었음에도 자신이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엘레나는 자신과 데미안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일방적이었던 데미안과는 다르게 그와 자신의 마음은 쌍방통행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는 아주 큰 차이였고 동시에 자신의 행동이 용인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반대로 그 역시 자신과 마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 엘레나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
"데미안 집중해라. 너 답지 않다."
"어, 응. 미안."
라인하르트의 지적에 나는 다시 정신줄을 붙잡았다. 원래 이러지 않는데 그 사건 이후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그런가. 어젯밤 꾸었던 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어 이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이리 정신줄을 놓치게 되어 버렸다.
불길한 꿈도 이상한 꿈도 아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좋은 꿈이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꿈에는 엘레나와 나 두 사람 만이 등장했는데 별 다른 일은 없었다. 그저 엘레나가 나를 꽉 껴안고 내가 엘레나를 껴안고 꽃밭에 누워서 대화를 나누는 꿈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주위에 핀 다른 꽃을 보려 고개를 한번 돌리려고 하면 엘레나가 내 턱을 누르며 자신을 보라고 말하고 다른 곳으로 눈 돌리지 말라고 말하며 오로지 그녀 만을 바라보게 하였지만 어쨌건 이상한 꿈은 아니었다.
아마도.
꽃밭에 누워서 지난 번에 있었던 일에 대한 엘레나의 마음을 듣다가 내가 그녀를 달래주기도 하고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서로가 가지고 있던 고민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는데 엘레나는 내가 다른 여자아이들에게 고백 받은 것을 걱정하고 있었고 나는 반대로 그녀가 다른 남자아이들에게 고백 받는 것에 대한 걸 걱정하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이런 주제는 부끄러워 잘 꺼내지 못할테지만 어차피 꿈이었기에 맘 편히 내뱉는 것이 가능했다. 내 고민을 듣고 웃는 그녀를 보니 꿈인데도 마음이 편해지더라.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 언제 부턴지 엘레나가 먼저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눈을 감았더니 방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이겠지....?"
이렇게 현실감 넘치는 꿈을 꾼지는 오랜만이었기에 쉽게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선지 내 몸에서 라벤더 향이 느껴지는 것 같지도 하였다.
파지지직-
라인하르트가 오러를 일으켜 주먹에 뇌기를 휘감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달 사이에 성장한 것은 나뿐 만이 아니었기에 딴 생각을 하며 라인하르트와 대련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마음을 다 잡고 눈 앞의 상대를 보니 뇌기를 두른 소년이 푸른 눈에 불꽃을 피우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인하르트가 내게 말했다.
"간다."
"와라."
검에서 손을 놓지 않던 라인하르트 였지만 오늘은 특이하게 검 없이 맨손으로 내게 덤벼왔다. 손에 뇌기를 머금은 수강(手?)을 둘러 어지간한 명검은 저리가라할 정도의 위력을 보여주어도 그의 박투술은 평생을 연마해온 검술과 비교하자면 급이 낮았다.
그래도 천재는 천재인지라 주먹을 내지르는 자세는 군더더기 없이 완벽에 가까웠다.
어떻게 하면 힘을 최대한 실어 칠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폭풍과 같은 라인하르트의 권풍을 피해 발을 놀리며 녀석에게 기탄을 날리는 것으로 간을 보았다. 검을 들고 있었다면 권풍을 찢었겠지만 라인하르트가 검을 내려놓았기에 나도 형평성을 맞춰 검을 놓았다.
녀석이 지닌 오러의 특성인지 정면으로 부딪치면 속 까지 찌릿찌릿 저려 오기 때문에 주먹을 맞대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할 일이었다. 사실 부딪치지 않으면 도망만 다녀야 하기에 승부를 볼 수 없다. 결국 부딪치기는 해야하는데 초반 부터 속이 지져지기는 싫어 그런 것이었다.
나는 손 끝에서 녀석의 혈도를 향해 몇 번 기탄을 쏘다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오러를 흩뿌렸다.
녀석이 번개라면 나는 불이었기에 하늘에서 검은 흑염이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러자 녀석도 다시금 손에서 뇌전의 폭풍을 만들어 응수 했다. 벼락과 불이 부딪치는 모습이 지금 이게 권법을 다투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오러를 부딪치는 것인지 모르게 되어 버렸지만 원래 대련에서는 그 상황에 할 수 있는 것은 다하는게 맞았다.
콰지지지지지지직-
불과 벼락이 서로를 삼키며 시끄럽게 외쳤다.
공중으로 뛰어올랐던 나는 중력의 법칙에 의해 자연스레 땅으로 떨어졌다. 전신에 오러를 둘러 서로 싸우고 있는 불과 벼락을 뚫고 아래에 있는 라인하르트를 향해 발을 내질렀다. 저곳을 뚫고 내려올 줄은 몰랐는지 녀석은 내가 바로 앞까지 떨어진 후에야 급하게 자신의 팔뚝을 교차해 공격을 막아내었다.
꽤 힘을 많이 줘 발길질을 했기에 라인하르트는 공격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굴러야만 했다. 그렇게 몇 바퀴 땅을 구른 녀석은 끝에 몸을 튕기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로 잡았다.
"꼴이 말이 아니군."
"넌 흙투성이야 임마."
라인하르트는 땅을 굴러 온몸에 흙이 묻었지만 나도 그에 못지 않게 엉망진창이었다. 아무리 몸에 오러를 둘렀다고 해도 불과 벼락을 한번에 뚫고 오기엔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지금 내 머리카락은 바짝 위를 향해 솟아 있었으며 살짝 탔는지 탄내가 코 끝을 맴돌았다.
누구를 보든 둘 다 엉망이었기에 누가 더 우위인지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손에 오러를 가득 담아 좌장을 내질렀고 라인하르트는 우장으로 맞받아쳤다. 담긴 오러의 양이 내가 더 많았는지 내쪽이 미세하게나마 더 우세했다. 사실 내가 더 오러를 쓰지 않으면 녀석의 오러가 속으로 파고 들어와 몸을 지졌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서로 내력 다툼을 하다가 내가 오른 손을 움직이려 하자 라인하르트도 거기에 대응할 생각으로 이번에는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내가 하려던 것은 주먹이나 장법이 아닌 녀석의 반응을 보기 위한 시늉이었기에 내 속임수에 걸려든 라인하르트는 쉽게 팔뚝을 붙잡히고 말았다.
"복부에 힘 줘라."
"!!"
서로가 양팔을 쓰지 못하게 되었어도 주도권은 내게 있었다.
내가 팔을 잡아당기자 라인하르트가 내 쪽으로 끌려왔고 나는 그대로 무릎을 올려 녀석의 복부를 가격했다. 아무래도 오러의 출발지가 되는 단전이 복부에 몰려있기에 여기를 공격 받으면 컨트롤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라인하르트가 잠시 오러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을 때 나는 이를 놓치지 않고 한번에 장력을 쏟아내어 녀석을 저 멀리로 날려보냈다.
다시 땅을 구르게 된 라인하르트는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녀석은 손을 들어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내게 알렸다. 이번에는 나도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얻어냈기에 라인하르트의 항복선언을 보자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땅에 앉아 호흡을 고르다가 마침 나와 라인하르트가 내려둔 검이 눈에 들어왔기에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오늘은 왠 일로 검이 아닌 주먹이야. 이렇게 처음 부터 주먹만 가지고 싸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처음 너와 대련을 했을 때 검은 몰라도 박투에서 밀렸던 것을 기억하기에 그랬다. 검사는 단순히 검만을 잘 다루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더군. 예외의 상황을 생각할 줄 알아야 했어."
"그런 예외의 상황까지 검으로 막을 줄 알게 되면 되는 거 아닌가."
라인하르트는 잠시 나를 보더니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맞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러지 못했으니까. 검사로서 더 성장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만 지금 당장 너와의 격차를 빠르게 줄이려면 이 방법이 맞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손이 검보다는 자유로우니 더 빠르게 움직일 수는 있겠지. 너가 보기에는 어떤가. 내가 틀렸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건 그렇고 평생 검만 잡은 녀석이 손은 왜 이렇게 맵더냐."
내가 장력을 겨루던 손바닥을 비비며 말하자 라인하르트는 웃으며 답했다.
"틈틈이 연습했다."
"나도 틈틈이 연습했어. 이래서 재능 있는 놈들이란..."
내 말에 다시금 녀석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내가 더 어이가 없을 노릇이었다. 나야 환생이라도 했으니까 이전의 경험 덕에 이런 것이지 그런 것 없이 순수하게 본인의 재능으로 나와 호각에 가깝게 다투는 라인하르트가 내 입장에서는 더 불공평했다.
숨 좀 고를 겸 우리는 잠시 가만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없이 청명한 하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주 뜬 끔 없이 든 생각이기는 하다만 아무것도 없이 푸른 하늘에 내 손으로 뭐라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밭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도화지에 손을 대고 싶다는 것과 비슷한 마음 가짐이었는데 이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이면 그리 불가능 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으니 슬슬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 했는데 다행이도 눈이 감기기 전에 라인하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음 시간에는 마법 학부에서 학생들 간의 전투 실습을 한다더군. 보러 가지 않겠나."
대충 마법사는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알아보러 가자는 소리였다. 설마 라인하르트 입에서 수업을 빼 먹자는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기에 나는 다소 떨떠름하게 답했다.
"수업은 어쩌고."
"다음 수업은 검술학과다. 한번 쯤 빠져도 별 일 없겠지."
"그건 그렇네. 노엘도 데리고 같이 보러 가자."
검술학 강의는 어쩔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