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악역영애 (1)
순간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레 일이 벌어진 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엘레나와 만나러 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거늘, 적어도 이곳에는 내게 약혼자가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텐데. 이리 사람이 많은 곳에서 당당히 고백을 해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다른 이에게 고백을 받을 것이라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었다.
이미 정인이 있는 사람에게 연인이 되자고 고백을 한다니, 내 상식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엘레나가 앞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고백을 받게 될 것이라며 고민하던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그래도 그건 그녀가 특별하기 때문이지 나 하고는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내가 어느 날 세상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놓고 엘레나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한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야 사실이니까.
내게 콩깍지가 끼어서 하는 말이 아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의 사실이 그러하다.
별빛을 닮은 듯한 반짝거리는 하얀머리와 눈 처럼 고운 피부. 투명한 자줏빛 눈동자는 그 어떤 보석에도 비교할 수 없었으며 그녀의 얼굴은 신이 사람을 만들 때 그 중 가장 고심해서 만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려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의 용모.
실제로 원작에서 그녀에게 반한 인물들이 누구인지 살펴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애초에 소설 이름 부터가 <공녀는 사랑받는다.> 아닌가.
앞서 원작에서의 선례가 있기도 하였고 하니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경계했던 것이지 반대로 내가 그 사건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는 누가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스스로의 외모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거나 나 자신의 가치를 낮게 보는 것은 아니다만 그런 비상식적인 일은 어디까지나 엘레나의 경우가 특수한 것이라 여겼으니.
내가 엘레나의 연인이라는 시점에서 부터 나, 데미안이 엘레나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의 벽이 되었듯 나에게도 엘레나라는 벽이 세워진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내게 사람들이 이 벽을 넘어서게 만들 만한 매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기껏해야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크라우스의 후계자라는 내 지위, 그정도 일려나?
남부 한정으로 왕가와 다름 없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우리 가문이었으니 가문의 힘이 목적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생각하기가 더 편했다. 내가 가진 배경도 매력이라고 한다면 매력으로 쳐주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조금 머뭇거리기는 했어도 결국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음?"
"저에게는 약혼자가 있고 저는 그녀의 연인입니다. 이정도면 설명이 되었겠지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 잠깐!!"
여기서 더 말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 것도 그렇고 더 이야기를 나눠야 할 이유도 없었으니 말이다.
사정을 모르는 남들이 보기에는 로맨틱한 깜짝 이벤트였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냥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오늘 처음 알게 된 사람이 갑자기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안 놀라는 쪽이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원래 목적이 엘레나와 만나는 것이었기에 지금 이 화원에는 엘레나가 있을 테니 괜히 오해를 살 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런 쪽에...많이 예민하니 말이다. 가끔 질투한거냐고 놀리기는 했어도 이에 대해서 심각하게 여기는 상황까지 가는 건 원치 않는다.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 짓고 자리를 떠나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이라 생각한 나는 뭐라 말을 거는 소녀를 무시한채 발을 옮겼다.
"아직 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내 앞에 섰던 소녀의 얼굴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이렇게 칼같이 거절 당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대체 무슨 자신감이었던 건지...내가 그렇게 문란한 남자로 보였나?
그리 말을 했는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거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녀는 나를 멈춰세우려 내게 손을 뻗었다. 그녀에게 붙잡혀서 아까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기는 싫었기에 이번에는 조금 강경하게 그 손을 쳐내려 하였다.
여기서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으니 말이다.
"읏?!"
하지만 내 손이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내게 닿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다른 이에 의해 막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만."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
북풍한설과 같은 서늘한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평소에는 봄바람 보다 더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 그녀의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겨울 바람보다 시리고 차갑다.
엘레나와 눈을 마주한 소녀는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전혀 맥을 못추리고 있었다. 비단 그 소녀 만이 아닌 주위에 있는 이들 모두가 그러했는데. 여과 없이 드러난 그녀의 감정은 주위의 이들에게 맹수 앞에 선 것 같은 위압감을 느끼게 하였다.
마물들의 살기에 익숙한 나도 몸이 놀라 움찔 거리는데 이러한 것에 내성이 거의 없는 아이들은 오죽하겠는가. 다들 엘레나의 기세의 눌려 아무말도 못하고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엘레나에게 손이 잡힌 소녀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공포에 질려 창백해진 얼굴색이 그녀의 상태가 지금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엘레나는 그녀를 압박하는 것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엘레나는 잡아챈 손을 자신 쪽으로 당겨 서로 간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와 눈을 맞대더니 아까보다 더 무거운 목소리로 이리 말했다.
"대화는 여기까지. 아시겠나요."
"..."
"대답."
"네..."
완전히 자신에 대한 공포를 각인 시키려는 듯 엘레나는 소녀에게서 답을 듣고도 바로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몇초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그런 엘레나의 행동은 소녀의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기에 충분했다. 엘레나가 손을 놓자 그녀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힘 없이 무너져 내렸다.
땅으로 허물어지는 그녀를 붙잡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엘레나는 잠시 쓰러진 그녀를 내려보다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바라보는 엘레나의 눈은 평소처럼 따스하기 그지 없었지만 미처 다 날려보내지 못한 감정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다.
뭐라도 말을 하려고 입을 움직여 보려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하든 변명이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원래 변명이라는게 잘못을 한 사람이 이를 모면하기 위해 하는 거였지만 지금 분위기가 그러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위험한 분위기라고 해야하나.
이렇게 까지 화가 난 엘레나를 본 적이 없어 얼을 탄 것도 있기는 하다.
엘레나는 말 없이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았는데 평소보다 힘이 꽉 들어가 있는 것이 그녀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와 손을 맞잡고 엘레나가 이끄는 대로 길을 걸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다다르자 엘레나는 꽉 붙잡고 있던 손을 풀더니 이번에는 손이 아닌 내 몸을 감싸안았다. 아까도 그렇고 몸에 느껴지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는데 마치 내가 어디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이게 단순히 내 느낌만이 아니었다는 걸 알려주듯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엘레나는 내게 말했다.
"가면 안돼요."
앞의 주어가 많이 생략되기는 했지만 엘레나가 무슨 의미로 내게 이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래서 빨리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던 것인데. 만약 이후에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말도 하지 말고 바로 자리를 떠야겠다.
"제가 가면 어딜 가겠습니까. 여기에 있어요. 어디 안 떠납니다."
엘레나를 안심시키 위해 항상 하던 대로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나 또한 엘레나가 나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었다면 바로 검 부터 빼들었을지 모르니, 저번 북부에서 리처드를 처음 보았을 때가 그러했다. 때문에 지금 엘레나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 조금은 진정을 할 필요가 있다.
유경험자로서 이때 얼마나 머리가 난잡해지는지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엘레나에게 말을 걸며 천천히 그녀의 마음 속에 생긴 불안을 밖으로 꺼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 곁을 떠나는 일은 없을 테니까."
"..."
"음, 왠지 못 믿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얼마 지나지 않아 엘레나는 나를 붙잡고 있던 팔에 천천히 힘을 빼었다.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다는 뜻이랴.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는 않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다.
엘레나는 계속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는데 그녀의 귓가가 빨개진 것으로 보아 아까전 자신의 행동에 뒤늦게 부끄럼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평소와 매우 반전된 모습이기는 했다만 부끄러워 할게 뭐가 있다고, 멋있기만 했는데.
솔직히 엘레나가 나타나 화를 내었을 때 조금 놀라기는 했어도 기분은 좋았다.
그녀가 화를 낸 이유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 있었기에 나와 그녀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멋있었어요."
그리 말하니 왜인지 엘레나는 작은 주먹으로 내 가슴을 두들겼다.
당연하게도 아프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