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사건은 언제나 동시에 (4)
엘레나와 함께 즐기는 즐거운 학창 생활이 목표인 만큼 문제가 될 요인들은 사전에 배제해 놓는 것이 내가 해야할 일이었다.
원작과의 사건 전개가 다르다고 해서 거기에 관련된 인물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으니 한번에 싸그리 정리해 버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건 힘도 많이 들 뿐더러 무엇보다 뒷수습이 문제인지라 일단 보류.
나름의 개연성을 챙기기 위해 비록 하는 시늉일 뿐이기는 해도 밑바닥에서 부터 차근차근 정보를 쌓아 올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답안지를 가지고 있어도 함부로 쓸 수가 없다는게 참으로 슬프다.
뭐, 당장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어도 이후 사후처리로 내가 골치 아파질 걸 생각하면 답안지는 봉인해 두는게 좋다. 원래 시험에서도 서술형에 문제 풀이 과정 없이 답만 써서 내면 부분 점수 밖에 못 받지 않는가.
오르커스가 열심히 뛰어다녔던 것 처럼 나 역시 친구들과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답은 미리 알고 있어도 거기에 도달하는데에 필요한 해설은 내가 직접 준비해야만 했다.
정보 수집이야...엘레나를 만나기 전까지 질리도록 하던게 백작가 산하의 정보 조직을 움직이는 것이었으니까. 확신은 줄 정도는 아니더라도 대충 정답에 대한 윤곽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의 풀이는 완성되어 있었다.
"기사학부에는 그렇게 의심 가는 사람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이전에 한번 거하게 물청소를 했더니 아카데미의 인선이 원작과는 조금 다르게 바뀌었다. 조지 헤니웨이의 경우를 보면 굵직한 녀석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잔챙이들은 대부분 그 청소 한방에 떨어져 나가 버렸다.
덕분에 제거할 사람이 줄었지만 그래도 사건의 원흉들은 온전하다는 점에서 내가 해야할 일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아, 이번에 메인 악역 중 한명인 헤니웨이가 죽었으니 해야할 일이 줄어들기는 한건가?
나는 헤니웨이가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그런 내 맘과는 다르게 아직 헤니웨이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수배령도 떨어졌고 오르커스도 나도 사람을 풀어 찾게 하고는 있지만 보름이 지난 지금 까지는 감감무소식. 죽어있든 살아있든 일단 이 녀석을 찾아야 아직 아카데미에 남아있는 잔당들을 어떻게 할 수 가 있는데 좀처럼 보이지 않으니 조금 답답했다.
어쩌면 내가 조급해하고 있는 걸지도.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헤니웨이에 대해서는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나는 오르커스가 보내주었던 명단을 다시 한번 꺼내 들었다. 꽤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내가 취소선을 그어 버린 후 남아있는 이름은 다섯이 채 되지 않는다.
애초에 오르커스가 범위를 너무 넓게 잡은 것이다. 귀찮게 꼬투리 잡힐 만 하면 다 집어 넣어서 적어 가지고.
아무리 황실이 승전의 분위기에 취해 있었어도 녀석들이 여기에 적힌 인원 만큼의 인력을 침투 시킬 수 있었을리가 없다. 그게 가능했으면 이 제국은 진작에 망해서 없어졌겠지.
원작의 주인공인 엘레나가 마법 학부인게 원인인지 명단을 보고 있던 나는 아카데미 부분에서 등장하는 악역들도 대부분 마법학부 쪽에 몰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근처에 있어야 엮이는 것도 매끄럽기 때문인가?
일단 지금 내가 확인한 바로는 기사학부에서 이교의 인물로 의심되는 이들은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뭣보다 검성이 있으니까.'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검성이 학부장으로 취임하기도 했으니 일이 터졌을 때 그 불길이 크게 번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초월자, 그 천외천의 인물들 중 으뜸이라고 불리우는 검성이 이곳에 있으니 이건 이것대로 안심이 된다.
남부의 일이 먼저 터지게 된 것으로 제국은 크게 한번 청소를 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지만 나는 그 대청소보다 검성이 은거를 깨고 에스텔리아에 온것을 가장 큰 혜택으로 보고 있다.
지상에 현신한 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진 초월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기에 그가 루덴에 있는 것 만으로도 원작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의 절반은 예방된 것이나 마찬가지, 나머지는 이교도와는 상관 없는 엘레나 개인의 문제였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네."
그쪽 방향으로 사고를 계속해서 이어가다 보니 한가지 내가 잊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바로 이 세계의 원작이 되는 소설이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에 속한다는 것을 말이다.
워낙 이교도들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와서 거기에 가려져 잠시 잊고 있었지만 원작에서 엘레나를 괴롭혔던 사건사고들은 반드시 이교도들과 연관된 것들만 있는게 아니었다.
로맨스 판타지.
이름에 붙어 있는 것 처럼 이 장르의 주요 서사는 남녀간의 로맨스를 다루는데, 이 장르에 속한 소설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갈등은 대부분 남주와 여주를 이어주기 위한 연애적 요소에서 기인되는 경우가 많다.
그건 원작인 <공녀는 사랑받는다.> 역시 마찬가지.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 내의 갈등의 원인과 대상이 이교도였다면 <공녀는 사랑받는다.>는 로맨스 판타지가 아니라 판타지 소설로 분류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후반부로 가서 전개되는 이야기의 흐름들을 보면 그래도 될 것 같기는 하다만...
아무튼.
엘레나와 남주 후보들이 엮이는 과정, 그 원인이 되는 부분에서 발생되는 일들이 원작 초반의 주요 스토리 라인이었다. 당장의 나, 데미안 크라우스만 해도 원래는 로맨스 판타지에 흔하게 등장하는 질 나쁜 약혼자 역할이지 않는가.
지금이야 내가 데미안이기에 원작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다. 남주 후보라고 불리우는 녀석들, 내 친구놈들은 그렇다 쳐도 나와 같은 이교도가 아닌 원작의 악역들은 그대로 였으니 말이다.
내가 엘레나와 약혼한 사이라는 걸 모르는 학생은 이 아카데미에 없겠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머리가 아닌 제 본능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머리와 아랫도리의 위치가 뒤바뀐 녀석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가 없기 때문이다.
원작과 달라진 지금의 엘레나를 떠올려 보면 그런 녀석들이 한 트럭 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이 편한 것은 또 아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 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하다.
"내가 엘레나와 더 자주 붙어있어야지 뭐. 별다른 수가 있나."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약혼자가 옆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대시할 사람은 없겠지.
.
.
.
"데미안 크라우스. 저와 사귀어 주시죠."
에?
***
마법학부의 별관 건물인 코넬리어 관은 건물 가까이에 붙어 있는 온실을 중심으로 잘 가꾸어진 화원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봄의 햇볕을 받은 꽃들이 싱그럽게 피어나는 모습은 한창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의 아이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코넬리어 관이 여러 마법식물의 식생을 관리하는 곳이다 보니 그곳에서 관리하는 화원에 핀 꽃들 역시 보통 꽃들이 아니었는데, 위험성은 둘째 치고 생긴 것 하나는 하나 같이 끝내주게 아름다웠다.
사람에게 위험한 식물들을 대중들에게 공개된 화원에 심을 이들이 아니었기에 아직 학업에 여유가 있는 신입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방과후 꼭 들리는 곳 중 한곳이 되기도 하였다.
엘레나 또한 수업이 끝난 지금은 화원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특별히 꾸미지 않아도 꽃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그녀의 모습은 그 자리에 있던 동성의 여학생들에게서 부터 수시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와아아..."
"하아, 진짜 저 외모는 반칙이라니까."
"에델바이스 양은 평소에는 잘 웃지 않으시다가 이곳에 올 때면 곧잘 미소를 지으시니까 더더욱 빛이 나는 것 같아. 혹시 꽃을 좋아하시는 걸까? 화관이라도 만들어 선물해드리면 내게도 저리 웃어주시지 않을까?!"
"그건 아닐껄."
같은 여자가 보아도 엘레나의 미모는 비현실적이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빛이 나는 새하얀 은발과 조화를 이루는 고운 피부는 마치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만인의 마음을 뒤흔드는 그녀의 뛰어난 용모는 많은 이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동경과 선망의 눈길을 받기도 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쓸 엘레나가 아니다. 좋은 감정, 부정적인 감정 어느 쪽이든 엘레나는 그 모든 시선들을 무시와 방관으로 흘려넘겼고 그런 그녀의 행동 때문에 그녀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더더욱 엘레나는 남들에게 있어 다가가기 힘든 높은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단지 뛰어난 외모 하나 뿐이라면 모를까. 그녀는 명실상부 마법학부 최고의 천재였으니.
데미안과 친구들 외의 대인관계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그녀 였지만 그런 그녀를 따르는 이들은 꽤 수가 되었다. 이미 이룬 것이 있기 때문일까. 엘레나가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절로 그녀를 위로 치켜 세워주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엘레나는 이에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뿐이었기에.
"슬슬 밖에 가져다 놓는게 그가 움직이는데 있어 편하겠지...?"
엘레나는 자신의 앞에 핀 꽃을 가만히 보고 있다 그리 중얼거렸다.
그냥 듣기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만약 이 자리에 데미안이나 오르커스가 있었다면 그녀가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둘에게 있어 가장 골치 아픈 일은 바로 한 달 전 사라진 헤니웨이 교수 건이었으니.
자신이 바로 그 사건의 원인이었음을 시사하는 엘레나의 혼잣말을 데미안과 오르커스가 들었다가는 기함을 토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지금 여기에 그 둘은 없었다.
충격적인 진실을 입밖으로 내민 것에 비해 엘레나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감정이 묻어나고 있다. 마치 이는 별게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실제로 그녀에게 있어 헤니웨이에 관한 것은 그저 아카데미에 숨어든 세작을 처리했을 뿐, 딱 그 정도 감상만 있을 뿐이지 그다지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데미안이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엘레나는 거기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가 헤니웨이의 제거 였을 뿐이다. 데미안과 즐기는 즐거운 학창 생활이 목표인 그녀에게 있어 그에 방해되는 방해물들을 치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미래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데미안 뿐 만이 아니었으니.
'헤니웨이가 말 없이 갑자기 사라진지도 이제 한달 째. 본단과의 통신도 끊어졌으니 다들 슬슬 숨이 막혀 올테지. 굳이 건드리지 않더라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튀어나오게 될거야. 그때 데미안이 한번에...완벽해!!'
데미안은 어떤 이들이 이교도인지 정확히 알고 있으니 그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기만 한다면 곧바로 행동에 옮길 것이 분명했다.
원래는 그가 신경 쓸 일 없이 전부 몰래 치워버리려 했지만 이번에 헤니웨이를 정리하고 난 후의 반응을 보고 엘레나는 깨달았다. 자신이 직접 나서게 된다면 오히려 그의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 다는 것을 말이다. 갑자기 변수가 생겨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를 확인한 엘레나는 적어도 교내에 있는 벌레들을 제거하는 것에는 손을 떼기로 했다.
그를 돕고 싶었을 뿐이지 괜히 머리 아프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기에 엘레나는 거기에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학교 생활을 즐겨야지."
인간관계의 관리가 조금 궤멸적인 수준이기는 하다만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엘레나는 데미안이 바라던 대로 그녀 나름대로의 학교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남들과 기준이 좀 다르더라도 한번 멸망했었던 세상에서 돌아온 그녀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걱정 없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이 나날 자체가 행복이었다.
화원이 소란스러워 지는 것에 엘레나는 그가 이곳에 왔음을 알았다. 이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엘레나는 자신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데미안이 바라는 엘레나의 행복. 그건 그녀에게 있어 그가 생각하는 것 만큼 많은 조건이 필요한게 아니었다. 그저 그가 자신의 옆에 있고 자신이 그의 옆에 있으면 되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히."
자신의 옷차림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한번 히죽하고 웃어주고는 데미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화원은 넓지만 그가 있는 곳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학생들이 몰려 있는 곳을 찾으면 그곳이 정답이 되었다.
소란의 진원지, 사람들이 몰린 곳으로 가니 확실히 그의 향기와 영혼이 느껴졌다.
다만 아이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데,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사람이 과하게 몰려 있는 것 같았다. 뭔가 짐작가는 건 없었지만 데미안이 이 인파의 중심 속에 있다는 것 만은 확실했다.
사람들로 만들어진 벽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데미안과 익숙한 얼굴의 소녀 한명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두 사람이 지금 화원을 소란스럽게 만든 원인인 듯 하다.
주변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한 것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만 엘레나는 구태여 이를 자세히 파고 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눈 앞에 데미안이 있었으니 다른 건 그닥 중요치 않았다.
"데미..."
"...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 다시 한번 말 해주도록 하죠. 데미안 크라우스. 제 연인이 되세요."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