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사건은 언제나 동시에 (2)
사람들은 이번 년도에 에스텔리아 아카데미아로 들어온 신입생들을 황금세대라 평가한다.
이제 막 입학한 새내기들을 상대로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호사가들이 흔히 하는 설레발과 같아 보이지만 이는 단순히 파티장에서 입 열기를 좋아하는 무지렁이들의 평가가 아닌 제국의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황실의 후계자부터 시작하여 제국 주요 명가의 후계들이 신입생으로 들어가게 된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명문가가 명문이라고 불리우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짊어진 이름의 무게에 어울리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고 틀림없이 다음 세대의 주역은 저들이었다.
평가의 근거는 굳이 아카데미 내에서의 행적이 아니어도 된다. 이미 저들은 입학하기 전 부터 제국을 시끄럽게 만들어논 천재들의 집합이었으니. 그런 아이들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 만으로도 이번 세대가 황금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리처드의 눈 앞에는 현 세대를 황금이라 부르게 만든 천재들이 앉아있다.
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데미안 크라우스를 포함해서 크로멜 공작가의 라인하르트 크로멜, 차기 황제인 오르커스 에스텔리아까지 각 분야에서 재능으로서는 역대 최고라고 평가를 받는 이들 뿐이다.
갑자기 자신 앞에 이런 이들이 모이니 솔직히 기분이 얼떨떨하다.
물론 리처드 에르투웬 또한 현 세대를 황금이라 부르게 만든 천재 중 한명이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들과 친분이 있던 것은 또 아니었으니 말이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데미안 정도..? 그것도 그리 많이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기에 다같이 모여있는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런 어색함이 사라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어이,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어허허. 어디서 괜한 트집으로 생사람을 잡어. 증거 있어?"
"카드에서 니 마력 줄줄 새고 있거든? 좀 사기를 치려면 제대로 좀 쳐라."
"괴물 새끼. 이걸 눈치채네."
어색한 기류는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금새 날아가 버렸다. 대신 데미안과 오르커스의 허물없는 대화에 리처드는 정신이 혼미해질 것만 같았다.
황족과 귀족, 이 둘의 신분의 차이도 차이였지만 평소 리처드가 생각했었던 두 사람의 이미지와 지금 눈 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 사이의 괴리감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소문에만 의지해서 만들었던 이미지였기에 현실과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오르커스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자가 될 이의 입에서 저렇게 쉽게 욕이 나올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전날 북부에서 보았던 그는 지금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 분위기였으니. 그 때 연무장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의 그는 무언가 범접하기 힘든, 그야말로 이야기 속의 귀공자와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 아침에 다시 재회하였을 때 역시 이전보다 덜했지만 여전히 그러한 느낌이 남아있었다.
그런 사람이 하루도 안되어서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여주니 리처드가 당황스러워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냥 한 말이 아니었구나.'
리처드는 데미안이 아침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친구가 되자고 했던 그.
귀족이란 원래 의례적으로 말을 던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리처드는 데미안의 저 말 또한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였다. 데미안과 딱히 마찰이 일어난 적은 없지만 그와 리처드의 사이에는 엘레나라는 주제가 있었다.
1년이 지난 지금은 마음의 정리를 끝낸 리처드였지만 데미안이 이를 어찌 생각할지 모르니 자연스레 그의 사고는 이러한 방향으로 향해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연인을 좋아했던 남자에게 그렇게 말을 건낼 것이라고는 생각을 할 수 없었으니까.
"리처드. 니 차례야."
"아, 어."
데미안이 카드를 내밀며 리처드에게 말을 걸었다. 오르커스와의 신경전이 드디어 끝이 난 모양이다. 오르커스의 얼굴에 활기가 도는 것을 보아 데미안이 조커를 가져간듯 했다. 데미안은 비장해 보이는 얼굴로 리처드에게 말했다.
"신중하게 고르라고 어떤게 조커일지 모르니까."
"....운에 맡기지 뭐.'
리처드는 데미안의 말에 피식 웃으며 카드를 한장 뽑았다. 신중하게 고르나 마나 어차피 운에 달린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데미안이 손 장난을 치기 전에 빠르게 카드를 뽑는게 더 이로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렇게 뽑힌 카드에 그려진 그림은 공 위에 올라탄 광대. 조커였다.
"이런..."
"하하. 그러게 신중하게 잘 골랐어야지."
자기가 건내준 주제에 웃고 있는 데미안을 보니 얄밉다는 마음이 드는 리처드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리처드의 입꼬리 또한 올라갔다.
데미안의 얼굴에는 어떠한 악의도 보이지 않는다. 내비쳐지는 것은 순수한 호의 뿐. 그 사실이 혼란스러웠던 리처드의 마음을 빠르게 다잡아주었다.
굳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꺼내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여기에 있는 모두 게임을 즐길 생각 밖에 없었고 리처드 역시 그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다면 그저 즐길 뿐이다.
리처드는 자신의 카드를 가져갈 라인하르트를 마주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무감정한 눈이었지만 그 진청색 눈에 희미하게 감돌고 있는 감정이 즐거움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러한 감정을 보았기에 리처드는 이전 보다 한결 편하게 라인하르트를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는 라인하르트도 마찬가지였는지 여태껏 석상과 같이 하나의 표정 만을 고수하던 그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오."
리처드에게서 카드를 가져간 라인하르트는 짧은 탄성과 함께 패에 있는 카드를 버렸다.
여전히 조커는 리처드의 손에 있었다.
젠장.
***
"흐아아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리처드는 기지개를 쫙 피며 굳어있던 몸을 풀어주었다. 하늘 높이 떠 있던 해도 지금은 땅 밑으로 들어간지 오래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자리에 앉아서 게임을 계속하고 있었으니 몸이 이렇게 굳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재미있었어."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리처드는 방금전 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리 말했다.
트럼프 카드로 할 수 있는 게임은 어지간해서는 전부 다 해본것 같다. 원래 룰을 알고 있던 것도 있었고 이번에 처음 해보는 게임 역시 있었다. 여태껏 카드 게임에 흥미를 느껴본 적은 없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고 해야하나. 이전과는 다르게 게임을 하면서 즐겁다는 감상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감상을 느끼게 해준 원인이 다름아닌 이번에 새로 사귄 친구들 덕이라는 것을 리처드는 모르지 않았다. 카드는 연결고리였을 뿐 이들과 같이 즐기는 것에서 나온 감정이었다는 걸 말이다.
원래 리처드는 아카데미에서 데미안과 엘레나와 마주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약 같은 자리에 있게 되더라도 자신 쪽에서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리처드 본인은 마음의 정리를 끝내었지만 자신의 존재가 둘을 불편하게 만들 수 도 있었으니.
고백을 한 적은 없었지만 여태 그렇게 티를 내고 다녔으니 두 사람이 리처드가 한때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몰랐을리가 없다. 적어도 리처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날 북부에서 데미안에게 그런 모습까지 보여주고 말았으니 이에 대해서는 거의 확신하고 있다.
방은 어두웠으나 리처드는 불을 켜지 않았다. 대신 창가로 가 밤하늘을 빛내고 있는 별들 아래에 섰다.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은 방을 밝혀주지는 못했으나 그의 시야를 밝히기에는 충분했다.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네. 나는."
엘레나하고 같은 학부, 데미안과는 옆방. 멀리 떨어져 있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웃기게도 의도치 않게 두 사람과 매우 가까이 붙어 있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있었던 일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그가 걱정했던 일들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엘레나는 1년전과는 다르게 평범하게 다가와 인사를 건내었고 데미안과는 아예 친구가 되어 버렸다.
마음의 정리를 끝냈다고 수시로 되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마주하는 저 둘을 보고 있으니 여전히 자신은 과거에 머물러 있음을 알았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고 있었던건지. 자기자신을 위한 행동을 둘을 위해서 라고 포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를 식힌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머릿속에 있던 상념까지 날려버려 주었는지 아주 개운하기 짝이 없다. 비어진 머리에는 저 반짝이는 밤하늘을 대신 채워두도록 하자. 1년전 북부에서 올려다 보았던 하늘보다 더 반짝거리는 저 하늘이 이제는 밉지가 않다.
리처드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고마워, 위로해줘서."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 하나가 리처드의 말에 천천히 방으로 들어왔다.
이에 리처드는 웃으며 창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