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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111화 (111/131)

< 111화 > 사건은 언제나 동시에 (1)

코끝을 스치는 라벤더 향에 나는 엘레나가 근처에 있음을 알았다. 그 향기가 오로지 엘레나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그녀의 향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실 그녀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로 엘레나의 존재는 계속해서 기감에 잡히고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지를 하고 있다 정도의 얕은 영역에 있을 뿐이었지 그것만으로는 나를 만족시키기에 부족했다. 이는 두번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오감, 다섯가지 감각이 존재한다.

육감이라 칭해지는 기감(氣感)과 후각은 통과했으나 아직 네가지의 감각이 남아있는 것이다. 과반이 넘는 감각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부재는 오히려 갈증과 같았고 그렇기에 남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나는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머릿속 한 구석에 있는 이성이라는 친구가 조금 과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을 던졌지만 내 머리는 아무렇지 않게 질문과 동시에 이에 대한 자기합리화를 끝마쳐 버렸다.

'아침에 못 만났잖아.'

이 한마디의 단어는 이성을 다시 머릿속에 묻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아직 아카데미에 다닌지 하루를 넘지 않았다. 그 말은 반대로 아직 내가 엘레나가 곁에 없는 생활을 한지 몇시간채 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엘레나와의 만남이 루틴과 같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 당연시 되던 것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게 되기에 있어 하루라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물론 반대로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런 행동이 과하게 느껴지는 것이겠다만, 원래 자기합리화라는게 이런 것이었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다.

연초를 끊으려 해도 금세 금단 증상이 오는 애연가 처럼 나는 엘레나라는 존재에 금단 증상이 생겨버렸다. 이것도 중독이라고 하면 중독이라 할 수 있겠지만 해로울거 하나 없는 이로운 중독이었으니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처럼 티를 내는 것도 엘레나의 눈이 없는 곳에서만이었다.

"후우....진정해. 소수를 세는거다."

엘레나가 있을 객석으로 향하는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가며 나는 속에 찬물을 들이 붇는 것 처럼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역설적이게도 그녀 때문에 뜨겁게 달궈져 있던 머리는 점점 평소의 모습을 찾아갔다.

여전히 속은 뜨거운 감자와 같았지만 엘레나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야 부끄러우니까.'

물론 엘레나는 내가 그러는 모습을 보는 쪽을 더 좋아할게 분명하다만...

그저 나의 그런 면을 엘레나에게 보여주는 것에 대한 부끄럼이 문제였다면 이처럼 머리를 식히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그러했듯 엘레나 역시 나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여전히 부끄럼을 많이 타는 편이기는 하지만 요즘은 마냥 당하고 있는 것만이 아닌 가끔씩 공격을 해오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분위기를 탔는지 잔뜩 치고 올라오는 상황인데 여기서 만약 내가 방금과 같은 표정으로 엘레나와 마주한다면 잔뜩 의기양양해진 엘레나가 어떻게 행동을 해올지 안봐도 눈에 선하다.

엘레나의 장난이 싫지는 않다.

오히려 그녀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있어 평소에도 용기를 내서 좀 더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다만 방금과 같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거기에 장난까지 더해진다면 나도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할 줄 모르기에 그런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고 내가 내 몸을 통제할 수 있을 때라면 몰라도 방금과 같이 감정이 이성을 이겨버린 상황이라면 아마 평소에는 장난으로 되받아칠 수 있는 것도 그러지 못할것이다.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펑-! 하고 터져버려 그대로 자제력을 상실해 버리겠지.

일반적으로 자신이 그런 상태가 되어버린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많이 걱정되는 것은 성욕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만약 그리 된다면 지금은 잠잠해진 광증이 다시 깨어날 수 있으니, 이것도 일어나느냐 아니냐를 알 수 없는 아주 만약의 일이다만 그로인해 내가 원작의 데미안과 똑같이 행동을 하게 된다면 엘레나가 어찌 반응하느냐는 둘째 치고 먼저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를 면치 못할 것이다.

요 몇개월간 겪을 일이 없었다고는 하나 광증이 치고 올라올 때의 내 머리가 어찌 변해 버리는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여기에 관해서 조심해질 필요가 있었다.

부끄럽게도 아직은 나 자신에 대해서 100% 믿음이 가지를 않으니 말이다.

어느정도 정상으로 돌아온 이성이 정신줄을 단단히 부여 잡아주니 내가 나를 다루고 있다는 확신과 안도감이 들었다. 옛날처럼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하고 볼도 한번 잡아볼까 생각했지만 계단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니 그만하기로 했다.

계단을 넘어 객석으로 올라오니 엘레나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언제 올라오는지 기다리고 있던건지 계속해서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먼저 몸을 움직인건 엘레나였다.

내 앞에 선 그녀는 찬찬히 내 몸을 훑어 보더니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만족했다는 얼굴로 내 가슴에 몸을 묻었다. 가문에 있을 때도 대련을 한 후에 항상 하던 행동이었으니 나는 자연스럽게 엘레나를 받아냈다.

"지금 수업 시간 아니에요?"

"그럼 데미안은요. 데미안도 수업 시간인데 여기에 있잖아요."

"저는 교수님이 일찍 보내주신 거구요."

"저도 똑같은 거죠."

나는 방실방실 웃으며 답하는 엘레나의 말에 고개를 돌려 오르커스가 있는지 한번 찾아보았다.

올라오기 전에 확인했던 대로 오르커스는 이곳에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기척 역시 느껴지지 않는다. 이에 내가 고개를 갸웃 거리자 엘레나가 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2교시는 시험이었어요. 교수님께서 문제만 다 풀면 나가도 된다고 하셔서 이렇게 일찍 나올 수 있었던 거에요."

그리 말하면서 검지 손가락을 내밀은 엘레나는 내게 자신이 1등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문제를 빠르게 푸는 것하고 정답을 맞추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만 나는 엘레나가 문제의 답을 틀리게 적어 낸 상황을 떠올릴 수 가 없었다. 아마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야 실제로도 엘레나는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을 테니까.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칭찬해달라는게 눈에 보인다. 쓰다듬 받기를 기다리는 강아지를 눈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아 모를레야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요구대로 머리를 몇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칭찬을 대신했다. 별다른 말 없이 쓰다듬는 것 뿐이었지만 엘레나는 그것대로 만족해 하는 것 같았다.

"히히..."

아, 행복하다.

***

"할아버님을 뵈었단 말인가."

엘레나를 만나러 가는 길에 겪었던 일들을 라인하르트에게 이야기해주니 놀란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하긴 나도 거기에 갑자기 검성이 나타날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제국제일검이라 불리는 초월자의 경지에 오른 검사라 지금의 나로서는 그 기척을 읽는 것도 불가능하다.

기척을 읽는 것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는데 검성은 뭐랄까...무생물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정확히는 자연기물과 하나가 된 것 같다고 해야하나. 이미 인지하고 있는 사물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어 인간이라는 별개의 존재로 인지하기가 힘들다.

아버지와는 조금 다르면서 같은 느낌이었는데 아마도 시간이 지난다면 이것도 익숙해지지 않을까.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또 갑자기 사라지시더라. 원래도 그렇게 휙휙 사라지시는 분이셔?"

"원래는 그러시지 않으셨다만 은거 이후에 그리 되신것 같다. 나와 아버지가 놀라는 모습에 재미가 들리신 것 같은데 많이 불편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하도록 하마."

그런거였냐. 생각했던것보다 재미있는 분이셨네.

나와 라인하르트는 지금 내 기숙사 방에 있었다. 현재 기숙사에 돌아온 학생들이라고는 기사 학부의 1학년생들 밖에 없어 전체적으로 한적한 분위기다. 이는 내 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아침에 이야기했던대로 라인하르트와 리처드를 만나게 하려고 부른거였지만 뒤늦게 마법학부의 수업이 끝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어 지금과 같은 그림이 되었다.

기사 학부의 수업은 대부분 검술학과 때의 대련과 비슷했다.

학과가 바뀌더라도 연무장으로 나와 대련을 해야한다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다루는 무기가 바뀌는 것 빼고는 이전의 수업과의 차이점이 없다고 할까. 전부터 여러 무구를 다루는 방식에 익숙해졌기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물론 나와는 다르게 학과에 따라 무기가 바뀌는 만큼 그에 따라 역량에 변화를 보이는 아이들도 몇있었다. 대표적으로 라인하르트를 예시로 들 수 있겠는데 검을 들었을 때와는 다르게 창을 들었을 때의 그는 이전처럼 그렇게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줄 수 없었다.

나를 기준으로 두고 판단한 것이기에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특출난 것은 여전하다만 검을 들었을 때보다는 못한게 맞다.

뭐, 천재라는 수식어가 어디가는 것은 또 아닌지라. 대련을 하는 것으로 순식간에 실력을 끌어올리니 약간의 시간이 흐른다면 이러한 감상도 더는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학부의 전통 때문에 시간표는 이름만 다를 뿐이지 하루종일 대련을 하는 것과 같았다.

첫날이라 오리엔테이션으로 수업이 널널한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대련과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오티가 같지는 않지만 이 시간표는 몸은 피곤하지만 수업은 일찍 끝난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기사 학부의 수업은 다른 학부들 보다 일찍 끝을 내게 되었다.

"뭔가 시간이 남아도는 것 같네."

원래의 시간표를 따라간다 해도 가문에서 지낼 때와 비교한다면 많이 널널한 편이다. 그때는 소가주로서의 업무도 병행하고 있었으니 학생이 된 지금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입학전에 미리 짜둔 시간표가 있기는 하다만 수업이 워낙 빠르게 끝나버려 이미 거기에 적힌 일과는 다 끝내버린 상황이다.

"음, 그렇군."

라인하르트가 내 혼잣말을 받았다.

녀석도 나와 같은 상황이었기에 무얼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간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오래 동안 대화를 나누는 것은 또 아니었다. 라인하르트가 그렇게 말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 나 역시 억지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사운드가 많이 비어있어도 분위기는 어색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나와 라인하르트 둘다 지금 이 정적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똑똑-

정적에 잠겨 서로 마음을 놓고 있었기 때문일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우리 두 사람 다 여기에 사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거리로는 라인하르트가 더 가까웠기에 나와 라인하르트는 잠깐 눈싸움을 하다가 결국 눈을 먼저 깜빡이게 된 라인하르트가 문을 열러 갔다.

"데미안 잠깐 이야기 할게...어우씨! 깜짝이야!!"

"전하 안녕하십니까."

"어, 어. 그래. 그런데 여기 데미안네 방이 아니었나?"

"여어, 난 여기에 있어."

방으로 들어온 오르커스가 침대에 누워 늘어져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뭔가 못볼걸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사람을 보는지 원, 사람이 이렇게 늘어져 있는거 처음보냐.

"뭐하냐...?"

"뭐하긴 쉬고 있지. 방에는 무슨 일? 심심해서 왔냐?"

"...뭐, 그런걸로 하자."

"뭐라는 거야?"

애매하게 말을 끊는 오르커스였지만 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녀석이 나를 찾아왔다는 건 분명 무슨 용건이 있기 때문일텐데, 라인하르트 있기 때문인지 조심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녀석도 심심했던 걸까. 오르커스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방을 몇번 둘러보다가 의자에 앉았다.

다시 조용해진 방.

겉으로 보기에는 아까와 달라진게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오르커스가 와서 그런지 나와 라인하르트 둘 만 있을 때와는 또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전에는 아무말 없이 있어도 좋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뭐라도 말을 해야할 것 같은 분위기? 라고 해야하나. 전처럼 가만히 있으면 어색해질 것 같은 기류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오르커스와 라인하르트 때문인것 같다만 오르커스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본인이 먼저 나서서 입을 열었다.

"게임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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