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수준 차이 (5)
대련이 끝나고 데미안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엘레나는 데미안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라도 때울 겸 멈춰두었던 과거의 기억을 다시금 재생시켰다. 이전과 같은 후회의 의미는 없었다. 순전히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호기심에 기인한 회상이었다.
과거와 현재에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를 엘레나가 아니다만 이전과는 약간 다른 마음가짐으로 과거를 돌아보았다. 음, 한마디로 마음에 여유가 생겼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이유야 어쨌건 그녀는 다시 기억을 되감았다.
어느새 엘레나의 눈에 비친 풍경은 처음으로 회귀를 하여 과거로 돌아왔을 때의 시절로 돌아와 있었다.
그때도 엘레나는 지금과 같이 연무장의 객석 위에서 이들의 대련을 지켜보았는데, 그때와는 목적도 그녀의 눈에 비춰지는 대련의 양상도 전부 달랐지만 장소와 사건의 유사성 때문인지 그 날의 기억은 당연하다는 듯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무엇 때문에 그날 연무장으로 향했더라.
노엘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고 전 날 데미안에게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함도 있었던 것 같다. 상당히 복합적인 이유였던지라 명확히 딱 무어라고 콕 찝어내기가 어렵다. 뭐, 이곳으로 향했던 이유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니 이에 대해서는 뭐가 이유가 되었든 상관이 없으랴.
중요한 것은 그리로 향한 목적이 아닌 엘레나가 그날 그곳에서 본 광경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보았던 광경과 지금의 차이는 단순 인물로만 두고 보았을 때 헤일리가 이곳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밖에 없을 것이다. 그 날 보았던 렉스 모피어의 수업 주제도 조를 이룬 난전이었고 오늘 대련의 주역들은 지금과 같이 연무장에 서 있었다.
라인하르트, 노엘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미안까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이 노엘과 데미안이 처음으로 만났던 날인 것 같다.
에델바이스와 크라우스 사이의 약혼관계가 사라지면서 황제가 굳이 남부로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어졌으니 노엘과 오르커스가 남부에 올 일도 없었을 테고, 그래서 그랬던걸까. 그때 엘레나가 연무장에서 보았던 광경은 사람만 많았지 오늘날에 와서 보았던 노엘과 데미안의 첫 대면 때와 비슷했다.
지금과는 달리 아직 노엘과 친구가 되지 못했던 라인하르트는 노엘이 데미안과 붙자 빠르게 그 자리를 이탈했다. 상급자에 대한 태도가 엄격한 이였으니 납득이가는 행동이다. 사실 라인하르트 뿐 만 아니라 데미안을 제외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노엘을 대하기 어려워했을 것이었다.
아무리 공작가와 크라우스의 위세가 높다고는 하지만 지존은 오직 하나. 황실이었고 노엘은 그 황실의 단 둘 밖에 없는 후계자였으니 부담이 가지 않는게 이상할 일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데미안만이 그녀를 달리 대했다.
데미안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노엘을 대했는지는 엘레나가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가지 짐작이 되는게 있다면 그는 사람을 사람으로 본다는 정도일까. 노엘이 검을 들고 자신의 앞에 섰으니 황녀라기 보다는 같은 수업을 듣는 동급생으로 취급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치열한 접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날 노엘과 데미안의 첫 대련과 마찬가지로 노엘은 검을 부러뜨려 먹었고 데미안은 바로 다음 상대를 찾아 연무장을 휩쓸었다.
당시 이 광경을 보았던 많은 이들이 놀란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는데 거기에는 당연히 과거의 엘레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놀라기는 하였지만.
"바보..."
엘레나는 이때의 자신을 떠올리면서 살짝 힘을 줘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후회를 상정에 두고 한 회상은 아니었지만 과거 자신의 행동을 생각해보니 이렇게 라도 해줘야 화가 쌓이지 않을 것 같았다.
왜 그 모습을 보고도 그를 자신이 알고 있던 데미안이라 여겼을까.
위화감을 확인하러 갔다면서 가장 결정적인 증거를 보았음에도 여전히 그와 데미안을 동일시 했다는 것이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이 보다 바보 같은 행동이 따로 없었다. 그만큼 이전의 기억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뜻이었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거다.
이전에는 몰랐었지만 지금의 엘레나는 알고 있다.
그날 데미안과 노엘의 만남이 어디까지 이어지게 되는지를 말이다.
이에 대해서 노엘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은 없었지만 그녀가 그런 마음을 품게 되는데 있어 이 날의 일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 쯤은 눈이 옹이구멍이 아니고서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이건 문제로 삼을 만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에 있어 누가 문제를 삼을 수 있을까. 엘레나가 아쉬워하는 것은 자신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이를 사소한 일로 허비했다는 것에 있었다.
다만 과거를 떠올리는 엘레나의 얼굴은 어둡지 않았다. 이제는 무엇이 문제였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은 과거와는 다르니까.
가까이서 느껴지는 데미안의 기척에 엘레나는 여기서 회상을 끝냈다.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마음속 깊은 곳이 무언가 따뜻하게 채워지기 시작한다. 역시 멀리서 보는 것 보다 가까이서 보는 것이 더 좋다. 데미안의 표정을 보니 이러한 느낌을 느끼고 있는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이러한 감정은 배가 되어 불어났다.
***
아직 2교시 강의가 진행되고 있을 시간. 오르커스는 유유히 학부 건물을 거닐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멜리나 콥스의 시험을 끝낸 사람은 엘레나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만점으로 강의실 밖으로 나오기는 했어도 그녀가 출제한 시험은 만점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문제를 다 풀기만 하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시험이었다. 물론 멜리나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지만은 어쨌든 시간이 흐를 수록 문제를 다 푼 이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앞의 이유 때문에 일찍이 강의실 밖으로 나온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오르커스 또한 천재라 불리우는 몸. 엘레나와 리처드보다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어도 다른 학생들 보다는 빠르게 강의실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리처드 에르투웬. 그 녀석은 황혼의 탑 후계자니 그렇다쳐도 엘레나는 대체...'
세번째로 강의실 밖을 나오게 된 오르커스는 앞서 나간 엘레나를 떠올리고는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성격상 답이 아닌 것을 적어서 내지는 않았을 테니, 문제를 직접 보고 푼 오르커스의 입장에서는 5분만에 문제를 다 풀고 나간 엘레나의 모습은 상식을 넘어서 있었다.
공간학에 대해 빠삭하게 공부한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건들 수 없는 문제들도 몇 있었으니. 타 학과를 집중적으로 선택한 이들이 풀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였다. 결국 그런 문제를 풀어냈다는 시점에서 오르커스도 비범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5분은 좀...
엘레나가 얼마나 뛰어난 마법사인지는 지난날 있었던 사냥대회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되니 또 그건 그것대로 색달랐다.
마법계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의 재능이라.
솔직히 천재라 불리는 아이라고 해도 엘레나를 보면 질투가 날 만도 했지만 오르커스는 그런 감정은 가볍게 눌러주고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렸다. 가령 그녀가 제국에 해가 될지 안될지와 같은 것 말이다.
가뜩이나 에델바이스와 크라우스 두 가문이 엮이는 것 만으로도 큰일인데, 그 두 사람이 한 시대에 같이 초월자가 되어버린다면 대륙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힘이 한 곳으로 모이게 된다.
제국 소속의 초월자가 늘어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만 너무 과한 힘의 집중은 경계해야하는 것이 맞다.
"뭐, 그건 데미안이 있는 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말이야."
세상 심각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던 오르커스는 데미안을 떠올리자 금세 얼굴을 풀었다.
마냥 신뢰하는 친구였기에 그런 것은 아니었고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엘레나가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데미안의 행동 내에서 움직일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녀 홀로 독자적인 존재라면 모를까 데미안이라는 억제기를 옆에 둔다면야 그녀의 행동을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권력에 한 해서는 거의 무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데미안이라는 인물이었으니 이는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오르커스는 알고 있다.
"딴 생각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할까."
어느 정도 건물 안을 걷자 어느 순간 부터 오르커스는 마법으로 소리를 지워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고 있던 곳은 엘레나와 같이 검술학과 대련이 일어나고 있는 연무장이 아니었다. 물론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가 해야할 일이 있었다.
오르커스의 발이 멈춰선 곳은 어떤 불 꺼진 연구실의 문 앞이었다. 연구실의 주인은 출근을 하지 않은 것인지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곳의 주인이 누군지는 문 옆에 걸려있는 명패를 보면 알 수 있다.
[생명학과 담당 교수 조지 헤니웨이]
문 옆에 걸린 명패에는 그런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오르커스도 알고 있는 이름이다. 이전에 그가 데미안에게 보냈던 문서에 적혀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으니 모를리가 없다.
오르커스는 텅 비어버린 연구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어제 확인했을 때는 딱히 결근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는데 말이지. 결계는 멀쩡하네. 뭐, 이건 호재인가."
모처럼 시간이 생겼으니 일 좀 처리할 겸 들린 오르커스였다. 처음에는 직접 만나서 간단히 이야기만 나누려고 했던 그 였지만 아무도 없는 연구실을 보고 있으니 생각이 바뀌었다. 오르커스가 문고리를 잡고 마력을 이리저리 꼬아 흘려보내니 잠시 진동하던 문은 언제 그랬냐는 것 처럼 활짝 입을 열었다.
바깥에서 느꼈던 고요함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듯 연구실 안은 오르커스가 생각했던 대로 그 누구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주머니에 넣어둔 신호기를 손에 쥐고는 문 너머로 발을 들였다.
처음에는 손을 움직이지 않고 눈 만으로 주변을 살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없을 지 몰라도 만졌을 때 반응이 있을 지도 모르니.
마력이 느껴지는 것 마다 디스펠을 한 후에야 오르커스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간단하게 살펴만 볼 생각이었기에 가장 보기 쉬운 서랍부터 열어보았다.
"뭐지."
열쇠가 필요한 서랍이었지만 책상 위에 바로 그 서랍의 열쇠로 생각되는 것이 놓여져 있다. 이에 오르커스는 살짝 벙찐 얼굴로 열쇠를 바라보다 서랍을 열었다. 혹시라도 맞지 않은 열쇠일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열쇠는 부드럽게 잘 드러가기만 했다.
"주인이 바보인건가. 이런 보안 방식이면 안에 들어있는 것도 별로 중요한 건 아니겠...!!"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서랍을 열던 오르커스의 표정이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보자마자 180도로 변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서류 더미였지만 신성을 짙게 이어받은 오르커스에게는 그것이 공기와 닿는 것 만으로도 곧바로 반응이 왔다.
"와...이게 여기서 나오네."
외신의 신성이 묻어있는 종이.
겉에 적혀 있는 내용만 해도 일반적인 마법과 궤를 달리하는 사특한 금술의 내용이 적혀있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터무니 없는 증거에 오르커스는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해야할지 햇갈릴 지경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증거이기는 했지만 이리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차라리 누군가 이 연구실의 주인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한다는게 더 개연성이 있을 것이랴.
"일단 챙겨는 두자..."
자세한 상황 파악은 이후에 해도 좋다. 뭐가 되었든 간에 아카데미 내에 놈들이 있다는 중요한 증거이기는 했으니 오르커스는 서류 더미를 서랍에서 꺼내 손에 쥐었다.
아주 미약하지만 손에 쥔 서류 더미에서 라벤더 향기가 나는 듯 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아주 미약한 잔향일 뿐 종이가 뿜어내는 외신의 신성에 의해 그런 냄새의 존재는 금세 오르커스의 머리에서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