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수준 차이 (4)
연무장을 가득 채운 쇳소리가 사그라드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팀을 나누어 대련을 한 만큼, 이들에게 그 팀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조직력이 있었다면 몰라도 얼굴을 마주한 첫날 부터 그러한 조직력이 생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한 것에 가까웠기에 소수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빠르게 손에서 검을 놓게 되었다.
치열했던 난전도 이제는 서서히 그 끝을 달리고 있다.
검을 놓은 아이들은 아직 검을 놓지 않은 아이들을 바라본다.
졌다고 하여 마냥 좌절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꺾은 상대를 끝까지 지켜보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의 행동은 그런 승부욕과 자아성찰에 기인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대련의 막바지에 접어들 수록 아이들은 모두 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었다.
콰가가각-
"데미안, 한 눈 팔지 마라."
"지금 어디를 보는 거에요!"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한풀 꺾이는 와중에도 아이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여전히 뇌성과 같은 굉음이 울려퍼지고 있다.
어떻게 쇳덩이를 부딪치는 것 만으로도 저런 소리가 날까 의문이 들 정도로 땅과 공기를 잘라내는 검격이 난무하는 저 공간은 지금까지 아이들이 검을 휘두르고 있던 곳과 별개의 차원이었다.
여태껏 저마다 가지고 있던 상식이 무너지는 광경에 아이들은 넋을 잃고 이를 지켜보았다.
이는 학생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었는데 이 대련의 주최자였던 렉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중간에 끼어들 틈을 놓친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어느새 불에 달군 쇳덩이와 같아진 세 사람은 아무리 그라 할지라도 감히 끼어들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정도로 이 셋의 공방은 치열했으니.
'그래도 말려야 겠지.'
렉스는 한숨을 쉬며 여태 비어 있던 손에 검을 쥐었다.
과연 저 아이들이 말로 한다고 해서 그대로 따를까. 그건 또 모르는 일이었지만 렉스는 만일의 상황을 생각했다. 정신을 한 곳에 깊게 집중하고 있는 만큼 그의 목소리가 닿을 가능성은 매우 적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렉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목에 내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아, 끝났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한 학생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검을 놓은 상황에서 소수의 놓지 않은 아이들 중 한명인 헤일리 하트먼은 무슨 근거에서 인지 저 셋의 대련이 끝이 났음을 이야기했다.
렉스는 순간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과 동시에 가라 앉는 셋의 분위기에 헤일리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무엇이 원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데미안을 시작으로 아이들은 검을 멈춰세웠다.
체력이 전부 소모되었다고 보기에는 아직 셋 다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 셋을 멈춰세우는 것이 렉스의 목적이기는 했으나 이렇게 갑자기 대련을 그만두니 그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모두 검을 놓아라."
갑자기 중단된 대련에 무엇이 문제였던걸까와 같은 생각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고 렉스는 서둘러 대련이 끝났음을 아이들에게 알렸다. 아직 손에 검을 들고 있는 아이들이 꽤 있었지만 더 이상의 대련은 무의미 했다.
렉스가 중단 선언을 하지 않더라도 데미안과 아이들이 검을 멈춘것 부터가 이번 대련의 끝을 의미했다. 이미 이번 수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노엘, 라인하르트, 데미안 이 세사람으로 정해졌으니 여기서 렉스가 해야 할 일은 이쯤에서 적당히 수업을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그가 처음 생각했던대로 학생들의 실력을 확인하자는 목적은 이루어졌으니까.
"통성명도 없이 갑작스럽게 팀을 나누었음에도 다들 잘 해주었다. 다만 아쉬운 점도 몇가지 보였다만...지금은 이야기 하지 않겠다. 일찍히 떨어져 나간 이들은 자신의 무엇이 문제였는지 한번 생각해보도록. 그리고 이전 수업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있는 이들은 앞으로 이 수업을 같이 들을 급우들이다. 서로 통성명을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이다."
렉스는 아이들을 한데 모아 그리 말하고는 그대로 연무장을 빠져 나갔다.
연무장을 떠나는 렉스의 얼굴이 복잡해 보이기는 했으나 이를 눈치채는 학생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것이 학생들에게 있어 수업이 일찍 끝난 것 말고 중요한 일이 뭐가 있겠냔 말인가.
***
노엘과 라인하르트와 대련을 하던 도중 갑자기 엘레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유는 없다.
그녀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엘레나가 이곳에 오는 기척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그때의 나는 정말 노엘과 라인하르트를 상대하는 데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던건 그야말로 우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흡!"
"자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마라. 여기에 집중해라."
물론 이렇게 한눈을 파는 것을 노엘과 라인하르트가 좋아할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각기 따로 놀던 두 사람이었지만 내가 자꾸 공격을 흘려 서로에게 보내주니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합을 맞춰 덤벼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둘의 연계가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었기에 내가 둘의 공격을 서로에게 돌려주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사실상 1 대 2 인 상황.
그런 상황에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자칫하다가는 그간 유지되고 있던 균형이 무너질 수 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뭐, 다들 전력을 내고 있다는 가정하에서였지만.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대련이어서 그런지 다들 어느 정도 여유를 두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니면 둘이서 내게 덤비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뭐가 되었든 간에 노엘도 라인하르트도 각자 숨겨둔 패는 여럿 가지고 있는 듯 보였고 다들 진심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진심이거나 아니거나 겉으로 드러나는 역량에서는 내가 우위에 있었으니 잠깐 다른 곳으로 눈 좀 돌린다고 대련의 균형이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노엘과 라인하르트에게 여유가 있듯 나도 그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어? 이 느낌은..."
나 다음으로 엘레나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은 노엘이었다.
엘레나는 나와 눈을 마주한 이후 자신의 기척을 숨기는 것을 그만 두었는데, 이에 대한 영향인지 노엘과 라인하르트도 그녀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것이 우리가 대련을 멈춘 이유였다.
단순히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엘레나의 등장은 잠시 주위의 상황을 둘러보게 만들어주는 계기 정도가 적당하리랴.
주위를 한번 둘러보니 여태껏 신명나게 칼춤을 추고 있던 것은 우리 셋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잠시 교수님의 분위기를 읽어낸 후 우리는 지금이 검을 놓아야 할 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렉스 모피어가 통성명을 하고 끝내겠다는 말과 함께 연무장을 나가자 남겨진 학생들의 시선은 절로 우리에게 향해졌다. 신기하게도 이전 수업 때와는 다르게 약간 벽이 허물어진 느낌이었는데 아마 우리가 하하호호 웃으면서 대련을 한 것이 좋은 쪽으로 작용을 한 모양이었다.
웃으면서 했다고 하기에는 보는 사람 입장에서 살벌한 것은 마찬가지 였을 테지만 이 또한 실력에 대한 증명이었으고 대련을 하고 있는 우리의 분위기 또한 나쁘지 않았으니 플러스 요인이 된 듯 하다.
항시 굳은 얼굴의 라인하르트야 그렇다 쳐도 노엘의 경우에는 신분에서 벽을 느끼지 않는 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성격이었으니까. 약간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이들이 이 둘을 어려워 하지 않을 날들이 멀지 않아 보였다.
이는 나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였다만 일단 지금은 그보다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의 시선이 더 몰리기 전에 자리를 빠져나갔다. 조금 벽이 낮아졌다 해도 아직 말을 걸기에는 껄끄러울 것이다. 아직 내게 먼저 말을 거는 아이는 없었다.
헤일리와 노엘, 라인하르트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기에 굳이 나를 따라오지는 않았다. 잠시 뒤에 보자는 말과 함께 나는 연무장 밖으로 걸어나갔다.
"대단하더군."
객석으로 올라가려는 도중 분명 아무도 없었던 어둠 속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에 있는 목소리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검성의 진한 군청빛 안광과 눈을 마주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에 나는 잠시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말했다.
"지켜보시고 계셨습니까?"
"우연히 말이다. 익숙한 기운에 발이 끌리더구나."
검성은 그리 말한 후 잠시 자신의 턱을 쓸더니 육안으로 판단하기 힘들 정도로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간만에 보기 좋은 대련이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우호적인 검성의 태도에 나는 약간의 떨떠름함을 느꼈다.
대련을 지켜봤다면 알 수 있다시피 라인하르트와의 접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나였으니 말이다.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 검성이 내비치고 있는 호의를 마냥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웠다.
역시 초면에 인사를 드렸기 때문인가.
입학식날 눈이 마주쳤을 때 잠깐 인사를 드렸던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아버지와 나를 달리 보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단 둘이서만 겨루게 되면 누가 이길 것 같으냐?"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검성이 대뜸 이런 말을 꺼내었다. 갑작스럽기는 했으나 나는 여기에 대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답했다.
"제가 이기겠지요."
"그래. 그러겠지. 솔직해서 좋구나. 그럼 한 3년 뒤는 어떠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 대답에 검성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전과 같은 희미한 미소가 아닌 누가 보기에도 웃는 얼굴이었다.
"애늙은이가 따로 없구나. 뭐, 지금은 그거면 됐다."
그리고 검성은 내게 묻고 싶은게 없냐고 묻더니 내가 없다고 답하자 처음 내 앞에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그와 내가 나눈 대화에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나는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쨌건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객석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