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수준 차이 (3)
수업 첫날 부터 연무장에서 이런 살벌한 대련이 벌어지고 있는 기사 학부와는 달리 마법 학부의 교육동은 잔잔하며 조용했다.
'기사'와 같은 군인을 양성하기 위함이 아닌 마법이라는 학문의 연구를 목적으로 두었다는 점이 이러한 분위기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원인이었다.
마법의 본질은 전투가 아니었으니,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자신들의 지성을 한 단계 더 높이 쌓아올리는 것이지 무인과 같이 강대한 무력을 얻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물론 무력을 목표로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무력 또한 자신의 지성을 더 밝게 밝히는 과정에서 얻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마법에 있어 힘이란 결국 그들의 지식을 응용하는 또 하나의 형태였으니 말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 마법 학부의 교육과정에 든 학과들 중 전투와 관련된 학과는 따로 존재하지가 않는다.
마법사로서의 전투는 자신이 가진 지식의 응용이었으니 마법에 여러 계열이 존재하고 있는 만큼 그에 해당하는 학과에서 따로 이에 대한 사용법을 배우는 정도이다.
물론 마법의 계열에 따라 전투에 특화된 계열 또한 있었기에 각 학과마다 전투에 대한 것을 배우는 비중에 약간의 차이는 있다만 어디까지나 계열에 의한 차이였지 이를 전투 마법학이라고 따로 나눌 정도는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는 각 계열마다 가지는 전투 방식이 상이했으니 말이다.
때문에 마법 학부의 어떤 학과 수업이던 간에 기사 학부와 같이 첫날 부터 학생들이 직접적으로 몸을 부딪치게 만드는 수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간단한 자기소개는 끝냈으니 그러면 이제 부터 약간의 시험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이건 여러분들이 이 공간학이라는 학문에 어느 정도의 소양이 있는 지 알기 위한 저의 개인적인 테스트이니 성적에는 전혀 영향이 없을 거라고 장담해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몸을 직접 부딪치는 경우'는 말이다.
1학년의 공간학 담당 교수. 멜리나 콥스의 목소리는 나른나른 했지만 그 내용 때문인지 학생들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전 시간에 들었던 주문학의 경우에는 주문학이라는 학문이 어떤 학문인지 그 의미와 역사에 대해서 잠깐 설명하는 시간은 있었더라도 이처럼 첫날 부터 갑자기 시험을 치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멜리나가 성적에 반영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시험을 좋아하는 학생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는가.
어찌되었건 시험은 시험이다.
성적에 반영은 되지 않는다고는 하다만 이에 대한 결과는 교수의 눈에 들어가게 되고 이는 앞으로의 수업에서 자신들이 받는 대우에 영향을 끼칠 것임이 분명했다. 마냥 넋 놓은 채로 아무 생각 없이 치를 시험이 아니란 소리다.
기사 학부와 같이 전통으로 내려오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멜리나의 성격 때문에 갑작스럽게 치뤄지게 된 시험이었지만 학생들은 모두 군말 없이 펜을 들었다. 이것이 검이 아닌 펜으로 하는 이들만의 조용한 대련의 시작이었다.
멜리나가 손가락을 딱- 하고 치자 학생들의 앞에 시험지가 한 장씩 놓여졌다.
공간계열의 마법을 이용한 간단한 기예였지만 이런 퍼포먼스는 잔뜩 긴장한 학생들에게 있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일종의 연출의 효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정답의 유무 상관 없이 앞에 놓여진 문제들을 전부 풀어낸 사람은 강의실을 나가도 좋습니다. 그래도 너무 성의 없게 하지는 말아주세요."
나름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내려고 입꼬리 까지 올리며 말하는 멜리나였지만 그런 멜리나의 얼굴 따위 시험지를 앞에 둔 학생들의 눈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이에 살짝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시작을 선언하는 로버트. 동시에 학생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학생들이 문제를 푸는 동안 멜리나는 문제를 푸는 학생들을 관찰했다.
부정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감시의 목적도 있었지만 자신이 엄선해서 만든 문제를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도 있었다.
특히 올해 신입생들의 경우 유난히 천재라고 불리우는 이들이 많아 황금기수라 불리우는 세대인 만큼 간단한 테스트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출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너무 어려운 문제만 넣는 것이 아닌 전체적으로 공간학에 대하여 기본적인 지식만 알고 있다면 풀 수 있을 정도의 문제들도 넣는 등, 적절하게 난이도 배분을 했지만 정말 풀지 말라고 작정하고 넣은 문제 또한 있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 중 간혹 자신의 재능을 맹신하여 교수 마저 업신여기는 이들도 있었으니 이는 이러한 문제를 방지 하기 위한 기선제압이었다. 그리고 멜리나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인듯 하였다.
"음...분명 이거 였던 것 같은데..."
매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리처드.
아주 작은 소리였기에 남들은 리처드가 무어라 중얼거리는지 듣지 못하였지만 그의 고민이 깃든 얼굴은 숨길 수 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 리처드의 모습을 보고 멜리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야 말로 공간학 교수인 멜리나가 가장 경계하고 있던 아이들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대륙 각지에 세워진 일곱 마탑은 각 마법의 계통의 총본산이다.
그 중 리처드의 본가인 에르투웬 가문은 공간학파의 본산. 황혼의 탑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때 황혼의 탑에서 수학했던 이로서 멜리나는 리처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탑에 있었을 당시 리처드의 나이는 어렸지만 그 재능만큼은 독보적이라고 탑 내에서 소문이 자자했었으니. 실제로 멜리나는 리처드 에르투웬이 얼마나 재능이 있는 마법사인지 직접 두눈으로 확인하기도 하였었고 말이다.
항상 마탑 서고에서 자리잡고 앉아 그곳에서 수학하고 있던 마탑의 연구생들을 질문으로 곤란하게 만들었던 꼬마 아이를 멜리나는 쉽게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마법은 각 계열마다의 역사가 아주 깊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이들은 한 계열만을 선택해 그 우물을 판다. 모든 것을 잘 하기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천재라는 이들에게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런 그들도 결국에는 한 길만을 걷게 된다.
그렇기에 멜리나는 리처드가 지금 자신이 낸 문제를 어려워 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공간학에 있어 천재라고 불리우는 리처드 에르투웬이 애를 먹는 다는 것은 다른 아이들이야 말 할 것도 없을 정도의 난이도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녀의 생각대로 대부분의 아이들은 초반에 깔아둔 함정 문제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 같았다.
'후후..다들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겠죠? 그야 당연하죠. 도전도 하지 않고 포기해 버리는 학생은 저도 싫으니까 말이에요.'
성적에 영향이 없는 시험.
그것도 문제만 다 풀게해주면 강의실을 나갈 수 있게 해준다고는 하였지만 아이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맞닥뜨렸음에도 쉽게 던지지 못하는 이유는 멜리나가 이 행동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험을 시작하기 전 직접 그녀의 입으로 이야기도 했었고, 앞으로 몇년간 얼굴을 볼 사이일 것을 생각하면 가능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할테니. 성적만 신경써야 할 것이 아니었다.
"다 풀었습니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다.
시험이 시작된지 5분 남짓 되었을 때 엘레나 에델바이스. 이 말과 함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를 전부 풀었다는 소리에 시험 중이었음에도 아이들의 시선이 절로 엘레나에게로 쏠렸다. 멜리나의 주의 때문에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만 그녀의 특출난 외모는 잠깐의 시간이어도 긴장되었던 분위기를 흐리기에는 충분했다.
멜리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엘레나에게 물었다.
"정말...그걸 다 풀었다는 이야기인가요? 지금?"
"네."
"알겠습니다. 이리 주세요."
평탄한 목소리로 멜리나의 말에 답하는 엘레나. 대충 문제를 넘겨 풀어서 제출하는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 멜리나는 엘레나에게서 시험지를 받자 마자 그녀가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바로 답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저,..전부 정답이야...'
엘레나가 멜리나에게 넘긴 시험지는 단순히 답만 적혀 있는 시험지가 아니었다. 그에 대한 풀이과정까지 아주 상세하게 적혀있다. 그녀가 시험지를 제출하는데 5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이 이러한 풀이과정을 적기 위해서 였음이라는건 시험지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멜리나의 얼굴이 무너지는 것은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까까지만 해도 리처드가 고전하는 것으로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는데 단 5분 만에 만점자가 나왔으니 그럴만도 하다.
엘레나는 그녀에게 시험지를 내고 아무 말 없이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딱히 붙잡을 껀덕지도 없었기에 멜리나는 엘레나가 강의실을 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리처드가 멜리나에게 시험지를 제출하는 것은 그로부터 15분 뒤의 일이었다.
***
엘레나는 강의실 밖으로 나가자 마자 곧바로 검술학과의 대련이 벌어지고 있는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에스텔리아에서 몇년을 넘게 지낸 기억이 있는 그녀에게 있어 길을 찾는 것은 설령 타 학부의 건물일지라도 문제가 되지 못했다.
학과 일정이야 전날에 헤일리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멜리나가 문제를 다 풀으면 나가도 좋다고 말하자 그녀의 머리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기사 학부에 있는 연무장들은 기본적으로 외부의 인사가 관람이 가능하도록 객석이 존재했으니 시험만 일찍 해치우고 난다면야 남은 시간 동안은 데미안을 보러 갈 수 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엘레나의 손은 매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멜리나 콥스가 내는 테스트를 이번에 처음 경험하는 것도 아니었고 무려 세번째로 보는 것이 었으니 문제의 정답 쯤이야 시험지를 보기 전부터 그녀의 머리 속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아무리 어렵게 문제를 내봤자 제 6계위. 게부라 (Gebura)의 수준이었기에 엘레나에게 있어 이런 문제들은 사칙연산을 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강의를 들으러 갔기에 건물 밖은 사람이 없어 한산했다. 주위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엘레나는 바로 공간마법을 이용하여 연무장의 객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소가 바뀌자 마자 고요하던 마법학부의 교육동과는 다르게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들에 엘레나는 자신이 올바르게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데미안."
오늘 눈을 떠서 처음으로 보는 데미안의 모습이었다.
순간 그를 향해 이름을 불러볼까 하는 충동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지금 이곳이 수업 중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그녀의 이성을 붙잡아 주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엘레나는 천천히 그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데미안과 노엘, 라인하르트가 다같이 대련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때의 순간과 지금을 겹쳐보기 때문인 것일까. 상당히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과거는 곧바로 지워지고 현재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온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데미안과 시선이 맞닿아 있었다.
데미안은 계속해서 노엘과 라인하르트와 검을 맞대고 있었기에 대체 언제 자신을 발견한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점이 기분이 좋았던 걸까.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