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입학 (4)
'생각했던 것 보다 일찍 친해졌네.'
최소한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 만나게 될 줄 알았던 두 사람이 입학식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이 또한 변화에 의한 변화인 것 일까. 설마 그 라인하르트를 입학 첫날 부터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생각도 못한 곳에서 라인하르트의 얼굴을 봐버린 탓일까. 자연스럽게 데미안과 같이 있는 라인하르트의 모습은 과거의 기억을 절로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기억 자체는 추억이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편에 속했지만 지금의 엘레나에게 있어 이는 좋지 않은 징조였다.
라인하르트와의 인연은 첫번째나 두번째나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엘레나가 친구라 부를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명이기도 하였고 말이다. 다만 이전 삶에서의 그의 행동을 떠올리자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별 달리 특별한 기억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라인하르트와 데미안의 대화에 관한 것이었다.
'데미안, 아침 훈련 시간이다.'
'데미안, 고기는 닭으로 먹는게 좋다. 그래야 근육이 붙는다.'
'데미안, 점심 훈련 시간이다. 밥을 먹었으니 소화를 해야지. 산책? 그것 보다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아, 마침 엘레나 양도 함께 계시니 간단한 준비 운동 정도는 같이 하는 것이 좋겠군. 마법사라고 체력 단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데미안, 이것 봐라. 반짝이는 뇌운검(雷雲劍)이다.'
.
.
.
음....
대화 내용 자체는 평범하지만 둘이 하루에 이야기를 나누는 빈도는 상당히 높다. 라인하르트가 친구가 적었던 탓인지 아니면 데미안과 죽이 잘 맞았던 것인지, 둘은 평소 잘 어울리고 다녔다.
대체적으로 라인하르트쪽에서 먼저 데미안을 부르기는 했으나 데미안 또한 이를 꺼려하지는 않았고 엘레나가 보기에는 자칭 절친이라고 말하던 오르커스 보다는 그가 더 데미안의 절친에 가까워 보였다.
'아니지. 그건 아니야. 왜냐면 내가 라인하르트보다 더 그와 오랜 시간을 보냈고, 비밀도 더 많이 알고 있는 걸.'
어쨌든
갑자기 엘레나가 이런 기억을 떠올린 이유는 이런 라인하르트의 행동 때문에 여러번 데미안과의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라인하르트가 데미안에게 하였던 말들을 거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가 라인하르트 만만치 않게 많은 시간을 데미안과 함께 보내었다는 증거였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 이는 전혀 고려 상황이 되지 않는다.
어쨌건 이번에도 전과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엘레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 과하게 행동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순간적인 위기감이랄까. 어찌보면 질투라고 할 수도 있겠다만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된 일종의 독점욕이 그녀를 지금과 같이 움직이게 한 원인이었다.
엘레나는 데미안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지만 이를 놓을 생각은 없었다. 과욕은 좋지 않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이런데에 드는 욕심이라면 조금 과해도 괜찮지 않을까 속으로 되내인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 든다는데 이를 신경 쓰는 것은 당연 한게 아닌가.
어디까지나 이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엘레나는 이러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감정적인 그녀에게 있어 이런 욕심은 함부로 덜어낼 수 없는 것이었고 그 주제가 데미안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큭."
그런 그녀의 귀에 데미안의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 때문에 그가 웃는 것일까. 설마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남자에게 질투한다고 생각한걸까? 엘레나는 고개를 돌려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엘레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데미안은 그녀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웃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에 잠겨 닫혀있던 그녀의 귀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아, 라인하르트! 검성께서 이곳에 오실 거라는 거 미리 알고 계셨어요? 설마 알면서 미리 말을 안해주셨던거에요?!! 섭섭해요!!"
"맞네. 섭섭하구만."
"아, 아닙니다. 저도 그건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음. 뭔지는 모르겠지만 섭섭하네요!"
"아니, 왜 헤일리 양 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의 모습은 매우 즐거워 보였다.
노엘과 오르커스는 어느새 라인하르트를 놀리는데 도가 텄고, 헤일리야 원래 붙임성이 있는 편이었으니 라인하르트를 전혀 어려워 하지 않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작은 모닥불이 켜진 것 같은 느낌이다.
그 불의 온기가 엘레나의 가슴을 천천히 데우고 있을 때 쯤 데미안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좀 불쌍해지려는데 그만 도와줄까요?"
"아니요. 조금만 더 이러고 있는게 좋을 것 같아요. 보기 좋잖아요?"
데미안은 웃으며 '그건 그렇네요.' 라고 답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엘레나는 데미안의 팔을 잡는데 쥐었던 힘을 서서히 거두었다.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는데 팔에서 손이 떨어지기 전에 이번에는 데미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프지 않게 적당한 힘이 들어간 그의 손은 단단하고 따뜻하다.
여전히 데미안과의 시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는 못하였어도 이전과 같은 아쉬움은 더 이상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한 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슴에서 느껴지는 이 온기가 그녀는 마음에 들었다.
***
얼떨결에 급조된 이 모임은 저녁이 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처음에는 헤일리와 엘레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간단히 학구를 둘러보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인원이 여섯으로 늘어나게 되었으니 처음 생각했던 것 보다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다들 점심은 어디서 먹을까요?"
"나는 닭요리가 좋다고 생각한다."
"잠시만 기다려 보게. 내가 듣기로는 이 근방에 맛있는 집이 있다고 하더군. 이름이 '포터 씨네 오두막' 이라고 하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아! 저기 디저트 가게가 있어요!! 저기로 가도록 하죠!"
"노엘 디저트는 점심이 될 수가 없..."
"저는 찬성이에요."
"..지만 가끔은 간단하게 먹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럼 '엘라의 과자 공장'으로 결정."
"'피터 씨네 오두막'은?!!!"
머리가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여러 의견이 나온다는 이야기.
그것도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 없이 갑작스럽게 결성된 이 모임의 경우 당연히 의견이 중구난방일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는 처음 생각했던 목표치의 30%도 채우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다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것이 모두가 만족해 하는 분위기다.
하기야 30%라고 해봤자 내가 그리 생각한 것이지 이 녀석들은 그것을 알리가 없을 테니. 계획대로 일정을 모두 끝낸다고 해서 이렇게 즐거워 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이 정도면 충분히 즐겁게 논 셈이다.
처음에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게 어색해하던 라인하르트도 아이들이 계속해서 다가가니 헤어질때 쯤에 가서는 조금이지만 이런 분위기에 적응을 한 것 같아 보였다.
하기야 여기에는 그 소심했던 엘레나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노엘과 헤일리가 있었으니.
약간 경우가 다르기는 하다만 이 둘의 친화력은 라인하르트의 벽을 어렵지 않게 무시하고 넘어갔다.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다가가는 사람이 없을 뿐이지 다가가기만 한다면 어렵지 않게 마음을 내주는 녀석이었기에 이 딱딱한 녀석을 우리의 분위기에 녹여 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노엘과 오르커스의 경우 둘의 황족이라는 신분이 약간의 걸림돌이 되었는데, 이는 정말 시간만이 해결해 줄 문제다. 아직 만난지 하루도 되지 않았으니 여기까지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이렇게 시끌벅적한 것도 괜찮죠?"
나는 손을 맞잡고 있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모두가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는 와중에 우리는 조금만 더 밖을 돌아다니기로 하였다. 학구 내에서는 시간에 따른 통행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다음날 수업을 듣는데에만 지장이 가지 않으면 되었기에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남학생 기숙사와 여학생 기숙사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나와 엘레나는 이를 한번 왕복하는 것을 오늘 학구 탐방의 끝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두 기숙사간의 먼 거리 덕분에 이를 왕복하는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만 오히려 그렇기에 좋았다.
엘레나는 내 손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웠어요. 오늘 하루 전부 다. 다같이 어디를 갈까 고민을 하는 것도 좋았고 모두가 합심해서 라인하르트를 놀리는 것도 좋았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세상에는 즐거운 게 많은 것 같아요."
"앞으로는 더 많아 질 겁니다."
"그렇겠죠?"
살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본 그녀의 눈동자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담겨져 있었다.
별빛을 품어 반짝거리는 엘레나를 보고 있으니 왠지 저 별빛을 내가 그녀에게 건내 준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해진다.
내가 무얼 한게 있다고...속으로 그렇게 물어 보아도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은 별로 가득했고 지상에도 별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손에 별을 쥐고 길을 걷고 있다.
그렇게 별빛 속에서 걷는 산책을 끝으로 우리는 아카데미에서의 첫날을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