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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103화 (103/131)

< 103화 > 입학 (2)

라인하르트와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를 여기로 부른 건 이 녀석이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사람을 불러 놓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내가 말을 먼저 건낼 수 도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러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평범한 학생들 처럼 언제 입학식이 시작되는지 기다렸다.

생각해보면 정말 의미가 깊은 순간인데 말이지.

내 옆에 앉아있는 푸른 머리의 소년은 보이는 바와 같이 평범한 소년이 아니었기에, 후에 엘레나가 대륙 제일의 마법사라고 불리울 때 쯤이면 이 녀석은 대륙제일검이라 불리게 되는 녀석이었다.

대륙제일검 라인하르트 크로멜.

지금은 아직 검성도 정정하고 아버지도 있었기에 아직은 아니다만 시간이 흐르면 그 칭호를 가지게 될 녀석. 그게 바로 내 옆에 앉은 녀석이었다. 뭐, 대륙제일검이고 나발이고 나한테는 남주 후보 중 한명으로서 가지는 의미가 더 컸다.

리처드와 오르커스는 이미 만나보았고, 원작에서 남주 후보라고 불리우는 세명 중 마지막 인물을 드디어 만나게 된거다. 그러니 지금 이 만남에 의미가 없을리가. 엘레나의 약혼자로서, 전생 독자로서 그리고 데미안 크라우스로서 아주 뜻 깊은 만남일테다.

'조용하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라인하르트를 보고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꼭 누군가에게 입을 열지 말라고 명령을 받은 녀석 같다. 아니면 아무런 생각도 없거나.

짙은 남청색 눈동자는 저 깊은 심해와 같아서 들여다 보아도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가 없었다.

이전에는 앞서 둘을 만났을 때 처럼 심란하거나 기분이 요상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막상 만나게 되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냥 이 녀석이 그 놈이구나. 라는 감상만이 있을 뿐이다.

엘레나와 같이 지내게 된 시간이 길어졌기에 그녀와 나와의 관계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더 이상 그런 설정에 연연하지 않게 된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과묵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라인하르트는 책으로 읽었을 때 머릿속으로 그렸던 모습과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책에서 묘사했던 그대로의 인물상이었다.

원작에서도 이 녀석이 말한 것을 전부 모아도 1000자 이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공녀는 사랑받는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아마도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은 이 녀석이 아니었을까. 대충 분위기를 잡아주고 말은 '....'으로 때워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니 말이다.

"...."

"...."

로맨스 소설의 주연 답게 얼굴이 받쳐줘서 그런지 이 녀석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그림이 살았다. 라는 말에다 약간의 묘사만 더 해주면 글로 녀석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적어도 말 많이 하는 조연을 적었을 때 보다는 작가의 손이 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나는 글을 읽었을 때 마다 작가가 녀석을 편애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소설을 읽던 시절 다른 녀석들을 제외하고 라인하르트를 남자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걸 보면 딱히 틀린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작가가 가진 생각은 어느 정도 글에 묻어나오는 법이었으니.

"음."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라인하르트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나 자신을 신기해 했다.

보통 여기까지 사고를 이어 나갔으면 내 안의 작은 데미안이 까칠하게 굴 만도 한데 오늘 따라 녀석이 얌전하다. 신기하네. 리처드 때는 바로 목을 베려고 했으면서. 시험 삼아 이렇게 옛날 생각도 해보았지만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내가 변한건지 아니면 내 안의 녀석이 변한것인지 확실하지는 않다만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은 확실했다. 뭐, 이걸 녀석과의 대화로 확인하려고 했던 시점에서 아직 갈길이 먼 것 같았지만. 어찌되었든 변한 건 사실이었기에.

생각을 정리하고 난 후 잠시 동안만 침묵을 더 유지하고 있다가...나는 녀석에게 대뜸 손을 건내었다.

갑자기 손을 들이댈 줄은 몰랐는지 라인하르트는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아무런 표정도 없던 녀석에게서 감정이 드러나니 볼 만하다. 녀석은 잠시 동안 내가 건낸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데미안 크라우스다."

자고로 악수를 나눴으면 통성명을 하는 것이 예의였기에 나는 녀석에게 내 이름을 말했다. 이미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예의는 지켜야 하는 법이었다. 라인하르트도 내가 이름을 말하자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나는 라인하르트 크로멜이다."

입을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건지 몰라도 라인하르트가 입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나는 어설프게 만들어진 로봇을 떠올렸다. 그만큼 녀석의 턱은 딱딱하게 움직였다.

나는 녀석이 이름을 말하자 말을 끊고 답했다.

"알고 있다."

"..."

너무 싸가지가 없었나?

라인하르트는 내 말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그런 변화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먼저 싸가지 없이 군건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먼저 불러놓고 몇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니 이건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라인하르트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기파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나를 불러낼 의도였던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기사 학부 생도들의 수준이 아무리 낮아도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이들인데 이런 초인들의 기감을 피해 정확히 내게 신호를 보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왜 나를 여기로 불렀지? 사람을 불렀으면 용건을 말해야지. 지금 여기서 먼저 입을 열어야 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너야 했다. 만약 용건이 없었던 것이었으면 그런 짓은 하지 말아라.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내가 다긋치 듯 말하자 라인하르트는 그제야 무언가 깨달았는지 얼굴을 풀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더니 아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미안하다. 가족 외의 사람과 달리 말을 나누어 본적이 없어 대화를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먼저 불렀으면 뭐라도 말해야 한다. 그게 예의야. 어떤 놈이 사람을 불러놓고 몇 분 동안 가만히 내비두냐."

"...그렇군. 알려줘서 고맙다."

내 말에 덤덤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라인하르트.

무슨 학습중인 골렘도 아니고 아직 사회화가 덜 된건가. 차라리 화를 냈으면 편했을 텐데 녀석이 이렇게 반응을 하니까 나도 뭐라 화를 낼 수 가 없었다. 애초에 그리 화가 많이 난 것은 또 아니었기에 나는 서로 맞잡은 손을 흔들며 라인하르트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어쨌든 통성명도 했고 서로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기에 나는 한층 풀어진 말투로 라인하르트에게 말을 건냈다.

"방금 전 말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나도 너 처럼 대화를 뭐라 시작해야할지 몰랐기에 그런거니까. 물론 지적한 것은 사실이기에 이 점은 나중에 고치는게 좋겠다."

"그런가. 유념하겠다."

내 말투가 변하니 굳어있던 녀석의 표정도 조금 풀린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과 변함 없는 무표정이었다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남자끼리 손을 맞잡고 있는 취미는 없었기에 둘이 동시에 손을 놓았다.

내가 말을 끝낸 후 우리 사이에는 여전히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내가 방금 전과 같이 말을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라인하르트는 내게 침묵의 이유를 설명했고 나는 녀석이 내게 할 말을 생각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뿐이었다.

슬슬 대강당의 빈자리가 채워지기 시작한다. 입학식의 시작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아카데미의 주요 인사들로 보이는 이들이 단상 위로 올랐다. 라인하르트가 입을 연 것도 이 때였다.

"크라우스 가문의 소가주가 이교의 추기경을 쓰러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님과 아버지께서 내게 그들의 강함과 위험성에 대해 어릴적 부터 설명을 해주셨기에 이를 쓰러뜨린 이에게 흥미가 생기더군. 내가 너를 부른건 그 때문이었다."

그가 내게 하고 싶었던 건 아주 간단한 질문이었다.

그리 많은 생각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말하는데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말수가 적은 라인하르트 치고는 말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답답하게 '...'으로 일관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니 새삼 이 녀석이 소설 속에서 왜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이 녀석은 먼저 다가가 말 문을 틔워줘야 그 때부터 입이 열리는 녀석이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사람들이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니 아무도 녀석과 대화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라인하르트가 나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말을 하는데 있어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니 사람과 말 하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았으니.

나는 라인하르트가 원하는 대로 그 때의 감상을 떠올리며 답을 해주었다.

"추기경이라...확실히 괴물 같은 사내였다. 이교 특유의 신성력이 가지는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풍기는 기파 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칠공에서 피를 흘리고 있으면서도 기도가 변하지 않는 것이 마치 살아있는 귀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신기하군."

이 녀석이 하는 말은 내게 하는 말인걸까. 아니면 내 말 속 추기경에게 하는 말인 걸까. 내가 그런 녀석에게서 살아남아서 신기해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설명을 해준 추기경의 모습이 신기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런 질문을 내뱉는 일 없이 마저 말을 이었다.

"그런데 풍기는 기세와는 다르게 그렇게 강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이미 내가 도착했을 때의 놈은 반 쯤 죽어있는 송장이었거든. 거기에다가 놈의 신경은 전부 눈 앞의 황녀 전하에게 쏠려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녀석을 벨 수 있었다. 사실 이런 걸 물어보려면 먼저 놈과 싸우고 있던 두 분께 물어보는 편이 더 정확할거다."

"아니다. 방금 말로도 충분했다."

빈말은 아닌지 이 말을 내뱉는 녀석의 얼굴은 한 없이 진지했다.

우리는 방금의 대화를 끝으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입학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식이 진행되는 도중 딴 짓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와 라인하르트는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 처럼 조용히 단상을 바라보았다.

입학식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크게 변함이 없었다. 대충 주요인사들이 누군지 소개하고 신입생 대표가 단상으로 올라와서 선서. 이후 총장의 지루한 훈화 말씀까지. 전생에서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와! 데미안!! 엘레나!!'

신입생 대표로 나온 이들은 노엘과 오르커스였는데 노엘은 단상 위에 올라 여기를 한번 쭈욱 둘러보더니 나와 엘레나를 찾아냈다. 그녀가 이런 말을 직접 입 밖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노엘의 눈을 보면 대충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게 눈에 보인다.

특이사항으로는 기사학부 학부장이 불참했다는 정도? 원래 내빈들은 얼굴만 비추는 것이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입학식은 무난하게 끝이 났다.

"아, 방금 학부장께서 도착하셨다는 군요. 바로 모셔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난 줄 알았다만...식의 끝에 가서 진행자가 학부장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냥 유야무야 넘길 수 있었던 것을 폐식을 코 앞에 두고 다시 화제로 끌어올리니 객석에 있는 이들의 반응이 영 좋지 않았다. 학부장이 누가 되었든 지각은 보기에 좋지 않으니. 객석에 있는 이들이 학생만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럼 기사학부 학부장 니콜라스 밀리엄 경. 단상 위로 올라와 주....엑?"

진행자는 단상 위로 올라오는 사람을 보더니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진행자의 그런 모습을 보고 지적하려 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도 모두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단상에 선 이는 연미복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었는데 이는 원래 학부장을 맡고 있던 니콜라스 밀리엄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알기로는 이제 막 50줄에 오른 중년이었으니까 아직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헌데 나는 오늘 그를 처음 보는 것이었음에도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라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나와 대화를 했을 때만 해도 무표정이었던 녀석이 지금은 미친듯이 눈알을 흔들고 있었다. 녀석도 그가 여기에 나올 줄은 몰랐나 보다.

노인은 자신의 등장으로 잔뜩 얼어버린 좌중을 한번 훑더니 딱 내게서 눈을 멈추었다.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할 정도였기에 다른 이들은 그가 내게서 한번 멈추었다는 사실도 모를 테지만 눈이 마주친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하였다.

혈연은 혈연이라는 걸까. 나는 무표정인 노인의 얼굴에 희미하게 만족이라는 감정이 깃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 기사학부 학부장을 맡게 된 막시밀리안 크로멜이라고 한다. 잘 부탁한다."

작게 움직이는 입에서 나오는 웅혼한 목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로멜이라는 성씨.

검성(劍聖)이 이곳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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