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입학 (1)
엘레나의 마법으로 인한 숙면은 아주 짧게 끝이 났다. 내가 방에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헤일리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나와 엘레나의 모습을 본 헤일리는 곧 있을 입학식을 앞에 두고 뭐하는 짓거리냐며 얼굴을 붉히면서 화를 냈다.
만약 그녀가 아직 시녀의 신분이었다면 꾸중을 들어도 모자랄 행동이었지만 헤일리는 더 이상 시녀가 아니었고 우리의 친구였다. 친구라면 늦잠을 자는 친구를 깨우러 방에 들어올 수 도 있지. 나는 내 등짝을 때리면서 횡설수설 말하는 헤일리를 비몽사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아직 시간은 남아있었을 텐데, 잠이 덜 깨서 그런가. 처음에는 헤일리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다가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보았을 나와 엘레나의 모습을 떠올리고 나니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이불을 덮고 두 남녀가 침대 위에 누워 있었으니...충분히 오해 할 수 있었을 모습이라는 걸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는 헤일리의 상상과는 다르게 그저 잠을 잤을 뿐이었기에 헤일리가 얼굴을 붉히며 무슨 말을 하든 그냥 웃음으로 넘겼다.
방에서 나온 우리는 입학식에 늦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에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였다. 아직 시간적으로 여유는 있었지만 모두가 빨리 나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만약 아델리아가 있었다면야 이리 허투루 아침을 때우는 것을 허락했을리 없겠지만 그녀는 전날 북부로 돌아갔기에 저택에 있는 건 사용인 몇명과 우리 셋이 전부였다. 내가 전과는 다르게 아침부터 엘레나의 방에 들어갔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저택을 나온 우리의 옷은 한 가지로 통일되어 있었다.
에스텔리아 아카데미에서는 교복 착용이 권장됨으로 교칙에 맞춰 미리 교복을 준비해 두었다. 거리에서 다른 이들이 입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렇게 내가 직접 입게 되니 학교에 간다는게 어느 정도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특히 우리들 중 가장 들 떠 있는 사람은 헤일리였는데, 허릿춤에 비워진 검대와 자신의 휘장을 몇번이나 매만지더니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경우 자칫 하다가는 보통학부로 입학할뻔 했으니 저렇게 기뻐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엘레나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그렇게 좋아?"
"물론이지! 엘레나, 기사 학부 생도는 입학하면서 검과 함께 준기사 자격을 부여받게 돼.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반 정도는 꿈을 이루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특히 생도들에게 내려지는 검은 황실에서 직접 축복을 내린 검이라고 하니까. 하아아아....벌써부터 기대된다."
헤일리는 그리 답하고는 갑자기 엘레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고마워."
보통학부로 갈뻔한 헤일리가 기사학부로 입학할 수 있었는데에는 엘레나의 덕이었으니. 엘레나는 자신의 오랜 친구가 건내는 감사 인사를 웃으며 받아냈다.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헤일리가 보았던 나와 엘레나의 모습이 이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나는 그런 둘을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이런 장면을 어제부터 여러번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제부터 엘레나와 대화를 나누기만 하면 이러니 너무 많이 봐버려서 이제는 익숙해진 셈이다.
아마 헤일리가 오늘 아침에 나와 엘레나의 모습을 보고 지금의 나와 같이 덤덤히 넘기지 못한 이유는 이를 익숙하지 않게 여겨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보여주었던 모습으로도 부족했던 걸까. 엘레나에게 하는 애정 표현을 늘려야 할 때가 된건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엘레나의 곁에 있을 헤일리였으니 이런 건 빨리 익숙해져야 좋다.
그녀가 아카데미 졸업 후 기사가 되면 자연스럽게 엘레나의 호위기사가 될 것인데, 이는 한마디로 크라우스 가문의 가신(家臣)이 된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엘레나가 크라우스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검이라도 한 자루 줘야 하나.'
아무리 축복이 되어 있다지만 생도들에게 지급 되는 보급형 검만으로도 기뻐하는 헤일리인데 드워프가 만들었다는 검을 손에 쥐어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이런게 궁금해졌다.
드워프가 만든 무기라. 꼭 음유시인들이 떠들어 대는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무기다만 용골(龍骨)로 만들어진 무구를 들고 다니는 가문에 그런것 하나 없으랴. 그 정도면 가문의 가신에게 있어 충분히 쥐어줄 수 있을 만한 혜택이다.
물론 졸업 후 거취는 헤일리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기에 모를 일이지만, 평소 그녀의 말로 보아서는 이리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크라우스의 일원이 되던지. 어느 쪽이든 우리 가문의 일원이 될 가능성이 다분한 그녀다. 나는 이것에 대한 것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지켜보기로 하였다.
서로 껴안고 있던 두 사람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헤일리가 먼저 나를 보고 엘레나가 뒤를 이은 것이었는데 헤일리의 눈을 보니 엘레나에게 말을 했을 때와 똑같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영약을 내가 준비한 것이었음을 잊지 않고 있었나 보다.
"데미안도 고마워."
드물게도 헤일리가 나에게 경어를 사용하지 않고 말을 하였다. 이제 곧 같은 학교에 들어가는 사이기 때문일까. 뭐, 이유야 아무래도 좋았다. 나도 그에 걸맞게 경어를 지우고 친구에게 말하듯 답했다.
"그래. 고마워 해줘서 고맙다."
그러자 헤일리가 웃었고 엘레나가 웃었다. 마지막으로 나도 둘을 따라 웃었고 우리는 웃으며 아카데미를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
마차가 황성에 들어갈 때에는 처음 루덴에 왔을 때와 비슷한 검문을 받아야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겉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지만 다른 어디도 아니고 황성이었으니 그럴만 하다.
구역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함인지 그다지 높지 않은 원형 성벽을 지나자 새로운 도시 하나가 나타났다. 흔히들 학구(學區)라고 불리는 곳이자 우리가 앞으로 학교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돌아다니게 될 곳이었다.
학구를 반으로 가르는 쭉 이어진 대로의 끝을 보면 궁전 같은 건물이 하나 놓여져 있다. 실제로도 궁전이 맞을 것이다. 에스텔리아 아카데미는 설립자의 침소가 원형이라고 하니 한마디로 저곳은 전대 황제가 머물던 궁전이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런지 본궁과 아주 가깝게 지어져 있었다.
우리는 아카데미의 정문에서 내렸다.
우리와 같이 마차를 타고 온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이들의 이목이 이곳을 향했는데 둘 중 하나였다. 엘레나의 미모에 홀렸거나, 아니면 우리가 방금 내린 마차에 새겨진 에델바이스 공작가의 문양을 알아봤다거나.
뭐가 되었든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닌지라 사람들의 시선은 가볍게 무시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들이 보내오는 시선은 조금 신경이 쓰였기에 나는 엘레나의 곁에 바짝 붙어 걸었다.
내가 옆에 붙으니 엘레나는 자연스럽게 내 팔에 자신의 팔을 걸었다.
"와, 이런데도 시선이 전혀 줄지를 않네. 하여튼 남자들이란."
"그거 데미안이 해도 되는 말이에요? 데미안도 남자 잖아요."
"저는 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임자 있는 사람에게 그런 노골적인 시선을 던지지는 않으니까. 한창 때의 나이라는 것은 잘 알겠다만 저렇게 시선처리가 안되어서야 앞으로 어떻게 사회생활을 할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남학생들의 노골적인 시선에 내 마음속에 있는 데미안이 꿈틀거린다. 이전처럼 과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저들이 보내오는 시선이 불쾌하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오랜만에 나도 광증을 억누르지 않았다.
광기와 이성이 적절히 섞인 살기를 눈에 담았다.
솔직히 살기라고 해도 민망할 정도다. 맹수의 성난 얼굴을 보면 절로 몸이 움추러드는 것 처럼 그냥 약간 몸이 움츠려들 정도의 위압이라 하는게 알맞겠다. 너무 빤히 엘레나를 훑어보는 녀석들을 향해 내가 시선을 돌렸을 뿐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들은 그제야 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인지 눈을 돌렸다. 하여튼 꼭 행동으로 해야지 알아 먹는 녀석들이 있다.
미친놈도 아니고 살기를 학생들이 걸어가는 대로 한복판에서 퍼트린 것은 아니었기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 나쁜 불쾌함을 불러 일으키는 녀석들은 치워버려서 그런지 전보다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입학식이 진행될 대강당에 도착하니 않는 좌석이 학부별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쉽게도 엘레나와는 여기서 갈라져야만 한다.
"데미안, 그럼 끝나고 다시 봐요."
"식이 끝나고 나면 아까전 오면서 보았던 분수대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헤일리 너도."
우리는 그렇게 약속을 잡고 각자의 자리로 찢어졌다.
학부가 나와 같은 헤일리는 식이 끝날 때 까지는 조금 거리를 두면서 다니기로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이성 끼리 너무 붙어다니면 입학식 첫날 부터 괜한 소문이 생겨버린다고 하였다.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어 나는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럼 이제 어디에 앉아야 하나."
헤일리까지 가버리고 혼자가 되어버린 나는 이 넓은 대강당에서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결정해야 했다. 학부별로 좌석이 나뉘어져 있어도 딱히 자리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앉고 싶은 곳에 앉으면 될 터였다.
"음?"
어디에 앉을까 생각을 하며 둘러보고 있을 때, 갑자기 정전기에 맞은 것 같은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정전기가 일어난 것은 아니고 기감에 번개를 닮은 마력이 걸려든 것이었다. 어디서 이런 마력이 흘러나오나 해서 고개를 돌리니 미리 자리를 잡은 한 소년에게서였다.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만 왜인지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로 다가가 소년의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자기 옆자리에 앉자 그제야 소년이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쯤 찍는다는 생각으로 앉은 것이었는데 이게 정답이었나 보다. 역시 소설에서 보았던 것 처럼 라인하르트라는 녀석은 사회성이 많이 떨어지는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