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루덴 (8)
입학식 전날 밤.
침대에 누워있던 엘레나는 눈을 감지 못하고 멀뚱멀뚱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어둠에 눈을 가리면 민감해진 귀에 들려오는 엘레나 자신의 심장 소리가 자꾸만 그녀를 잠에서 깨운다.
무엇이 그렇게 심장을 뛰게 만드는 건가 싶으면 머릿속에는 이미 그 답이 들어 있었다.
단순 횟수로만 따진다면야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은 이번이 세번째다.
같은 경험을 세번이나 하는데 두근거릴게 있나? 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첫번째와 두번째 이 두 시간이 지닌 의미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었고 이번에 보내게 될 학교 생활 역시 앞서 보내었던 시간들과는 그 의미가 달랐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변하는 것이 사람인데 하물며 그것이 한사람의 삶이 다 할 정도라면야 처음에 비해 많은 변화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엘레나는 회귀를 통해 자신이 변했음을 인지하고 있고 자신으로 인해 주변과 세계가 변했음을 알고 있다.
전제조건이 달라졌으니 앞으로 일어날 일 역시 바뀐다.
이는 예정된 이야기를 반복해서 걷는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과 같다. 회귀를 하였음에도 그녀가 앞으로 있을 학교 생활에 기대를 품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가 옆에 있으니까..."
이전의 삶과 비교했을 때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변화는 데미안과의 관계에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것으로 시작했던 이전의 삶과는 다르게 지금은 그 정반대였으니.
전과 같이 세계가 멸망하지 않을까 와 같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지금에 와서는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데미안과 어떤 나날을 보낼 것인가 였고, 그와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달콤한지는 지난 1년간의 경험으로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새로히 시작될 학교 생활이라는 무대는 가장 기대가 되는 일들 중 하나였다.
학교에 처음으로 입학하는 학생들이 학교 생활에 동경을 품는 것과 같이 엘레나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전의 삶에서의 기억이 있다지만 그것들은 남들이 추억하듯 꺼내는 어린시절의 보물상자와 같은 것이 못되었다.
그나마 기억할 가치가 있을 만한 것이라고는 친구들과, 데미안과 함께했던 추억이지만 언제나 처럼 그 끝은 그리 좋지 않았다. 달콤함은 한 순간일 뿐이고 그 이후에 남는 것은 씁쓸함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전과는 달라진 지금의 시간에 큰 기대가 걸리는게 아닐까 싶다. 괴롭고 슬펐던 기억들로 점칠되어 있던 시간이 앞으로 어찌 바뀔지는 그녀도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 불확실함 속에서 시작하는 데미안과의 시간은 틀림 없이 행복할 것임을 엘레나는 의심치 않았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다보니 머릿속은 절로 데미안에 대한 것으로 채워졌다.
입학을 코 앞에 두고도 어김 없이 검을 휘두르던 데미안의 모습이 떠오른다. 루덴에 왔을 때만 해도 엘트먼에 대한 일로 신경이 잔뜩 곤두선 것 같던데, 요근래 그는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한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 같아 보였다.
세계의 미래, 정확히는 자신의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그였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 그렇다면 그가 알고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조금은 의지해도 될텐데, 예나 지금이나 그는 언제나 자신이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한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약혼식을 올리고 난 후 데미안의 훈련강도가 강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 보여준것 만으로도 원역사에서의 성장속도를 충분히 웃돌고 있음에도 그 날 이후 데미안은 엘레나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으니, 어쩌면 스물을 넘기기 전에 그가 초월을 이루게 되는 것도 마냥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성장이 가속화 되는데의 원인이 자신이었음을 엘레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쥐어지는게 많아질수록 강해지는 사람이었으니까, 앞으로 엘레나 에델바이스에게 닥칠 일들을 제 힘으로 해결할 생각임을 오랫동안 그를 봐온 엘레나가 모를리 있나.
그가 그녀를 아무것도 모르는 엘레나 에델바이스라고 생각하기에 망정이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데미안의 행동 하나하나가 엘레나를 위한 것이었음이 뚜렷하게 보인다.
데미안이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쁘다만 그의 모습을 보면 이를 위해 너무 자기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데미안과 함께 이루어나가는 행복이지, 그 과정에서 데미안이 힘들어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는 단순한 자기만족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펼쳐 자신의 몸 안에 내재되어 있던 힘을 한웅큼 뽑아내 보았다.
밤하늘의 별빛을 연상케 하는 하얀 빛덩어리가 손에서 뿜어져 나온다. 사람이 지닌 마력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힘. 오로지 신과 그 신을 믿는 자에게만 발현된다는 신성력이 지금 그녀의 손 위에 올려져 있다.
이는 엘레나가 독실한 신자이기에 발현된 것이 아닌 그녀의 몸 안에 잠들어 있던 엘레나 본인의 힘이었다. 정확히는 원래의 주인으로 부터 찬탈하여 그녀가 자신의 몸에 심은 것이었지만 이는 아무래도 좋다.
"밝다."
원래는 밤의 어둠과 같은 짙은 검은 빛을 뿜어내던 신성력은 현 주인의 영향이라도 받은 것인지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전과 같은 불길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고 어둠속에서 고고히 빛을 내고 있는 별의 모습은 이름에 걸맞게 신성해 보인다.
언제부터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힘의 주인인 엘레나 본인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시간이 흘러 소유자의 영향을 받아 이리 된 것인지 아니면 데미안에게 건네 주기 위해 성물을 건드렸을 때 부터 였던 건지 확실치가 않다.
그나마 다행이란 점은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성질이라고 해야 하나. 만약 이전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더라면 신성력을 꺼낸 시점에서 진작에 데미안이 이를 감지하고 방으로 튀어나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엘레나는 손을 접어 별을 다시 몸 안으로 집어 넣었다.
성질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이전처럼 신성을 사용하기를 꺼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같다. 지닌 성질이 바뀌었다고 그 힘의 총량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는 이 힘에 대적했었던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순간부터 세상을 오시할 정도의 힘을 휘두르게 되는 것이었지만 그녀가 여태껏 이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꺼내었던 적은 없다.
데미안의 표현을 빌려 이야기를 하자면...개연성이 없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천재 마법사라고 하여도 어느 날 갑자기 신성력을 다룬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으니 말이다. 차라리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경지를 드러내는 편이 더 개연성이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겠다만은.
이런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자신에게 의지했을까?
엘레나는 속으로 이런 의문을 던져보았지만 이 또한 이미 그녀는 답을 알고 있었다.
당장 이전 삶에서의 첫만남 때만 하여도 엘레나는 이미 마법사로서 완성된 존재였으니까. 명확히 데미안보다 강자였고 그에게 보호를 받을 입장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행동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변함이 없다.
어느 날 그에게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을 한들 그의 행동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도 이번 삶에서 만큼은 당신이 행복했으면 해요."
데미안이 엘레나에게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오기를 바라고 있다면 이는 엘레나 또한 같은 마음이다. 엘레나에게 어떤 미래가 찾아올지 보았던 데미안 이상으로 엘레나는 그의 곁에서 암울했던 그 날의 순간들을 같이 걸었으니.
길었던 전투가 끝이나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던 그가 그녀의 품에 안겨 있을 때 엘레나는 다시 한번 회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겪은 모든 불행은 전부 자신의 미숙함이 불러온 결과였으니, 차라리 그 참상을 불러온 자신이 죽었어야지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한채 망가져 버린 세계와 함께 그가 죽어서는 아니되었다.
엘레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그 때의 마음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다.
이번 생에서야 말로 그를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다짐을 말이다.
***
"엘레나...엘레나 일어..."
깊이 가라앉아 있던 의식이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의해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한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어올려 눈을 떠보니 그가 앞에 있었다. 내가 눈을 뜨자 그는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고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엘레나? 잠은 잘 주무셨나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신은 들었지만 아직 이불 속에서 일어나기는 싫었다. 이것이 아침이 가지고 있는 마력이다. 정신을 차린다 하여도 이불의 포근함과 몸에 남아있는 노곤함이 나를 이곳에 묶어두고 있다.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된 그의 금빛 눈이 오늘 따라 더 반짝이는 것 같다. 방금까지 어둠 속에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잠에 들기전 그에 대한 생각을 했기에 그런걸까. 나는 갑자기 내 눈 앞에 나타난 빛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주고 있었기에 거리는 충분했다.
"어."
어느새 나는 그의 얼굴을 팔로 끌어안고 있었다. 마력으로 강화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게 단련된 그를 잡아당길 힘이 있을 리 없었지만 이는 그가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내게 안겨와 준 것이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잠 시간 가만히 있더니 시간이 흐르자 자세가 조금 불편해졌는지 한 팔로 내 머리를 받치고는 옆에 비어있던 공간으로 올라왔다. 비어있던 나머지 팔 하나가 내 위로 올라와 나를 끌어안는다. 부드러운 이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팔이었지만 안락하기로는 이 쪽이 더 위였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게 된 상황에서 나는 침대 위로 올라온 그에게 물었다.
"깨우러 오신 거 아니었어요?"
"생각해보니 너무 일찍 온 것 같더라구요. 저도 조금 더 자야겠습니다. 이렇게 있더라도 헤일리가 늦지 않게 깨우러 오겠지요. 깨워 드릴까요?"
"아니요. 조금 더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그의 품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마치 아기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어머니의 것과 같았다. 햇볕에 잘 말린 이불 속 보다 이곳이 더 포근하게 느껴진다. 다만 이대로 나만 잠에 들자니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 또한 그의 등을 토닥이며 잠을 불러들였다.
"『슬립(sleep)』"
"아니 마법은 반칙..."
"히히."
기본적으로 어지간한 마법에 내성이 있는 그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직접 펼친 마법을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천천히 가라앉는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후 방으로 찾아온 헤일리가 이 모습을 보고 혼을 낸 건 나중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