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루덴 (7)
엘트먼 에델바이스란 어떤 인물인가.
우선 선역인가 악연인가를 구분해보자면 그는 틀림 없이 선역이다.
공작가의 권좌를 두고 벌어지는 암투?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시기하는 친오빠?
그런건 에델바이스 가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공녀는 사랑받는다.>의 인간관계는 흑과 백 단 둘로 이루어진 바둑판과 같아 에델바이스 가문의 일원이자 엘레나의 오빠인 그는 틀림 없이 백(白). 엘레나의 편이었다.
엘레나와 엘트먼의 나이차 만큼이나 공작가의 후계자는 엘트먼으로 공고한 상황.
게다가 천성이 탐구자의 기질을 가진 엘트먼은 여동생의 재능이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한들 오히려 그녀를 자신의 분야에 끌어들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궁금증을 해결할 인간이다.
엘트먼의 전공을 보면 알 수 있다 싶이 그는 에델바이스 고유마법과 연관된 성위마법이 아닌 연금학을 전공하고 이후에는 아예 연금술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황금의 탑에서 박사과정까지 밟은 사람이다.
만약 그에게 권력욕이 개미 털 만큼이라도 있었더라면 자신이 전공했던 학과가 무엇이든 간에 지금 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아카데미가 아니라 여명의 탑에서 천문 관측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게 정상이다.
그냥 존재 자체가 엘레나와 불화가 일어날 수 없는 인물로. 무엇보다 요하임의 팔불출 기질을 어느 정도 물려받았는지 흔히들 말하는 시스터 콤플렉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엘레나를 챙겨주는 믿음직한 오라버니상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소설의 시작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엘트먼은 엘레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엘트먼의 존재의의는 그냥 엘레나의 원활한 아카데미 생활을 위한 조력자 중 한명이었을 수도 있겠다.
이건 뭐 너무 노골적인 캐릭터성이잖아.
어쨌건 안정성에 있어서 여러모로 보증이 되어 있는 인물인 셈.
그렇기 때문에 처음 오르커스가 엘트먼의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이 사람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하면서 황당해 하기는 했다만. 어차피 연관이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만나서 대화만 몇 마디 나눈다면 빠르게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 인간이 별택에 들어오지 않아 만날 시간이 없다는 것 뿐이지.
그런데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엘트먼이 별택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
오르커스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의 감정이 무색할 정도로 나와 엘트먼은 별다른 대화 없이 헤어졌다.
나와 엘트먼 사이에 대화가 없었던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원래 대화라는게 서로 입이 열리고 말을 내뱉어야지 성립이 되는 것인데 그 날 만찬장에서 엘트먼이 입을 열어 한 말은 딱 한마디 뿐이었기 때문이다.
"안녕...."
이 말 한마디를 내뱉고 난 후 엘트먼이 다시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을 어려워 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나도 그렇고 엘트먼 역시 그런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작중 엘트먼은 엘레나와 다르게 활발한 성격으로 노엘과 같이 가끔 우울해진 동생의 기분을 환기를 시켜주는 역할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처음 서로를 마주했을 때만 해도 그는 낯선 사람의 등장에 긴장을 했다기보다는 내가 어떤 녀석인지 살펴보는 것 같던데. 태연하게 그런 행동을 하는 인간이 남들과 대화하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그러고 보니 엘레나가 데미안과 파혼을 하게되었을 때 진실을 안 엘트먼이 자신이 만든 골렘 병단을 데리고 데미안을 족치러 갔던 것 같기도 하고...
이제는 나와 하등 상관 없는 이야기다만 이 저택에 설치되어 있는 방호 시스템이 일제히 나를 친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네.
내가 엘트먼의 상태를 깨닫게 되는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아델리아를 보고 곧바로 엘레나를 떠올렸듯 엘트먼은 척 보기에 요하임의 얼굴을 절로 연상시키게 하는 수준의 외모다. 다소 진중해 보이는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는 귀족들 특유의 오만함과 허영보다는 군주로서의 위엄을 내비친다.
그야말로 명가의 귀공자라는 단어를 의인화 한 것 같은 인물.
다만 엘트먼이 이러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타고난 외모에서 오는 것이었기에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기 시작하면 그 후광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부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얼핏 보기에는 정돈된 것 같아도 부스스한 뒷 머리와 축 내려 앉은 눈가. 어디 흑마법사에게 생명력이라도 착취 당했는지 생기를 잃어버린 눈동자.
어째서 엘트먼이 식사 내내 말을 하지 않았는지 굳이 이유를 듣지 않아도 이해가 되었다.
아직은 연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서 그런걸까. 원작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아주 죽을 상이다.
툭 건들이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게 도저히 말을 걸만한 상태가 아니다. 설령 내 말에 응한다 해도 맨 정신으로 답할지 부터가 문제였다. 애초에 이런 상태의 인간이 도대체 왜 저녁 식사에 참가하고 있는걸까?
엘트먼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보니 나는 저녁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에게 말 한마디 건내지 못하였다.
엘트먼은 그곳에 있던 그 누구보다 천천히 식사를 시작하더니 메인으로 나온 요리를 끝으로 그대로 침실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나 역시 격무에 시달렸던 경험을 겪은 사람으로서 차마 침실로 향하는 엘트먼을 붙잡을 수 가 없었다.
그 결과.
나는 그 날의 모습을 끝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날까지 엘트먼을 볼 수 없었다.
이, 이게 아닌데...
***
엘트먼이 아무 말 없이 별택을 나갔을 때.
처음에는 산책이라도 하러 나갔겠거니 생각하며 별 생각을 두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사람이 그런 몰골로 어딜 간다는 건가. 아무리 부족한 수면 시간을 채웠다고 한들 여전히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꼬라지다. 엘트먼이 초인이라는 것과 그가 이룩한 경지를 감안한다 해도 이는 상당히 위험한 상태였다.
기사들 만큼이나 자신들의 몸에 신경을 쓰는 인물들이 바로 마법사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들이 무(武)를 업으로 삼는 이들이 아니라고 하여도 자신의 몸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강인한 정신력의 기반이 되는 것이 바로 건강한 신체이기 때문이다. 하여 마법사들은 대부분 자신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걸 우선 순위에 둔다.
그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그렇단 이야기다.
나는 엘트먼이 연구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온 것이 이와 비슷한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법사나 기사들은 자신의 신체 상태에 대한 인지 감각이 일반인에 비해 아주 월등한 수준이었으니 제아무리 연구광 엘트먼이라고 해도 자신의 몸이 휴식을 원하고 있다는 것 쯤은 알고 있을테다. 그렇기에 몸이 원하는 대로 휴식을 위해 집에 들렸던 것이고.
아무리 그가 연구실에서 살림을 차렸다지만 그도 사람인게 직장을 집보다 더 좋아 할 수는 없다. 여동생과 가족을 사랑하는 엘트먼에게는 집이라는 장소 자체가 힐링 스팟이었던 거다.
"그래도 그렇지. 미친놈이 하룻밤 잤다고 바로 일하러 나가네..."
적어도 이틀은 있을 줄 알았더니만 얼마나 연구가 좋으면 저런 선택을 하는걸까?
정상이 아닌게 빤히 보이는데 제 딴에는 그 꼴이 정상인 모양이다.
이 정도면 그날 내가 보았던 좀비가 정녕 소설 속에서 읽었던 엘트먼과 동일인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엘레나의 이야기에 엘트먼이 개입하는 것은 2학년 중반 부터였으니 그 이전에 연구를 끝냈다고 한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갭이 너무 심하잖아.
가능한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엘트먼에 대한 걸 해결해 두려고 했건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러기에는 글러먹은 것 같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나는 엘트먼에 관련된 생각을 잠시 접어둘 수 밖에 없다.
당장 어찌 할 수 없는 것에 신경을 쓰는 것 만큼 미련한게 없으니.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최대한 알맞게 활용하는 편이 좋다.
"후우...."
한숨 아닌 한숨을 내뱉고는 이내 나는 상념을 지운채 명상을 시작했다.
바깥에 떠돌고 있는 기운을 호흡에 담아 내 몸 안으로 들이 밀어 원래 내 안에서 순환하고 있던 기운과 하나로 만든다. 본래 기원은 같으나 나의 성질을 받아 달라졌으니 이를 같게 만들어 동화 시키는 것이 명상의 주 목적이다.
이는 단순히 자신의 내력을 키우는 것이 아닌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오러의 숙련도를 높여주는데 있다.
명상을 하는 도중 딴 생각을 하지 않게 하는 이유는 이것이 도저히 머리를 딴데 두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기운이 작으면 몰라도 체내에 지니고 있는 기운이 크면 클 수록 이를 통제하기 어려워지는데 여기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동화는 커녕 외부의 기운이 내부의 기운에 짓눌려 내력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경지가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어려워 지는 것이 명상이었다. 기운의 통제가 버겁다기 보다는 스스로가 가지게된 생각과 익힌 무학의 무리, 그 외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각기 다른 방향을 제시해 이를 한데 묶는게 어렵다는게 맞는 말일 것이다.
어찌저찌 명상을 끝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항상 하던대로 검을 들었다.
무가(武家)도 아닌 에델바이스 가문의 별택에 연무장이 있겠냐만은 저택 부지 자체는 넓어 몸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하다. 루덴에 오고 나서도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원래라면 헤일리가 대련상대를 해주었지만 지금은 입학식 전 날이어서 그런지 그녀도 이것저것 준비할것도 생각할 것도 많은 모양이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이는 나 혼자였다.
원래 입학식 첫날이 조금 설레기는 해. 어떤 친구를 사귀게 될지 앞으로의 학창 시절은 어떻게 보내게 될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니까.
"학교 생활이라..."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사실에 다들 들떠 있는 모습에 문득 전생의 학창 시절이 생각났다.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담은 한 장의 사진. 다음 장으로 넘기니 시간에 쫒겨 다같이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그런가.
뭔가 슬프고, 화났던 이야기도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떠오르는 건 즐거웠던 기억들 뿐이다.
나는 검을 한 번 휘둘러 머릿속에 떠오른 사진첩을 잘라냈다.
이쯤 하면 되었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들이니. 이제는 죽어 세상까지 달라진 와중에 이를 계속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건 앞서 한 명상의 의미를 퇴색되게 만든다.
그래도 이 기억들은 사라지기 전 내게 한가지 사실을 자각 해주고 갔다.
내가 알고 있는 원작. <공녀는 사랑받는다.>에서 엘레나의 학창 시절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하나였다.
아픔을 딛고 성장하는 주인공.
초반은 악질 약혼자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친구가 없던 그녀에게 여러 새로운 인연들이 찾아와 앞으로 엘레나가 행복해질 것임을 의심치 않게 한다.
실제로 엘레나는 데미안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 졌고 또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나날을 즐긴다. 그간 있었던 괴롭힘의 보상이라도 되는 것인지 세상은 그녀에게 인연의 단 맛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행복한 기억으로 끝이 났으면 좋으려만...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것 처럼 그 가르침에는 쓴 맛 또한 있었다.
그녀의 즐거웠던 학창 시절은 친구들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노엘이 죽고 아카데미는 무너져 내린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첩과는 다르게 엘레나의 사진첩은 복구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 즐거웠던 추억을 버리고 그녀가 얻은 것이라고는 이교도들에 대한 복수심과 약간의 정신적 성장이 전부이다.
"수지타산이 안 맞아도 한참 안 맞잖아."
내가 지금 검을 들고 있는 이유. 이는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나와 내 가족들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서다.
나는 다시 한번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