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루덴 (6)
"녀석. 뭐가 급하다고 저렇게 달려가는 건지.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쩔려고."
"그만큼 친구가 만나고 싶으시다는 거겠지."
오르커스는 이미 저 멀리 사라져버린 노엘을 향해 닿지 않을 잔소리를 내뱉었다. 영락 없이 여동생의 안전을 걱정하는 오빠의 모습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따진다면야 오러와 신성력으로 강화되어 어지간한 전차 이상의 내구력을 가지게 된 노엘이 아니라 그녀와 부딪히게 될 사람을 걱정하는게 맞다만.
뭐, 어떤가. 노엘은 그런 실수를 저지를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을 뿐더러 가족으로서 혈육을 우선시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르커스의 안내에서 벗어나 엘레나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니 완전히 과학박람회나 다름 없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이제야 좀 학생들이 들리고 싶어할 먹거리 노점과 오락시설들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안내하는 사람의 취향 때문이었던 걸까.
이 거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재미없는 곳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X)자를 쳐 두었던 마음속 평가표에 다시 (O)로 고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노점에서는 지난번에 엘레나와 메로힘에서 먹었던 사탕을 만드는 기계가 보인다. 이를 보니 왜 그녀의 존재감이 이 근방에서 느껴졌는지 이해가 갔다.
나는 노점에서 메뉴에 적힌 사탕을 종류별로 사들고는 이후에도 주변에서 달아보이는 간식거리가 보이면 그때 마다 하나씩 챙겨두기 시작했다.
내가 단걸 먹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오르커스는 갑자기 달달해 보이는 간식을 사기 시작하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이해가 되었다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그거 전부 엘레나 양에게 줄려고? 아무리 그녀가 단 걸 좋아한다지만 그 정도는 다 먹지도 못 할것 같은데 좀 적당히 사지 그랬냐."
"괜찮아. 이 정도는."
내 답변에 아리송한 얼굴을 짓는 오르커스.
엘레나가 얼마나 단 걸 많이 먹는지 본 적이 없으니 저런 말이 나오지.
물론 나라고 해서 그녀에게 오늘 산 것들을 한번에 다 줄 생각은 없었다. 본인은 무슨 마법을 걸어놔서 괜찮자고는 하는데 그래도 옆에서 보는 입장에서 걱정이 되기는 매한가지니.
장모님 역시 달달한 것을 좋아한다고 하여 이를 생각해서 조금 많이 산 것 뿐이다.
"근데 넌 단것 좀 먹냐?"
"음,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평범하게 좋아하는 정도지. 왜? 하나 주려고?"
이런걸 보는 건 처음이어서 그런가. 내가 산 간식거리들을 담은 종이 봉투 안을 유심히 살펴 보고 있는 오르커스에게 나는 사탕 하나를 골라 건내었다.
그건 다름아닌 엘레나가 메로힘에서 먹었던 색이 입에 묻는 사탕.
나중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색소가 고스란히 입에 묻는 다는 단점은 있지만 확실히 사탕에 적힌 맛 또한 고스란히 담아내었다고 하여 나름 사탕계에서 인기 상품이라고 한다.
오르커스가 그런 사실을 알겠냐만은. 일단 얼굴을 보니 확실히 모르는 눈치다.
녀석이 단것을 크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만약 알고 있다 해도 이런 사소한 정보를 국정을 운영하는데 바쁜 황자님이 알고 있다는게 오히려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오르커스는 봉투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몇개 살펴보더니 결국 내가 건낸 사과 모양의 막대 사탕을 입에 넣었다. 마음에 드는게 있었다면 이야기를 하면 될텐데 엘레나에게 줄 선물이라고 말을 해서 그런지 그냥 주는 대로 받는 분위기다.
이 녀석 은근 배려심이 있단 말이지.
처음에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더니만 입에 물고 있다보니 마음에 들었는지 아까부터 옆에서 쉴새 없이 나불거리고 있던 입은 입안의 사탕을 음미하느랴 정신이 없다.
그러고 보니 노엘은 엘레나처럼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나는 노엘에게 줄 것 까지 생각해서 녀석에게 사탕을 몇개 더 쥐어주었다.
오르커스는 시계탑을 한번 바라보더니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씹어서 깨트렸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보아 안에 신맛을 내는 무언가가 들어있던 모양이다.
"으, 으웨엑! 셔어!!...안에 대체 뭘 넣은거야....그래서 엘트먼 에델바이스는 만나봤나?"
"아니, 지금이 루덴에 온지 5일째가 다 되어가는데 그림자도 못 마주쳤다. 장모님께서 그러시던데 연구에 몰두하느랴고 저번 주 부터 아예 집에 안들어 오고 있다 하시더라고. 연락은 되는데 그것도 아주 가끔하는 모양이야."
"그런가. 뭐, 같은 마법사로서 이해가 안 가는건 아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동생과 그 약혼자가 왔다는데 얼굴 한번 안 비추는 건 조금 심하군. 자네 혹시 벌써부터 미움 받고 있거나 그런거 아닌가?"
"쓸데 없는 소리를. 내가 뭘 했다고 벌써부터 미움을 받아. 집에 안들어 온지는 꽤 되었다고 하니 나 때문은 아니겠지. 일단 장모님과 엘레나의 말을 들어보면 엘트먼 그 인간. 애초에 그런 일에 연관될 깜냥이 안된다더만."
"어허. 친족의 의견은 아무런 증거도 될 수 없다는 거 모르나."
그걸 아는 녀석이 매제될 사람에게 매형을 조사하게 하네.
내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오르커스는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으로 어물쩍 넘기며 말을 이었다.
"뭐, 나도 듣는 귀가 있으니까. 마탑에 있을 적의 평판을 들어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내거나 그 외에는 마탑 서고에서 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더라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자기 분야 외에는 관심이 없는 연구광 같은데, 올해 초에 어떤 사유로 루덴을 나갔는지만 알아내면 아마 별 문제는 없을 거다."
"가지고 있는 돈도 많을 양반이 왜 하필이면 이 시국에 연구자금을 신청해 가지고 말이야. 귀찮구만."
오르커스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하듯 내게 말을 걸었지만 사실 나는 그가 생각하는 만큼 엘트먼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
엘트먼이 올해 초에 어디에 갔는지, 무슨 목적으로 연구 자금을 신청했는지 내가 이것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었지만 그가 이교도들의 행적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그거 하나 만은 확언할 수 있다. 오르커스가 말한대로 그는 단순한 연구광이었으니까. 다만 이런 화제에서 엘레나와 연관된 인물의 이름이 올라오는 것이 조금 불편할 뿐이다.
정 안되겠다 싶으면 연구실에 처들어 가든가 해야지.
***
엘레나와 합류한 이후 우리는 앞서 약속했던 대로 각자의 집으로 찢어졌다.
노엘은 엘레나와 만나지 얼마 되지 않아 더 놀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그러기에는 둘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듣자 하니 오늘의 외출도 상당히 아슬아슬하게 허락을 받고 나온 모양이다.
이번 외출이 남부에서 돌아오고 난 이후의 처음으로 황성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하니, 조금 더 밖에 있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안정되어서 그렇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이교도 관련 문제로 시끄러웠던 루덴이다. 그런 상황에서 황족이 황성이 아닌 곳에서 오랜 시간 체류한다는 것은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애초에 황족을 만나려면 나나 엘레나가 황성으로 가야지 이처럼 황족이 약속을 지키러 밖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기도 하였고.
나야 뭐, 오르커스가 오면 부르라고 하길래 부른 거지만 어찌되었든 지금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소리다.
"오라버니. 황성에 연락해서 오늘 하루는 에델바이스 별택에서 지낸다고 이야기하면 안될까요? 그, 거리도 황성과 많이 가까우니까..."
"안돼. 아무리 에델바이스 가문의 별택이 황성과 가까워도 결국 바깥이야. 연락한다 한들 아버지가 허락하실지 만무할 뿐더러 이렇게 늦은 시간에 아무런 약속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건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야. 노엘 너도 아카데미 입학 전에 외출 금지를 당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야."
노엘이 마지막으로 약간 떼를 쓰기는 했으나 오르커스가 외출 금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꺼내자 금세 꼬리를 내렸다.
아무튼 그렇게 노엘과 오르커스가 황성으로 돌아간 후.
우리는 저 둘처럼 외출에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곧 있을 저녁 시간을 생각해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엘트먼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아델리아를 이번에도 혼자 두게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나와 엘레나가 입학하고 난 이후 메로힘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니,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간을 다른 데에 허비하는 건 향후 나와 그녀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때 최대한 좋은 인상을 남겨두어야 한다.
"어머, 다들 놀러 나갔다길래 밖에서 식사를 하고 올 줄 알았더니만 모두들 일찍 돌아왔구나."
생각했던 대로 아델리아는 저녁 식사 전에 돌아온 우리를 보고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후 만창장에 앉아있는 또 한 명의 인물을 보고는 그녀의 감정이 단순히 우리가 저녁 식사에 늦지 않았다는 것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더니.
그동안 아무리 기다려도 별택에 올 기미가 보이지 않던 엘트먼 에델바이스.
그가 우리보다 앞서 만찬장에 도착한 선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