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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98화 (98/131)

< 98화 > 루덴 (5)

제국의 다른 그 어떤 영지보다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은 루덴의 거리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카데미의 입학 시즌이 가까워져서인지 아카데미가 세워진 학구가 아니었음에도 번화가에 나와있는 사람들의 과반수가 전부 내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신입생들이 입학을 한다는 것은 재학생들에게 있어 긴 방학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였으니, 아마 얼마남지 않은 방학을 만끽하고자 하는 재학생들과 이제 막 루덴에 올라와 구경을 하고 있는 신입생들이 섞여있는 것이겠지.

에스텔리아 아카데미는 황실의 이름이 붙은 만큼 황성 내부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닌것이 여기서 지칭하는 '황성'이라는 것은 일종의 구역을 뜻했다.

실질적으로 성벽이 쌓여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로지 황실과 관련된 인물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구역. 실제 루덴의 중심에는 황제가 거하는 거대한 성이 있지만 이는 황성의 일부일 뿐 그 성을 중심으로 한 반경 수십 km의 공간 전체를 황성이라 칭한다.

도시 안의 작은 도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황성은 그 크기가 상당한데, 이 중 황족들이 실질적으로 생활하는 곳들을 전부 제외하고 나면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곳이 바로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조성된 학구(學區)이다.

황성의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구역 답게 배치되어 있는 시설 또한 많았고 아카데미 생도들의 생활 대부분이 이 학구 내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면 된다.

원래는 제국 건국 초기 황실에서 각 지방의 영주들의 자제들을 아카데미로 입학시키게 만들었을 때 한 곳에 모아 감시를 하게 된 것이 기원이라고는 하는데, 그 흔적으로 아카데미 재학생은 반드시 학구 안에 위치한 장소에 거주를 해야한다는 규칙이 있다.

나와 엘레나와 같은 귀족가의 자식들이 가문에서 가지고 있는 건물이 있음에도 기숙 생활을 해야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과거와 같이 '너 왜 네 자식 학구에 안두고 따른 곳에서 지내게 하냐.'  '무슨 다른 뜻이 있는거지?' '암튼 너 역모죄. 땅땅!'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황실은 이에 대해 과거 보다 조금 유하게 행동할 뿐이지 그들이 내건 근본적인 뜻에서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학구가 수용소와 같은 구역도 아니고 자리잡은 시설의 질로만 따지자면 제국 내에서도 순위를 다툴 정도이기에 지금에 와서는 오랜 관습 중 하나로 여기는 추세기는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다른 하부 교육기관에서 재능을 인정 받아 올라오는 평민 생도들의 수도 엄청나니 지금은 각 가문에서 인재들을 스카우트 하기 위해 있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더 있다고 해야할까.

무엇보다 지금처럼 이교도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상황에서는 학부모들도 자신의 자식들이 황실의 비호 아래 보호 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루덴의 치안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황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곳 보다는 못한게 사실이니까.

그래도 죽는 것 보다는 안전한 인질 쪽이 더 낫지 않은가.

"날도 추운데 밖에 나온 사람이 참 많네. 뭐, 방학 끝물이니 당연한건가."

나는 대로 옆에 위치한 찻집 중 한 곳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곳이 학구와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학생들로 보이는 이들이 많은 이유는 연금학회를 중심으로 조성된 상가 대부분이 오락에 관련된 업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왠만한건 다 있는 곳이 학구였지만 학업을 중시하는 곳인 만큼 그에 방해되는 것들은 어느 정도 제한이 걸려있다. 즉,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놀거리가 적다는 소리이다.

그러니 제한이 풀리는 방학 기간에 이렇게 바깥으로 나와 노는 생도들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학구 밖을 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와서 노는 것에 시간을 쓰는 건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었으니 시간이 널널한 방학때야 말로 적기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방학의 끝자락.

얼마 남지 않은 휴식시간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한창 폭발할 때다.

꼭 노는 쪽이 아니더라도 이곳에는 연금학회가 있으니 연금학과 학생들은 앞서 이곳에서 수업에 사용할 물품들을 사거나 하는 등 어느쪽이건 유동인구가 많을 수 밖에 없기는 하다.

따뜻하게 데워진 커피를 한모금 머금고 입 안을 멤도는 향을 음미했다.

만약 엘레나가 있었다면 그녀가 권하는 캐러멜 비스켓 하나 정도는 입에 물었을 텐데. 아쉽게도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그녀는 지금 헤일리와 같이 창 밖에 보이는 상점가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창 밖으로 보이는 시계탑을 한번 올려다 보았다. 루덴에 온 첫날 두 사람이 마차에서 한 약속을 나 또한 옆에서 듣고 있었다.

보이는 것 처럼 나는 그 둘의 나들이에 동행하지 않았다.

둘에게 같이 가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기는 했으나 이는 내 쪽에서 거절해야했다. 이번 나들이는 어디까지나 엘레나와 헤일리의 약속이었고 내가 끼지 않아야 둘이 온전히 친구로서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내가 원작 속의 데미안처럼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착하는 건 나로서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이번에 따라갔더라면 이를 계기로 그녀에게 간섭하려드는 버릇이 생기지 않을까, 스스로의 마음이 안이해질것 같아 일부러 거절한 점도 있었다. 첫 만남 때와 비교하자면 많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여전히 내게는 엘레나를 향한 광기와 같은 무언가가 있다.

지금은 내 내면에 무언가와 합의라도 봤는지 잠잠하다만 가끔 그녀에 앞에 서면 무언가 주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었기에 여전히 방심할 수 없었다.

이참에 나 또한 친구와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지난번에 오르커스가 루덴에 오게 되면 만나자고 했었으니 나는 황성에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내었다. 지금 내가 연금학회 근처 찻집에 앉아 있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정말 우연찮게도 오르커스는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커피맛이 괜찮은 찻집이면 좋겠다고 넌지시 말을 흘리기는 했으나 설마 엘레나와 헤일리가 향한 곳 근처로 잡힐 줄은 몰랐다.

우연이다. 정말로.

***

커피를 담아둔 잔의 바닥이 보일 때 쯤 문에 걸린 종이 딸랑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두 따스한 기운이 안으로 들어온다.

음? 둘?

"으악!! 데미안 또 커피 마시고 있어요?!"

"노엘?"

머리카락 색이 조금 변하기는 했지만 틀림 없는 노엘이다.

왜 그녀가 여기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노엘의 옆에는 똑같이 머리를 염색한채 모자를 눌러 쓴 오르커스가 있다. 다른 이유는 없을거다. 그냥 내가 오르커스를 불렀으니 그에 따라 나온 것이겠지. 내가 루덴에 왔다는 것은 엘레나도 루덴에 있다는 뜻이었으니 아마도 그녀로서는 엘레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노엘은 나의 빈 옆자리를 보고서는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엘레나를 찾고 있었다.

음, 엘레나 여기 없는데...

"하하. 자네는 여전히 커피를 좋아하는군. 그래서 맛을 괜찮던가? 에델바이스 별택 근처에서 그나마 평이 괜찮은 곳으로 잡은 것인데."

"쌉쌀하면서 끝이 약간 달달한게 괜찮아. 향도 좋고. 너도 한잔 들지 그러냐."

"자네가 말하는 달달함의 기준이 나로서는 잘 모르겠으니 오늘은 넘기도록 하지.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 격무에 시달리는 바람에 커피 지옥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 노엘 너는 어때?"

"저는 밀크티로!"

환하게 웃으며 딱 잘라 거절하는 노엘의 말에 오르커스는 지나가던 점원을 붙잡아 밀크티 한잔과 레몬티 한잔을 시켰다.

뭔가 내가 달달하다고 말하니 두 사람 모두 믿지 못하는 눈치던데, 나는 이 사실을 슬프면서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저 둘이 영주성에 머무는 동안 내게 데인게 한 두번이어야지. 특히 노엘의 경우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냥대회 이후 부터 그 정도가 매우 심해진 것 같다. 내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만 보면 아주 대경실색을 하더라.

그래도 이번건 진짜 단 것 같은데 한번 마셔보기라도 하지 너무 칼같이 거절하는거 아니야.

내 맞은 편에 앉은 오르커스는 자꾸 주위를 둘러보는 노엘을 보더니 내게 말했다.

"오늘은 특이하게도 엘레나 양이 보이지 않는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엘레나는 오늘 선약이 있어서 그렇게 됐다. 그리고 약혼자라고 항상 붙어만 다니는 것은 아니야."

"그건 그렇겠지. 아무튼 그렇다는 구나. 노엘."

"네? 앗! 데미안! 저는 그..데미안만 보여서 실망한게 아니니까! 데미안도 오랜만에 만나서 엄청 반가워요!! 저는 그냥 엘레나가 안 보여서..."

오르커스의 말에 노엘은 잠시 풀이 죽은 얼굴을 하다가 조용히 커피를 홀짝이는 나를 보더니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변명을 늘어 놓았다.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엘레나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본인도 자각한 모양이다.

황성에서만 자라 친구가 없던 노엘에게 있어 엘레나가 얼마나 특별한 친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녀의 마음을 어느정도 공감할 수 있다.

나를 만난다는 소리에 당연히 엘레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게 이상한 건 아니다. 얼마나 붙어 다녔으면 노엘이 이를 당연시 여기겠는가. 나도 이를 인식하고 있기에 오늘 헤일리와 엘레나의 나들이에 따라나가지 않은 것 아니었나.

원래는 그냥 이전에 편지를 나눴을 때 하던 일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때우려 했는데 지금 이 자리에 노엘이 있으니 이야기를 꺼내기 애매해졌다. 노엘에게 딱히 비밀로 해야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지만 오르커스는 그녀가 이런 일에 얽히는 것 자체를 싫어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우리는 그동안 편지로는 하지 않았던 잡다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하기야 만나서 일 이야기만 한다면 그게 비즈니스 관계지 친구 관계겠는가.

처음 대화의 내용은 항상 편지에서 적어 넣던 이야기의 연장선이었지만 이후에는 각자 일상 속에서 겪었던 아주 사소한 일들을 꺼내어 들었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떠들어대는 것이었지만 다들 이게 즐거운지 모두가 웃고 있었다.

이러고 보니 나도 참 이 세상에서 친구 없이 지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떠들어대는 잡담이 이리 즐거우니 말이다.

전생에서는 일상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걸까.

생각해보면 친구를 만들고자 했다면야 이미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리 된 이유는 아마도 데미안이 되고 나서 운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너무 오래 자리를 차지했던 것 같군. 이만 일어나도록 할까."

"벌써요? 아! 오라버니가 지난번에 구하신 보드게임 있잖아요. 그거 해요! 그거!"

"그건 네가 하도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챙기지도 못하고 나왔어. 나도 있다면야 진작에 꺼내서 했겠지."

"아, 그러고 보니 새로 보드게임을 하나 구했다고 했지. 뭐, 그건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하도록 하자. 시간이 오늘만 나는 것도 아니고."

"좋지. 일단 밖으로 나가자고. 한곳에 오래 있다 보니 나와 노엘의 목소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오르커스의 말대로 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해 있었다.

신앙과 권력이 황실에 집중되어 있는 제국에서 이 둘은 여러모로 유명인사이니 다른 영지도 아니고 황실행사가 자주 일어나는 루덴에서라면 일반인들이라 해도 둘의 목소리를 듣고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자연스럽게 찻집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잠시 무얼할까 고민하다가 잠깐 거리를 걷다 헤어지기로 하였다.

지난 번 메로힘에서의 여명의 탑도 그렇고 마법사들의 랜드마크와 같은 곳의 주변에 열린 노점들은 하나같이 신기한 것들이 많아 눈으로 구경하는 것 만으로도 재미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저게 연금학회의 명물. '금을 만드는 가마솥'이지. 어떤 것이든 넣으면 금으로 만들어 준다던데 마력효율이 영 꽝이라 가동하는데 드는 돈이 만드는 금보다 많이 들어 가끔 행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가동하지 않아. 그 옆에 있는 건...."

나와 노엘은 마법에 대해 아무런 소양이 없으니 무언가 신비한게 보이면 오르커스가 가이드가 되어 설명하길 자처했다.

그건 그렇고 여기에 세워진게 연금학회라 그런 걸까. 아니면 가이드가 그런 곳으로 인도를 하기 때문에 그런걸까.

메로힘에서 보았던 것이 해리포터에서나 나올 법한 정석적인 판타지 노점들이라고 하면 이곳에 열린 노점들은 무슨 과학박람회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마도공학을 이용한 각종 마도구들을 진열해 두고 이를 시연하는 모습들이 어딘가 참으로 익숙하다.

뭐, 인공정령과 같은 것을 이용한 자율형 골렘이라던지 전생에서 인류가 21세기 후반에서나 와서 완성한 AI의 완성형을 이용한 기술과 비슷한 것들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판타지 세계라는게 실감이 나기는 한다만.

'엘레나와 헤일리는 재밌게 놀았으려나?'

내게는 신기하고 재밌는게 많아 보여도 이곳으로 놀러온 둘의 관심사와는 많이 떨어져 보인다.

아직 거리 전체를 둘러본 것은 아니었기에 속단하기에는 이르지만 다음에 엘레나와 같이 루덴을 둘러볼 장소 중 이곳은 후보로 넣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어?"

"어!"

우연이었을까.

엘레나에 대한 생각을 하자마자 나의 기감에 그녀가 잡혔다. 노엘 역시 이를 느꼈는지 나와 엇비슷한 속도로 반응했다.

엘레나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노엘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그녀는 곧바로 엘레나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를 말릴까 생각도 했지만 어차피 지금은 날도 저물고 있고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도 된 것 같으니 나 또한 노엘의 뒤를 뒤따랐다.

"저건 현대의 마도공학에 있어 새로운 길을 열게 만든....뭐야? 다들 어디가는 건데?"

아, 잊을 뻔 했다.

어느 순간 부턴가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흘리고 있어 순간 오르커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나는 도중에 발을 멈추고 오르커스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준 뒤 그가 놓치지 않도록 비교적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과연 초인이라고 해야 하나, 잠깐 한눈 판 사이 어느새 노엘과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벌어지고 말았다.

뭐, 어차피 목적지는 같으니 상관은 없겠지.

나는 아직 이해가 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오르커스를 챙겨 들고는 천천히 그녀들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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