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루덴 (4)
그토록 걱정이 많았던 장모님과의 첫 면담은 성공적으로 끝을 내렸다.
내가 아델리아를 보고 엘레나를 떠올렸듯 아델리아도 나를 통해 아버지를 보았는지 대화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덕분에 대화의 주제 8할 이상이 아버지의 학창 시절 기행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뭐 어떤가.
대화를 윤활하게 이어가기 위해서 아버지의 흑역사 정도는 몇번이고 들을 수 있었다.
들으면서 약간 재미있던 부분도 있고 하여 중간 부터는 내가 약간 부추긴 점도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이 안에서 일어난 일은 아버지의 귀에 들어갈 일이 없으니 괜찮다.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닌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장모님이 아버지에게 꼰지르기야 하시겠는가.
아델리아도 오랜만에 말동무를 찾아 기뻐하시는 것 같았고 헤일리와 엘레나도 즐거워 하며 들었으니 결론적으로는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다.
"그래서 말이지! 그때 아서하고 요하임이 교수님의 바지를 붙잡고는 확!!...아, 내가 너무 말이 많았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나도 참 오랜만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지 들떠 버렸나봐. 먼 길을 달려온 사람들을 쉴 시간도 없이 붙잡아 두고 말았네."
"아닙니다. 아버지의 학생 시절 이야기는 저도 들은 것이 없어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공작님과 아버지가 벗겨먹은 교수님이 아직도 아카데미에 있으시지는 않으시겠죠? 계시면 제가 곤란할 것 같아서."
"하하!!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 일로 아카데미를 나가셨거든. 그래도 만나면 큰 일이기는 하겠구나. 데미안은 아서와 완전히 똑 닮았으니까 말이야. 어쩌면 보자마자 검을 들고 달려드실지도 몰라."
아델리아의 말 대로 우리의 대화는 꽤 긴 시간동안 이루어 졌다.
그래도 지금 아델리아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썼던 경어는 어느세 부턴가 사라져 있었고 이름 또한 공자와 같은 말 없이 편히 부르고 계시는 것을 보니 나 또한 마음이 편해진다. 그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뜻이겠지만 생각보다 친화력이 좋은 모습이 내게 있어 조금 색 다르게 다가온 것도 있었다.
엘레나를 생각한다면 그리 쉽게 연결이 안되는데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엘레나가 요하임을 닮은 것이 아닐까 싶다.
요하임 공작이 아버지에게는 많이 살가워 보여도 그건 그 둘이 오랜시간 친구였기에 그런 것이지 평상시의 그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시니 말이다.
"그럼 일단 오늘은 이걸로 마무리 하도록 하자꾸나. 황도를 구경하는건 내일부터 하도록 하고 다들 오늘 하루는 저택에서 푹 쉬도록 하렴. 잠시 동안 머무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집에 익숙해지는 것도 중요한 일이란다."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아델리아는 우리에게 저녁식사 이후 저택 밖으로 나가지 말라 권했다.
오랫동안 마차에 앉아있어 굳은 몸을 주위를 둘러보는 것으로 풀려고 했지만 굳이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그녀의 말에 알았다 답했다.
다음날 부터는 나가도 된다며 외출을 허락한 것을 보니 방금전 말은 그녀가 루덴의 치안을 믿지 못해 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순수히 마차 여행으로 피곤해져 있을 우리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기야 황도에 거주하는 귀족에게 신뢰 받지 못할 만큼 루덴의 치안력이 형편 없어 보이지는 않다.
이후 우리는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각자의 방으로 찢어졌다.
식사 중에는 이전 처럼 그리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만, 대신 아델리아에게서 면담 때보다 더 많은 시선을 받은 것 같다. 정확히는 나와 엘레나를 거듭 번갈아보는 것이었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묘한 웃음소리가 귀에 흘러들어왔다.
무엇을 보고 웃으시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기분은 좋아보였기에 조금 신경이 쓰일 뿐이지 마음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엘레나는 식사가 끝나고 잠깐 남도록 하렴."
아델리아는 유일하게 엘레나 만을 붙잡아두고는 나와 헤일리는 모두 방으로 돌려보냈다.
식사 중 그녀가 웃던 이유와 연관이 있을까?
단순히 오랜만에 만난 모녀간의 대화를 나누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둘만의 대화에 방금전 미소의 의미도 들어있을 것 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뭐, 나중에 엘레나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그녀들과 있었던 공간에서 벗어나니 당장이라도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아니어도 아델리아와 마주하는 것에서 상당한 심력을 소모 했으니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 내게 깃들어 있는 것은 걱정과 불안이 아닌 마음을 평안케 하는 작은 성취감이었다.
전신을 짓누르고 있던 중압감에서 벗어나는데 있어 그 작은 성취감 하나면 충분했다.
힘이 잔뜩 빠진 발걸음으로 미리 안내받은 방으로 몸을 옮겼다.
오늘 밤은 왠지 깊게 잠에 들 것 같다.
***
아델리아와 홀로 만찬장에 남게 된 엘레나의 얼굴은 사람들이 있을 때와 없을 때와의 차이가 없었다.
보통 웃어른이 따로 불러내면 어째서 자신이 불리게 되었는지 그에 대한 약간의 생각이라도 할텐데 엘레나에게선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몇달간 떨어져 있다가 만나게 된 간만에 이루어진 상봉이었음에도 둘 사이에 있어 그리움과 같은 감정의 교류는 느낄 수 없다.
다만 이 부분에 있어 먼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이 둘이 그간 통신용 수정구를 이용해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움에 있어 어느정도 그 감정이 옅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데미안은 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어 이번에 영주성에 보내진 편지가 첫 연락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어느 정도 아델리아가 데미안이 그리 생각하도록 의도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예비사위에게 있어 어느정도 긴장감을 더해주기 위함이었다고.
그렇다고 먼저 연락을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데미안이 그렇구나 많이 바쁘시구나 하며 가만히 있을 위인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데미안은 루덴에 있는 별택에 여러번 편지를 보내었다.
아델리아가 아무리 바쁘다고 한들 연을 맺게 된 집안에서 온 편지에 답장 할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엘레나를 통해 미리 바쁘다는 이유로 편지를 확인하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를 해주고 일부러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이토록 매정하게 대한 이유는 이런 장모를 직접 대면했을 때 데미안이 어찌 반응하는지 이를 보기 위해서 였다.
조금 심한것 같기는 해도 이는 그녀 나름대로 사위를 시험해 본 셈이다.
아무리 태중혼약이라고는 하지만 아델리아의 의사는 전혀 반영이 안된 약혼이었기에 평소 그녀는 이 약혼에 대해 그리 좋게 생각하지만은 않고 있었다.
아이를 누가 배 아파서 낳는데, 따지고 보면 한마디 상의도 없이 술자리에서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 요하임에 대한 화였다.
이는 굳이 홀로 두어도 되야 할 아들을 따라 그녀가 루덴으로 간 이유에 어느 정도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앞서 두 사람이 만나보고 약혼을 진행하는 것으로 하여금 그녀의 화가 조금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엘레나에게 수정구를 통해 여러번 데미안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아델리아는 직접 만나서 자신이 확인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일부러 답장을 하지 않은 편지들도 답장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내용이야 읽어보았기에 데미안이 어떤 심성을 가졌는지 어림잡아 짐작이 가능했지만 끝끝내 이런 방법을 택한 것은 결국에는 그녀의 심술이었다.
원래 그녀의 각본대로 였다면 오늘 아델리아는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장모를 연기할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긴장이 되었을 예비사위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여서 데미안의 인내심의 끝을 보려 하였다.
다만 이미 나온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듯, 이런 계획은 데미안의 얼굴과 행동을 보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다.
데미안과 엘레나가 응접실에 들어오기 전 아델리아는 둘의 모습을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염금술로 만들어낸 수많은 패밀리어들이 저택 곳곳에 숨어있었기에 그들 중 하나의 눈을 빌리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오랜 친우를 똑 닮은 청년과 사랑하는 딸이 나란히 서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생긴 것이 닮은 것 만큼 그 재능마저 빼닮았는지 누가 그 아서의 아들이 아니랄까 아델리아가 눈을 빌리자마자 데미안은 자신들을 지켜보는 시선을 눈치챘다.
패밀리어 너머로 서로의 시선이 얽힘으로서 그와 동시에 패밀리어를 타고 들어오는 데미안의 살기에 아델리아는 순간 몸이 굳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었는지 살기는 순식간에 거두어졌고 다시 눈을 들여다 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 비춰지는 것은 잔뜩 긴장한 얼굴의 데미안 뿐이었다.
저 모습이 연기로 보이지는 않았다. 방금전 그것이 허상은 아니었는지 데미안은 계속 자신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그만큼 그녀의 시선이 강해질 때마다 데미안의 떨림도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자 아델리아는 오묘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그 아서가 자신의 눈을 무서워 하는 것 같아 묘하게 신이나면서도 동시에 데미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어디까지나 눈 앞의 아이는 자신의 심술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는 것이었으니.
막상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니 마음이 약해지는 아델리아였지만, 그녀가 시험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낸 것은 이 이후의 일이었다.
응접실까지 얼마나 남지 않은 거리에서 엘레나가 데미안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딸의 소극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아델리아는 엘레나가 직접 나서서 데미안의 손을 잡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매번 수정구를 통해 대화를 나누면서 엘레나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행동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더해 엘레나가 따뜻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을 때 부터 아델리아의 머릿속에는 이미 계획이고 뭐고 사라진 상황이었다.
저 둘이 응접실에 완전히 도달할 때 까지 아델리아는 둘의 모습에서 눈을 땔 수 가 없었다.
"정말 많이 변했구나."
"이전에도 그런 이야기 하시더니 또오..."
"아니, 정말 많이 변했어. 이게 진짜 내 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 엄마는 엘레나의 바뀐 이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아델리아는 자신의 앞에 앉은 엘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이라는게 정말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엘레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그야말로 극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마치 사람이 뒤바뀌어 버린 것 처럼 말이다.
남부에서 일어났던 습격 사건에 엘레나가 직접 나서서 마물들을 토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엘레나의 실력에 대한 의심이 아니였다. 다만 자신의 딸이 얼마나 소극적이고 타인의 시선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런 엘레나의 모습을 보니 딱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저녁 식사를 통해 확인한 바 엘레나는 아델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몇번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선이 데미안을 향해 있었음을 보았다. 따스한 눈길로 청년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 나고 있었다.
완전히 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을 하고 있는 엘레나를 보고 아델리아는 엘레나에게 일어난 변화를 납득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가요."
엘레나는 아델리아의 말에 기쁨을 숨기지 않은 채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