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루덴 (3)
앞서 이야기 했을 때 내가 장모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그것은 어디 까지나 책을 읽은 독자의 시점에서의 이야기지, 단순히 그녀에 대한 정보라고 한다면야 완전한 백지 상태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크라우스의 소가주라는 직책은 제국의 고위 귀족에 대해서는 머릿속에 넣어두어야 할 위치였고 에델바이스의 안주인인 그녀에 대한 정보 역시 내가 알아두어야 할 것에 속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파혼할 생각이기는 하였어도 상대 가문 측의 어른이었으니, 내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알아서 내게로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어차피 만나지 않을 인물이라 생각하고 다른 것들에 비해 내가 그 정보들을 등한시 한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마냥 흘겨 본 것 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녀가 전 황금의 탑 교수 출신이라던지와 같은 그 인물에 대한 내력이나 사교계에 알려진 취미나 좋아하는 것들은 머릿속에 넣어 두었달까.
하지만 이 또한 긴장을 한 탓인지 완벽히 숙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안개가 낀 흐릿한 거울창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이 희미하게만 느껴진다.
뭐, 이런 걸 떠올린다 한들 떨리는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고개를 살짝 흔들어 머릿속에서 이를 지워 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머리는 비워지지 않았고 어느세 비워졌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는 또 다른 생각이 차지 하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 엘레나와 처음 만나기 전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되짚어 보면 그때도 이 정도 까지 긴장은 안 했던 것 같은데. 발은 조금 떨었어도 말이지.
애매하게 연관이 있어 보이는 기억들을 끄집어 내는 의식의 흐름에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편히 먹고자 하였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녀에 대해 과하게 의식을 하고 있으니 머리가 저절로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꺼내어 보는 모양이다. 다만 그것이 평상시라면 제대로 작동을 하고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무슨 고장이라도 났는지 아주 중구난방이다.
마치 싸구려 검색 엔진에 글자를 입력한 것 처럼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결과물로 떠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담지 않고 있는 것이 낫지, 괜히 긴장을 한 탓에 하등 쓸모 없는 정보만 그것도 어정쩡하게 머리에서 끄집어졌으니 말이다. 정리 되지 않은채 머리속을 맴돌고 있는 정보의 나열은 머리를 혼잡하게 만들었으면 만들었지 내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마음이 진정 되지 않자 반 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창에 머리를 기댔다.
옆에서 잔뜩 신이 난 채 웃고 있는 엘레나와 헤일리의 모습이 약간의 위안을 가져다 주었지만 내 머리속에 찾아온 폭풍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혼란을 감싸 안고 이제는 코 앞까지 다가온 저택을 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잘 관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외관은 매우 근사한 저택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내게는 저곳이 마왕성과 같이 느껴졌다.
마차가 문 앞에 서자 사람의 것이 아닌 기이한 시선이 마차를 한번 훑고 지나가더니 저택의 문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절로 열리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판타지식 자동문인건가?
아무래도 장모님과 엘레나의 오빠 모두 연금술에 조예가 있는 분이시다 보니 이러한 장치가 별택에 여러개 설치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벽을 넘는 것을 기점을 이전에는 기감에 전혀 걸리지 않고 있던 것들이 안으로 들어 오고 나서야 걸려들기 시작한다.
'여기는 집이 아닌 요새인가..?'
저택의 안에 들어오자 겉으로 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이 저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시스템에 의해 보호 받고 있음을 알았다.
긴장을 한 탓에 정신을 집중하려 하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숨겨진 마력 파동들이 사방에서 느껴진다. 마법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 마력파를 내뿜고 있는 것들의 용도를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기감으로 느껴지는 마력파의 성질과 그 크기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대충 감이 왔다.
하기야 대마법사에 가까운 마법사 두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평범할리 없지. 그 에델바이스 가의 백색 성도 마탑의 위용에 가려졌을 뿐 온갖 마법들로 처리를 해놓았으니 말이다.
다만 지금처럼 과하게 긴장된 상태의 나는 거기서 생각을 끊었으면 좋았을걸, 굳이 혹시 저 보안 시스템이 나를 향하지 않을까. 까지 생각을 이어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말이 안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대체 왜 그랬던 걸까.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저택의 마지막 보안 시스템을 격파했을 무렵 나는 다시금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의는 아니었다. 나는 지금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내가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온전히 엘레나가 내 손을 잡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긴장했어요?'
앞서 걷고 있는 헤일리에게 들리지 않게 목소리는 내지 않고 입만 움직여 내게 말을 거는 엘레나. 그녀의 물음에 나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는 거기서 더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대신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붙잡은 내 손을 마구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나 역시 손가락을 부딪히며 그녀의 장난에 응수했다. 기분 탓인걸까. 오늘 따라 손끝에 닿는 그녀의 체온이 유달리 더 뜨겁게만 느껴진다.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싱그럽게 웃는 것으로 질문을 대신했다. 나 또한 그녀가 그랬던 것 처럼 소리 없이 입을 움직이는 것으로 답을 했다.
'이제는 괜찮아요.'
이 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대답을 듣자마자 엘레나는 이전보다 격해진 손가락 공격을 해왔다.
여전히 머리를 비우는 것은 불가능 했다만 그래도 전과는 다르게 하나의 생각으로 머리속을 채우는 건 가능할 것 같았다.
***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현대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바로 유전자 검사와 같은 말이 나오겠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것이 아니었다. 자식과 부모를 동시에 보았을 때 둘이 어떤 관계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요소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야기를 해보자면 아버지의 지인들은 나를 보자마자 내가 아서 크라우스의 아들임을 알아차린다. 그건 이 세상에 검은 머리가 크라우스 가문 밖에 없기 때문도 있지만 곧바로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나와 아버지의 얼굴이 똑 닮았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마주쳤던 프란츠의 경우에는 분위기나 성격이 닮았다고 이야기했다. 솔직히 분위기까지는 인정을 해도 그 성격에 대해서는 공감을 못하겠지만 어쨌든 이렇듯 주변에서 판단하길 이 사람은 누구의 아들이다, 딸이다 라고 느낌을 주는 요소들이 한 두가지 씩은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판단의 결과이기에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소설과 만화의 경우 이러한 요소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인물들 간의 관계를 연관 짓는데 도움을 주기에 거의 대부분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금이 딱 그러했다.
"아델리아 에델바이스에요. 반가워요. 크라우스...아니, 데미안 공자. 우리 이렇게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지요?"
처음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나는 의자에 앉아있는 그녀가 엘레나의 어머니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외모 라기 보다는 느껴지는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해야하나. 프란츠가 나를 보고 아버지를 연상 되었다는 말이 이해가 될 정도로 아델리아를 보자마자 곧바로 엘레나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무언가 즐거운 일이 있을 때 나를 올려다 보는 엘레나와 아주 판박이다.
자꾸 엘레나와 겹쳐보여 그 때문에 갑자기 긴장이 확 풀려버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왜 나는 아델리아가 엘레나와 닮았을 거라는 생각을 안했던 걸까. 거기까지 생각을 했더라면 그나마 덜 피곤했을 텐데.
"아, 안녕하세요. 부인.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 까지 이곳에 머무는 것을 허락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긴장이 풀린 탓에 몸을 꽉 죄고 있던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 나는 서둘러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평소 엘레나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떠올리자 이전처럼 어려워 하지 않고 말을 꺼낼 수 가 있었다. 나름 첫 마디를 실수 없이 때었다는 점이 작은 안도감을 주었는데 생각보다 긴장이 덜 풀린 모양이다.
"와아..."
그런데...우리 장모님의 반응이 약간 이상하다?
순간 내가 뭐라 답했는지 다시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아델리아는 내 대답에 마치 신기한 것을 본 사람 처럼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후에 우리에게 안들릴 정도로 작게 무어라 중얼 거리셨는데, 나는 다음에 무슨 말씀을 하실지 집중을 하고 있던 탓에 그녀가 무어라 말을 했는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아서하고 똑같은 얼굴로 저렇게 예의 바르게 답하니 뭔가 적응이 안된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