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루덴 (1)
친애하는 친우 데미안에게.
아, 이 표현은 쓰지 말라고 했지. 미안하네.
하지만 지금 지웠다가는 괜히 종이가 더러워질 것 같으니 그냥 남겨두기로 하겠네. 새로 종이를 찾는 것도 귀찮고 말이야.
지난번 답장에서 지적해 듯 첫마디가 너무 오글거린다고 하기는 했지만 펜이 손에 잡히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적어 버린단 말이지. 이미 버릇이든지 오래라 쉽게 고쳐지지가 않는군. 습관이라는게 참으로 무섭단 말이야. 중간 중간마다 느글 느글한 표현이 있다면 이 점은 자네가 대충 걸러서 읽기를 바라네.
그건 그렇고 우리가 편지를 주고 받기 시작한지도 어느세 1년이 다되어 가는군.
업무 이외에 펜을 놀리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이었네. 아버지께서 괜히 친구를 만들라고 한게 아니셨어. 자네 덕분에 갑갑한 이곳에서 숨구멍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아 좋았어.
물론 내 편지를 받는 대상이 아름다운 레이디가 아니라 자네 같은 남정내라는 점을 떠올릴 때마다 조금 가슴 아프기는 하다만 나름대로 쉴 수 있는 핑계도 댈 수 있었고 말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가 자식을 조금 빡빡하게 굴리시는 경향이 있지만 이런 면에서는 조금 관대한 편이시거든.
슬슬 나를 업무에서 빼내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 올해부터는 학업에 전념하게 하실 생각인 것 같네. 아무리 아카데미가 황궁과 가깝다고는 하나 솔직히 학업과 업무를 병행시키는 것은 너무 양심없는 행동 아닌가.
뭐, 사설은 이쯤에서 그만하도록 하고 그만 저번에 이야기했던 주제로 넘어가도록 하지.
황도에 쥐새끼들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의견은 나도 동의하는 바 네.
어쩌면 나를 매번 귀찮게 하는 몇몇 대신들이 그들의 끄나풀일 수 도 있지. 아, 이건 농담이 아니야.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나온 결론이라고. 심증만 있어 문제지만 말이지.
그래도 아카데미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어.
그도 그럴게 에스텔리아 아카데미가 어딘가? 일곱 마탑과 더불어 배움의 성역이라 불리는 곳 아니던가. 그만큼 교직원들의 요건도 까다롭고 철저히 검증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 미처 빼놓고 생각하고 있더군.
하지만 이번에 직접 집안 청소를 해보니 깨달은게 있었네. 녀석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숨어있다는 것을 말이야. 뭐, 황실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된 이들이니 아무리 아카데미라고 하더라도 몇명 들어가서 교수 행세를 하고 있을 수도 있지. 그 정도는 되어야 지금까지 그 질긴 목숨들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 아니겠나?
아카데미 입학 시기가 가까워지는 만큼 그에 관한 결재요청이 정말 다양하게 올라오더군.
당연하게도 신학기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거론 되는 것이 자금에 관련된 것이라네. 이중 최근 황도 밖으로 나간적이 있거나 외출사유가 불분명한 이들을 추려보았어.
교직원이 한둘도 아니고 시간강사와 일용직들 까지 범위를 넓히다 보니 조금 번거로운 작업이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노엘과 분담해서 하자니 뭔가 불안해 결국 나 혼자 하게됐네.
아, 이건 딱히 생색을 내는게 아니야.
어차피 여기에 적힌 인물들은 단순히 의심이 가는 이들을 적어 둔 것이니까. 이에 대한 일처리는 자네가 루덴에 온 후에 생각하는 걸로 하자고. 아무튼 추려본걸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네.
기사 학부 전술학과 정교수. 닐슨 페일러(42)
기사 학부 창술학과 조교수. 제시카 헌트(26)
기사 학부 기사론과 정교수. 레오폴드 우버(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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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학부 연금학과 정교수. 필리푸스 파르켈(45)
마법 학부 연금학과 조교수. 엘트먼 에델바이스(24)
교원 중에는 일단 이 정도.
마지막에 이상한 이름이 끼어있는 것 같지만 그건 넘어가도록 하고.
그,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는 말게나.
내가 있는거 없는거 꼬투리 잡아 적어넣은 이름들이니 당연히 적힌 이름은 많을 수 밖에 없지. 절대로 황실의 능력이 부족한게 아니란 말일세.
그래도 기억하면 유용한 이들만 적어 놓았으니 여기에 적힌 이름들은 잊지 말도록. 우선은 이름만 알아 놓으라고 적어둔거니 말이야.
새로히 추가된 일용직들에 관한 정보와 이들의 대한 자세한 정보들은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로 하지.
내용이 내용인 만큼 편지로 보내기에도 좀 그렇고 이 글 처럼 성법을 걸어두려면 내가 직접 글을 써야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 많은 정보를 내 손으로 직접 쓰기에는 좀 그렇거든. 어차피 너도 입학을 위해 루덴으로 와야 할테니 아마 이것이 내가 자네에게 쓰는 올해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아.
다음에는 이렇게 글이 아닌 말로 대화하자고 친구.
그렇다고 만나서 너무 일 이야기만 하지는 말고.
이번에 새로 들여온 보드게임이 있는데 만나면 그거라도 하는게 좋겠어. 이게 상당히 머리를 요구하는 게임이라서 말이야. 이것만큼은 엘레나 양을 대타로 세워도 이길 자신이 있네.
뒤에 있는 건 언제나 그렇듯 노엘이 적은 편지야. 굳이 성법을 걸어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안 걸어두었으니 내가 쓴게 아니라고 버리는 일은 없도록 주의하게나.
솔직히 내용은 저번과 거의 비슷하니 안 읽어도 될 것 같지만 말이야.
아니다. 그래도 읽어주고 답장 써주게. 그러지 않으면 내가 귀찮아 질 것 같아.
슬슬 손가락이 아파오는 군.
아직 다 못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이건 편지가 아닌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로 하자고. 황성에 사람을 보내면 노엘과 함께 내가 가도록 하지. 아무튼 하루라도 빨리 루덴에서 다시 볼 날을 기대하고 있겠네.
너의 친구가.
***
시간의 흐름이라는 건 참으로 상대적이다.
어떤 때는 매우 느리게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매우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
지금 내 앞에 쌓여있는 편지 뭉텅이들만 보아도 그렇다.
처음에는 한 두 장이 전부였는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을 정도로 서랍 한 칸을 채울 정도의 편지들이 나를 반긴다. 2주 정도의 간격으로 주고 받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양이 쌓이기 까지 그 날로 부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이 가능해진다.
서랍을 닫고 고개를 창가로 돌린다.
유리창에 서린 김과 그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이전과는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계절이 세번이나 바뀌었음에도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는 체감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전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듯 하다.
예전에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사람이 행복을 느끼면 그 시간이 더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낀다나. 아버지와 알폰스 이렇게 같이 지내는 시간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엘레나라는 요소가 더해지면서 그 시간의 흐름이 더 가속화된 것 같다.
액운을 년초에 몰아 주었는지 겨울이 되어 신년이 밝아 올때까지 딱히 특별한 일이라고 할만 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랄까. 커다란 사건 사고 없이 평탄하고 행복한 나날의 연속. 내가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한다면 그 예시로 들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들이었다.
나와 엘레나간의 관계에 대해 진전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별개의 이야기다만 그리 따지자면 하루하루가 모두 특별해지기 때문에 굳이 포함시키지는 않겠다.
나는 노엘의 편지를 넘기고 아직 봉인을 뜯지 않은 편지를 바라보았다.
봉투를 봉인하고 있는 밀랍에는 세개의 별 아래에 서 있는 늑대 그림. 에델바이스 공작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각인 되어있다.
이를 보면 당연하게도 발신인으로서 에델바이스의 가주인 요하임을 떠올리겠지만 이 편지는 놀랍게도 요하임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다. 북부에 있는 요하임의 편지가 북부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루덴에서 오는 오르커스의 편지와 함께 오지는 않을 것 아닌가.
"하아...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냐."
현재 루덴에 있을 에델바이스 가의 사람을 생각하면 이 편지의 발신인이 누군지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아까전 오르커스의 편지에도 적혀있던 이름인데, 지금 루덴에는 엘트먼 에델바이스와 그의 어머니가, 그러니까 내게 있어 장모님 되시는 분과 매형 되시는 사람이 있다.
내가 아는 엘트먼의 성격상 편지를 쓰지는 않을테니 아마도 이것은 장모님 쪽에서 보낸 편지 일 것이 분명하다.
아카데미의 입학까지 한달도 남지 않은 지금 나와 엘레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루덴에 가게 될 테니 먼저 루덴에 있는 가족에게서 이렇게 편지가 오는 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조금 기분이 묘한게, 요하임과는 대화도 많이 나누었고 아버지와 다투는 모습을 하도 많이 보아서 이제 어느정도 익숙해진 반면 아직 장모님 쪽은 한번도 만나뵌 적이 없어서 그런지 이 편지를 장모님이 보낸 것이라 생각하니 이 뜯지 않은 편지에서 기이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원작에서 엘트먼과 요하임에 비해 그녀의 비중은 가끔 언급만 될 뿐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내게 있어서 완전히 초면인 셈이다.
약혼식에서 조차 얼굴을 뵌 적이 없었기에 예전에는 혹시 나를 싫어하시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했지만 이 세상에서 약혼식이 가지는 의미가 그리 크지 않음을 깨닫고는 이에 대해서는 잠시 생각을 접어두고 있었다.
그, 나를 싫어했다면 애초에 약혼을 허락하지도 않았겠지? 그렇지?
작년 한해 동안 엘트먼은 황금의 탑 졸업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그를 보좌하고 있던 그녀로서는 상당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 때문에 엘레나는 물론이고 요하임에게 까지 연락이 뜸했질 수 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엘트먼이 아카데미의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니 어느정도 여유가 생겼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편지도 보냈을 테고.
뭐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에서야 장모님에게 연락이 오는 것은 상당히 비상식적인 상황이다만은, 이게 정말 난감한게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으니 상대쪽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저번에 엘레나와 요하임이 말하길 다른 가족들이 나를 나쁘게 보지 않고 있다고는 했는데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건가?
"어우씨...못 뜯겠다."
물론 머리로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해서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낸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이 편지의 봉인을 뜯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안에 들은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런 궁금증을 압살하는 떨림이 내 손을 멈추게 했다.
요하임 때도 이 정도 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원작 소설에서도 워낙 비중이 없으니 요하임과는 다르게 등장인물이라는 생각보다는 장모님이라는 개념이 앞서게 되는 모양이다.
나는 노엘이 보내온 편지와 함께 아직 봉인을 뜯지 않은 봉투를 한 손에 들고는 엘레나에게로 향했다.
참고로 말하는 거지만 이건 절대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어찌 부외자가 가족보다 먼저 편지를 뜯겠는가. 내가 먼저 편지를 읽는 행동은 엄연히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분명 엘레나도 오랜만에 어머니에게서 편지가 왔으니 좋아할게 분명하다.
편지 봉투 앞에 수신인으로 내 이름이 써져있기는 하지만 속에든 내용은 다를지 누가 알겠냔 말이야.
"어머, 데미안. 어머니가 루덴에 오면 크라우스 가문의 별택 말고 지금 지내고 있는 에델바이스의 별택에서 지내도 된다고 하시네요. 오라버니가 임용 되시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일이 적어 적적하시다고...저희 조금 일찍 출발할까요?"
예전에 누가 그랬는데.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니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지금 내 상황에 딱 알 맞는 말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