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시녀와 도련님 (6)
"그럼 오늘 하루도 알차게 시작해볼까?"
머리를 정돈한 헤일리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말했다.
아침에 그녀를 괴롭히던 상념은 이제는 전부 사라졌는지 평소의 쾌활한 헤일리의 모습 그대로다.
개인적인 고민으로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지 못하니. 그래도 요근래 새벽에 나와 검을 휘둘렀던게 도움이 되었던 걸까. 그에 대한 생각을 물리는데 있어 이전만큼이나 오래동안 앓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어쨌건 지금은 업무시간.
뭐가 되었든 사적인 일은 이제 집어넣고 일에 집중해야 할 때다.
최근 들어 영주성에서 새로이 지급받은 여름용 제복으로 갈아입은 헤일리는 간단하게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고는 방을 나섰다. 엘레나의 시녀인 그녀가 당연히 첫번째로 가야할 곳은 엘레나의 방.
헤일리는 주머니에 넣어둔 회중시계로 시간을 한번 확인하고는 아직 기상시간에 늦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엘레나의 방으로 향했다. 엘레나의 최측근의 위치에 있는 만큼 헤일리가 묵는 숙소도 엘레나의 방에서 몇칸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있어 도착하는 것은 금방 이었다.
똑똑-
먼저 문을 두드려 엘레나가 깨어났음을 확인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무음(無音). 여느때처럼 아직 잠에 빠져있을 거라 생각하고는 헤일리는 능숙하게 문에대고 말을 걸며 문을 열었다.
"아가씨. 저 헤일리 입니다. 들어갈게요."
다만 헤일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엘레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꼭 오늘 방을 나오기 전 헤일리와 같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헤일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가씨도 참. 깨어나 계셨으면 답 좀 해주시지."
"...아. 헤일리 왔구나?"
헤일리의 생각이 맞는지 엘레나는 헤일리가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낼 때 까지 그녀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한듯 하였다. 어딘가 풀이 죽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모습에 헤일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엘레나에게 물었다.
"아가씨 혹시 악몽 꾸셨나요? 얼굴색이 그리 좋지 않아 보이시는데..."
"아니야. 악몽은 무슨. 아침에 막 일어난 거라 조금 노곤 한 것 뿐이야. 헤일리도 잘 알잖아. 내가 아침에 약하다는 걸."
"그렇죠. 요 잠꾸러기!"
"으야야야아...볼 느러냐아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엘레나의 말에 헤일리는 그런가 하며 엘레나의 볼을 길게 늘어뜨렸다. 덕분에 잠에서 완전히 벗어났는지 엘레나의 깨끗한 자줏빛 눈동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헤일리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조금 살살 당기지...아프잖아."
"아가씨 볼이 적당히 말랑말랑 하셔야지요. 머리 부스스 해진거 봐. 어서 정돈해드릴게요."
"....말이나 돌리고 말이야."
"히히히."
엘레나의 말에 웃음으로 답하는 헤일리. 엘레나 역시 헤일리가 웃자 언제 그랬냐는듯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을 터트렸다.
엘레나가 욕실에 들어가 세면을 끝내고 나오자 본격적으로 헤일리의 일이 시작되었다.
머리 정돈 이라던지 엘레나의 방 정리와 같은 것은 엘레나 스스로 하거나 하녀에게 맡겨도 될 법한 일들이었지만 계속해서 헤일리가 하는 이유는 그저 그녀가 이 일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워낙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엘레나다 보니 단순 정리 정돈을 하는 것만 해도 마치 인형을 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처음 헤일리가 엘레나를 손 보았을 때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 시작하였지만 몇년을 걸쳐 하다 보니 이에 대해서 자부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적어도 엘레나의 곁에 있는 한 헤일리는 지금과 같은 일을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따란! 자, 다 끝냈어요."
엘레나에게 손거울을 건네며 자신이 빗질한 머리를 보여주는 헤일리. 삐죽 튀어나와 있는 부분만 정리된게 아니라 머리모양이 전체적으로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잡혀있는 모습이 헤일리가 얼마나 높은 숙련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엘레나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싸인을 보내었다.
아침을 맞이하는 준비는 이걸로 끝.
다음은 조식이다.
조찬이야 백작이 따로 부르지 않는 이상 만찬장까지 갈 필요가 없었으니 이미 이곳에 오기전 일정을 확인해둔 헤일리는 오늘의 아침은 각자의 방에서 따로 먹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서와 데미안은 계절이 바뀌기 시작하며 늘어난 문제들 때문에 아침부터 집무실 행이었고 알폰스야 아직 맡은 역할이 없으니 논외. 엘레나는 근래에 영주성의 간단한 출납 회계 업무를 분담해서 맡기 시작했으니 각자 식사는 방에서 해결한다.
별관과 본관의 주방 까지의 거리가 싫은 헤일리는 앞서 방에 들어 오기 전 하녀에게 조식을 내오라고 말을 해둔 터 였다. 아침밥 문제도 해결.
그렇다면 지금 헤일리가 해야 할 일은 별관 집무실로 가서 담당자에게 오늘치 엘레나의 업무를 받아오는 것이 마지막 아침 업무일테다.
"그럼 아가씨. 저 다녀오겠습니다~"
"헤일리."
"네? 아가씨?"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엘레나의 목소리에 헤일리는 밖으로 나가던 발을 멈춰 세우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준비된 옷에 구멍이라도 생긴 것일까. 아니면 머리가 다시 헝클어진걸까.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아본 헤일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침에 처음 그녀가 마주했던 엘레나의 얼굴이었다.
"헤일리."
엘레나가 다시금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어딘가 슬퍼보이는 투명한 자줏빛 눈동자는 헤일리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요즘 고민 있지 않아?"
없을리가.
하지만 헤일리는 여기서 말을 아끼기로 하였다. 이것은 어디 까지나 자신의 문제였고 자신이 결정해야하는 문제였으니까. 그러니 여태 그래왔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게 있을리가 없잖아. 금방 가져올게. 엘레나."
***
"결국 끝까지 말 안해줬네...그게 더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데."
서류를 방으로 가져오고는 끝내 말을 하지 않고 떠나버린 헤일리가 사라진 문을 보며 엘레나는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녀가 무슨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다고 느낄 수 있었을 뿐. 밤새 엘레나가 자고 있는 방 까지 흘러들어온 헤일리의 감정을 생각하면 지금 그녀가 아무런 걱정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으니까.
신성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념(念)에 영향을 많이 받듯 신성의 집합체인 신 역시 그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은 신이라기에는 막대한 신성력을 가진 성직자와 같다고 봐야겠지만 사람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봉사하는 성직자들이 그들의 감정에 감응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아닌가. 이와 같았다.
엘레나가 사람의 감정을 곧잘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정도 이상을 넘어가면 그녀에게 닿기 마련이다.
평소에는 긴가민가 하던 수준의 것이 하루아침에 눈덩이 처럼 불어나 피부에 직접적으로 느껴질 정도까지 되었으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리가. 더군다나 헤일리는 엘레나에게 있어 그저 수많은 사용인 들 중 한명이 아니었으니 더더욱 눈이 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엘레나가 헤일리에게 더 캐묻지 않는 이유는 이미 한번 물어보았음에도 헤일리가 답을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도 더 캐묻지는 않을 뿐 이걸 보고만 있을 엘레나가 아니었다. 주어진 단서가 매우 적기는 하나 무엇이 헤일리를 저리 만들었을지 엘레나는 홀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원래에는 없었을 헤일리의 고민이라...대체 뭐가 있을까?"
저리 심각하게 고민할만한 문제가 저번 삶에서 한번도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번 삶에서의 변화로 생기게 된 문제일텐데, 그리 생각하자니 변수가 많아도 너무 많아 뭐라 특정 짓기가 힘들다.
엘레나는 펜대와 머리를 동시에 굴려가며 헤일리가 안고 있는 고민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나오는 것은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를 가진 그녀라고 해도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망상에서 비롯된 무궁한 가설들 밖에 없으니 말이다.
똑똑-
그 순간. 누군가가 엘레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부드럽지만 힘이 실려있는 소리에 엘레나는 문 앞에 선 이가 헤일리가 아니었음을 알았다. 결국에는 헤일리가 말을 해주러 올거라는 기대도 마음 한 구석에 있었지만 헤일리도 보통 고집이 아니었으니. 그녀의 방문을 두드린 것은 데미안이었다.
"다행이 여기 계셨네요. 그런데 얼굴이 뭔가 뚱해 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엘레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랴. 그건 그렇고 지금 시간에는 어인 일로?"
"이야기를 해드려야 할게 생겨서요. 잠시 시간 될까요?"
어차피 헤일리 생각을 하느랴 받은 업무는 하나도 진행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엘레나는 펜을 내려 놓고는 책상에서 일어나 옆에 준비된 티테이블로 자리를 옮기었다.
마음이 어지럽다가도 데미안의 얼굴을 보아서 일까. 일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은 안도감이 그녀의 마음에 찾아왔다. 일전에 선물로 사주었던 옷과 함께 주었던 향수를 뿌렸는지 그에게서는 부드러운 머스크 향이 풍겨왔다.
이를 확인한 것 만으로도 벌써부터 엘레나의 마음에는 행복이 충만했다.
엘레나가 자신에게서 나는 향기를 맡은 것을 알았는지 데미안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선물 받은 향수들 중 이게 가장 제 취향에 맞더라구요. 고마워요. 엘레나."
"헤헤. 머스크 향이 부드럽고 포근한게 데미안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그때 같이 드리길 잘 한것 같아요. 그때 드린 것 중에서 과일향이 살짝 섞인 다른 것들도 있으니..."
데미안이 방에 들어온지 얼마되지도 않아 방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미안과 엘레나도 이를 자각했는지 서로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잠시 헛기침을 두어번 하며 말을 물리더니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목적에 대해 바로 이야기를 꺼내었다.
"갑자기 뜬끔 없기는 하지만 엘레나는 사람의 체질을 바꾸는 방법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그, 환골탈태와 같이 시술자에게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 아닌 방법 말입니다."
"사람의 체질...그러니까 기본적으로 태어났을 때 부터 가지는 천형(天形)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확실히 마도에도 무도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체질을 더 낫게 바꾸어주는 방법이 있어요. 그중 데미안이 찾으시는 방법이라면 술식으로 하나의 길을 만들어 두고 그리로 천천히 교정하게 하는 방법이 있겠네요. 시간은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시술자에게 가장 부담이 되지 않는 방법은 이것이에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시술 가능하십니까?"
"그건 어떤 체질을 개선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네요. 바꾸고자 하는 체질에 따라서 술식의 짜임새도 천차만별로 달라지니."
기사들 중 누가 체질로 인한 문제를 겪고 있나?
갑자기 찾아와 체질 개선에 대해 묻는 데미안의 말에 엘레나는 이렇게 까지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데미안과 아서야 워낙 무인으로서 완벽한 몸을 가지고 있고 알폰스 역시 체질로 문제를 겪을 만한 몸이 아니었다.
그나마 범위를 좁혀 보자면 켄이나 마리아였지만 이후 데미안이 꺼낸 주제에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릇'을 늘리는 것이라면 어떻습니까? 고유 마나 용적량 말입니다."
이런 것에 문제를 겪을 만한 이들은 기사들 밖에 없으니까.
체내에 마력을 담아 오러로 만들어 초인이 되는 이들이 기사였으니 기사단원 중 누군가 체질적으로 이와 관련된 문제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력에 관련된 체질 변환의 술식은 당연코 다른 술식들과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하다. 그야 마력은 사람의 생명의 근원과도 맞닿아 있는 주제였으니 되려 건들기 쉬웠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려울 뿐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니 엘레나는 데미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유 마나 용적량을 늘리는 거라...어렵지만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는 없겠네요. 다만 그릇을 키운다고 한들 단번에 커지는 것이 아니라 도예가가 천천히 그릇을 넓혀가듯 매우 점진적으로 커지게 될 것인데 괜찮으시겠어요?"
"그에 관한 문제는 제가 결정할 것이 아닌 것 같지만 아마 괜찮을거라 생각합니다."
"다행이네요. 그건 그렇고 데미안이 상당히 아끼시는 기사분이신가봐요. 이렇게 직접 해결책을 찾으려 하시고. 아, 용적량의 문제라고 한다면 아직 견습 기사 이신가요? 누구인지 나중에 얼굴 한번 뵙고 싶네요."
데미안이 이렇게 해결방안을 찾고 있다는 것은 오러가 아닌 다른 방면에서는 분명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데미안이 이를 아까워 방법을 찾아주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데미안은 엘레나의 말에 약간 의뭉스런 얼굴로 말하였다.
"음, 엘레나도 아시는 분입니다."
"네? 저는 견습기사 분들 중 알고 있는 분이....아! 로빈 경! 로빈 경이 그런 체질 문제를 겪고 계셨어요?"
"그게 아니에요. 엘레나. 기사도 견습기사도 아니에요. 아, 어쩌면 이제 견습기사가 되려고 한다 할 수도 있겠네요."
엘레나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데미안은 조금 씁쓸한 미소로 답했다.
"헤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