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시녀와 도련님 (5)
방으로 돌아온 헤일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욕실에 들어가 몸을 씻는 것이었다.
전날 처럼 단련을 해서 땀을 흘린것도 아니었지만 여름에 가까워지고 있는 사르함의 날씨가 주는 찝찝함은 몸을 한번 물로 씻어내지 않고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은 초여름. 그리 덥지도 않은 날인데 헤일리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할 수 도 있지만 창밖을 내다보면 언제나 설경이 보이는 추운 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헤일리에게 있어 더위는 낯선 친구였다.
수건으로 물기를 덜어내고 의자에 앉는 헤일리. 냉수로 몸을 씻었기에 그런지 순간적으로 몸에서 열이 빠져나가 몸을 부르르 떨어댔지만 이후 전신에 감도는 서늘함은 한기 그 이상의 만족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후우우우..."
기분 좋게 숨을 내뱉고는 밤 중의 일을 회상한다.
"헤헤, 밤친구가 생겨버렸네?"
짧지만 알폰스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은 헤일리에게 있어서도 마음이 편해지는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것을 비록 일부분이나마 드러내게 되었으니 속이 시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귀여운 꼬마 아이의 모습 또한 꽤나 힐링이 되었고 말이다.
일이 이리 풀리게 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건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헤일리에게 있어 알폰스와의 새벽 훈련은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이전까지의 새벽에 나와 연무장을 사용했던건 엄밀히 따지자면 허락을 받지 않고 한 것이기에 잘못이 되었지만 알폰스와 같이 이용하게 된다면 잘못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지막에 헤어질 때는 다 보였겠지...."
헤어지기전 알폰스가 떨어뜨린 조명석을 다시 건네어줄 때 헤일리는 자신이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만졌을 때는 아무런 빛을 내지 않던 조명석이 저 어린 꼬마의 손에 닿자마자 환하게 빛을 내는 모습을 보자마자 다시금 귓가의 그 목소리가 울리는 듯 했으니까.
마지막에 알폰스가 약간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답했던 이유가 아마도 그런 헤일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것이다. 알폰스에게 있어 악감정이라고는 일 도 없는 것을, 또 괜한 죄책감을 짊어들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재능."
하지만 그럼에도 이를 정정하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난 이유는 본인 스스로가 가지지 못한 재능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전설 속의 용을 베어내고 그 힘을 얻었다는 크라우스 가문.
제국에서 무가(武家)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다들 한번 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다. 건국 전설에 등장하는 용사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유명한 전설이었으니.
그리고 이 이야기와 같이 대대로 크라우스 가문의 혈족들은 평범한 사람과는 남다른 재능을 타고 났다. 초인이라 불리는 기사들을 압도하는 용력(用力)과 용과 비견될 정도의 마력량까지 크라우스의 이름을 내건 이들 중 역사에 족적을 남기지 않은 이는 없었다.
아무리 알폰스가 데미안과 아서에 비해 그 피가 약하다고는 해도 그들의 재능을 잇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조명석의 광량은 소유자가 체내에 보유한 '그릇'의 크기와 비례한다.
알폰스가 헤일리에게 보여주었던 빛은 아직 몸의 체계가 잡혀가고 있는 일곱살짜리 꼬마 아이로서는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빛이었다.
"재능이라...."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헤일리는 알폰스가 보여주었던 빛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고개를 방 안에 놓인 책상을 향해 돌렸다.
그곳에는 뜯겨진 편지 한통이 놓여져 있었는데 다름아닌 이것이 요 며칠간 그녀가 안하던 행동을 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편지의 찢겨진 봉인에는 하트먼 가문을 상징하는 늑대 한 마리가 그러져 있어 이 편지의 발송지가 어딘지 쉽게 알 수 있다.
편지 봉투 안의 내용물은 대체적으로 평범했다. 그저 지난번에 일어났던 황족 암살미수 사건에 대한 안부글과 에스텔리아 아카데미아 입학서류. 이 두가지가 전부였다.
안부글에 대한 답장은 이미 보낸지 오래. 헤일리는 그와 같이 온 입학서류를 다시한번 손에 집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제국 내 최고의 교육기관이라고 알려진 에스텔리아 아카데미.
일반적으로 다른 하위 교육기관에서 인정을 받거나 시험을 쳐서 들어가야 하지만 제국에 적을 둔 귀족가의 자제들에게는 한가지 특혜가 있다. 그것은 첫 입학만은 성적과 상관 없이 원하는 학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렇게 들어간다 한들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지 못하면 퇴학처리 되는 것은 타학생들과 같다.
헤일리 역시 귀족가의 자제였기에 이러한 특혜를 누릴 수 있었는데 헤일리는 그저 자신이 어느 학부에 들 것인지 선택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메로힘에 오기 전의 헤일리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일이었지만 이곳에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기사들의 쇳소리를 듣고 자신의 조부인 빌헬름의 뒤를 이어 제국 최고의 기사 중 한명으로 알려진 그웬 경과 호각으로 겨루는 또래 소년의 모습은 검을 놓았던 헤일리에게 있어 검에 대한 열정에 다시 한번 불을 지피기에 충분하였다.
이것이 헤일리의 고민이 시작된 이유였다.
이곳에 있는 동안 마음은 기울어져, 가고 싶은 학부는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쪽을 선택하면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놓이게 될지 그 결과가 뻔히 보인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자신의 기량은 그곳을 버틸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기사학부 내에서 비전투 학과를 선택하는 것도 1년을 버텨야 가능한 일이다. 이제 막 초인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 이들 사이에서 범인의 몸을 가진 그녀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헤일리는 그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머리로는 말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 뜻을 거두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헤일리는 입학서류를 자신의 눈에서 치우고는 아침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릴 때 까지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
평소의 내 일정을 어느정도 꿰고 있는 알폰스였기에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지금 시간에 나를 찾아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 이유가 일하고 있는 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함이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 시간에 알폰스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은 상당히 급한 이유가 있다는 것일테다.
"그래서 갑자기 사람의 체질을 바꾸는 방법은 왜 궁금한거니 알폰스?"
"음...어..저..그게 말이죠..?"
내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는 알폰스.
딱히 추궁을 하려던 것은 아닌데 알폰스가 말을 떠는 바람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그래도 대뜸 사람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 무슨 감기를 낫게 하는 방법 수준의 질문도 아니고 왜 그것에 대해 물어봤는지의 이유는 들어보아야겠다.
나는 혹시라도 알폰스가 현재의 상태에 무슨 불만을 가지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 말을 던졌다.
"내가 처음 너에게 오러를 일깨워줬을 때 너는 이에 대한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 남들보다 뛰어난 용력이나 압도적인 '그릇'의 양은 우리 크라우스 가문의 특징이지만 알폰스 너는 용력 대신 그 이상의 오러 운용 능력을 가진 셈이지."
"어...그렇죠?"
"이 또한 어찌보면 체질이야. 아버지의 피보다는 어머니의 피를 짙게 이어받았으니까. 어머니는 마력을 아주 세밀하게 다룰 줄 아시는 분이셨거든. 그런데 혹시 너가 지금의 상태에 부족해서 힘을 강하게 하고 싶다면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 아니에요! 제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 헤일리씨를 말한 거였어요."
"어? 헤일리가 왜?"
"아하하...음, 그게."
하지만 알폰스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헤일리 하트먼.
엘레나의 시녀이자 절친한 친구인 그녀의 이름이 알폰스를 통해서 나오게 될 줄이야. 내가 알기로는 둘 사이에 서로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체 언제 친해진 것일까?
알폰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내게 여태까지의 일들을 전부 말하였다.
새벽 중에 몰래 연무장에 나가 단련을 하고 있었던 것, 그러다가 똑같이 새벽에 나온 헤일리와 마주하게 되고 그녀의 검무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까지. 요새 정신이 딴데 있는 가 싶더니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거구나.
알폰스의 말을 듣고 생각을 해보니 헤일리의 조부가 그 빌헬름 경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듣자하니 지닌 검술에 대한 이해도와 실력은 뛰어난 것 같은데, 문제는 '그릇' 인건가. 어째서 알폰스가 내게 체질을 바꿀수 있는 방법을 물어봤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혹시나해서 하는 말인데 그녀가 너에게 이와 관련된 부탁을 한거니?"
"아니요. 헤일리 씨는 거기에 대해서 제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런거에요. 형님."
하기야. 그녀와 엘레나의 사이라면 이렇게 멀리 돌아서 부탁할것 없이 곧바로 엘레나에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었겠지. 다만 헤일리 성격 상 이런 문제에 대해서 엘레나에게 이야기 하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그녀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알폰스가 그녀에게서 말을 듣고 내게 전달된 것은 거의 우연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나는 알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내가 바로 답을 줄 수 있는 건 없구나. 알폰스. '그릇'에 관련된 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라 그리 쉽게 입 밖으로 내밀 것이 아니야. 그래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란다. 너도 알다 싶이 신체의 근간을 뜯어 고치는 건 환골탈태(換骨奪胎)도 있잖니. 이 또한 하나의 예시로 들 수 있지."
"그...너무 아픈건 안돼요."
"하하하. 환골탈태는 어디까지나 예시니까 걱정하지마. 일단 형이 조금 더 답을 찾아보고 난후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자. 음, 그래도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알폰스를 방에서 내보내고 곧바로 은색 종을 쳐 켄을 불렀다. 때마침 근처에 있었는지 켄이 방에 도착하는 시간은 매우 빨랐다.
"오늘은 드물게도 이 시간에 알폰스 도련님과 같이 계셨군요. 즐거운 담화 시간이 되셨습니까?"
"얼굴 보자마자 그런 이야기에요?"
"그야 지금 도련님 얼굴이 웃고 계시니까요."
웃고 있다?
켄의 말대로 내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니 무심결에 올라간 입꼬리가 만져졌다. 확실히 지금 내 기분은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알폰스가 그간의 비밀을 말해주었기 때문도 있고 원작과는 매우 다르게 흘러가는 헤일리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도 있다.
헤일리 하트먼. 그녀는 소설 속에서 엘레나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지만 주연은 아니었다. 데미안을 기준으로 해보자면 그래도 이 녀석보다는 조금 비중이 더 있는 정도랄까.
데미안을 엘레나와 떨어뜨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녀이기도 하였고 나름대로 괜찮은 조력자로 소설은 그녀를 서술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소설은 모든 조연들에게 완벽한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소설은 극을 전개하는 주연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조연과 주연 사이에 서사의 싶이가 차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거다.
하지만 내가 데미안이 되고 소설에서는 적혀있지 않던 크라우스의 가족들을 알게 된 것 처럼 헤일리의 이야기는 다시 한번 이 세상이 소설이라는 내 관념을 짜릿하게 깨부숴 주었다. 그러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가 있나.
"재밌는 이야기이기는 했어요. 그건 그렇고 켄. 제가 어릴 적에 모아달라고 부탁했던 영약들 있잖아요? 그것들 전부 이곳으로 가져와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작은 도련님이 영약을 드시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거, 제게 부탁하시지...."
"뭐, 비슷하기는 해요."
환골탈태가 아닌 체질 개선법 이라.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여럿 있기는 하지만 전부 과격한 것들 뿐이라 알폰스가 들었다가는 거품을 물고 기절하게 될 것이다.
다행이게도 이런 방면의 전문가가 때마침 우리 영주성에서 지내고 있었다. 헤일리하고도 아주 인연이 깊은 그녀가.
나는 켄에게 그리 부탁을 하고는 이실리아 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