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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90화 (90/131)

< 90화 > 시녀와 도련님 (4)

헤일리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작은 도련님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 꼬마 아이는 아무리 불러보아도 다시 자신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알폰스의 머리에서 발산되는 열을 미미하지만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에 지금 이 소년이 부끄러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무엇이 이 아이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일까.

소년의 말문을 열려면 우선 그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있어 헤일리가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녀 스스로도 알폰스가 무엇을 부끄러워 하는지 짐작이 갔다.

헤일리는 알폰스가 부끄럼을 느끼는 원인이 자신이 새벽마다 하는 검무(劍舞)를 본 것에 대한 죄책감이라 생각했다. 처음 한번은 길을 가다 얼핏 실수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알폰스는 이미 서너번을 넘게 숨어서 검무를 보았다.

헤일리가 아는 알폰스는 매우 똑똑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알폰스의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 보고 있으면 정말 이 아이가 아직 일곱살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럽고 사려깊다.

단순히 예법을 잘 익히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기에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직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나이의 헤일리였지만 엘레나를 보좌하는 시녀로서 처세술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통달하고 있었다. 그런 헤일리가 보기에도 알폰스의 상황판단 능력과 대응능력은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보통의 일곱살짜리 꼬마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형과 누나를 두고 몰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같이 있고 싶어 떼를 쓰고 울거나 하지.

지난번 봄철 사냥대회 때만 하더라도 엘레나를 둘러싼 남부 가문의 영애들을 적절한 타이밍에 나서서 물러나게 만들지 않았는가.

지금 둘이 서 있는 장소는 크라우스의 영주성이고 알폰스는 그 크라우스의 둘째 공자다.

엄밀히 따져 보면 알폰스에게 잘못은 없었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남의 집 연무장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검을 휘두른 헤일리에게 있을 것이다.

헤일리가 생각하기에 알폰스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테다.

하지만 제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이 꼬마 아이는 그 이전에 남의 연습을 몰래 보았다는 것에 죄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딱히 상관 없는데.'

알폰스가 여태 자신의 검무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옛적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처음 새벽에 나왔던 그 날 부터 자신을 대하는 알폰스의 행동거지가 달라졌으니 눈치가 아예 없고서야 그 사실을 모를리가 없다.

애초에 처음부터 숨기려는 생각은 없었다.

새벽에 나와 검을 휘두른 것은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보다는 그냥 그날 새벽에 추었던 검무가 마음에 들어 이후부터는 관성적으로 나오게 된 것에 가까웠다.

솔직히 말해 알폰스가 저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헤일리로서는 기꺼웠다.

기사에게 있어 다른 이의 훈련을 허락도 없이 훔쳐보는 것은 명예롭지 않은 일이었고 그말 즉슨 알폰스는 헤일리를 제대로 된 검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었으니 말이다.

'우선은 그것 부터 설명해주는게 나으려나.'

사실대로 말해준다면 알폰스의 죄악감도 조금은 덜어질 것이다.

첫날 부터 알폰스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기에 망정이지 사실 그날 알폰스나 다른 누군가에게 검무를 추고 있다는 것을 들켰다면 조금은 부끄러워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알폰스가 이렇게 계속 부끄럼을 타고 있는 건 헤일리로서도 책임감이 느껴졌다.

헤일리가 뭐라 운을 떼야 할지 말을 고르고 있을 때, 알폰스가 그녀 보다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주세요."

"네?"

"그만...놔 주세요...헤일리 씨. 더워요..."

알폰스의 작은 외침에 헤일리는 고개를 숙여 알폰스를 바라보았다.

"아."

뭉개진 목소리로 열기에 젖은 알폰스의 모습에 헤일리는 무엇이 문제였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헤일리의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아직 꼬마 아이에 불과한 알폰스를 품 안에 넣기에는 충분했다. 워낙 가볍고 아담한 체구를 가진 알폰스였기에 헤일리는 어느 순간부턴가 무의식적으로 마치 인형을 다루듯 알폰스를 품에 안고 있었다.

한겨울에도 사람끼리 부대껴 있으면 땀이 나기 마련인데 이제 서서히 기온이 올라가고 있는 초여름이라고 한다면 말 할 것도 없다.

더군다나 알폰스는 헤일리의 가슴 사이에 쏙 들어가 있어 면적 상 열을 더 받을 수 밖에, 여태 부끄러워서 그리 얼굴이 빨간 줄 알았더니 사실은 거기에 또 다른 이유가 숨어있던 것이었다.

***

알폰스가 헤일리에게서 벗어나고 잠시간 동안 둘 사이의 침묵이 유지되었다.

알폰스에게는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이 열기를 걷어낼 필요가 있었고 여기에 있어 침묵 만큼이나 성능이 좋은 냉각제는 없었다. 열기가 조금 가시는 것 같자 알폰스는 앞서 준비한데로 헤일리에게 고개 숙여 사과를 건냈다.

"여태 아무 말 없이 훈련을 훔쳐봐 죄송합니다. 일찍히 말했어야 했는데 제가 용기가 부족하여 지금에서야 입을 열게 되었습니다."

아직 붉으스름한 얼굴이 열기가 다 가시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지만 정신은 말짱히 돌아왔는지 알폰스의 어휘력은 평소와 같았다.

비장하기 까지 한 알폰스의 얼굴을 보곤 헤일리는 되려 손사레 치며 알폰스의 사과를 물렸다.

"아뇨. 제가 허락도 없이 새벽에 검을 휘두른 것이 잘못이지 그걸 본 도련님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그건 그렇고 그날 작은 도련님께서 새벽에 연무장에 오신 이유는 훈련을 위해서시죠? 혹시 이전부터 매 새벽마다 일어나 훈련을 하신건가요?"

"네? 네...그렇지요?"

"대단해요!!"

알폰스의 저런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을 자신이 없던 헤일리였기에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알폰스가 그날 새벽에 나와있던 이유를 꺼내며 이에 대해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저 화제를 돌리기 위한 빈말은 아니었던 것이 알폰스가 헤일리를 만나기 전 고민을 했던 것 처럼 헤일리 역시 알폰스와 마주쳤을 때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생각이 이어지게 된 것이 어째서 그날 알폰스는 바깥에 나와 있었나? 였다.

아직 한창 잠이 많을 나이에 그것도 스스로 일어나 훈련을 한다는 것은 충분히 대단하다 여길 만 하였고 헤일리의 생각도 이와 같았다.

갑작스런 칭찬에 당황하기는 해도 알폰스의 입꼬리는 슬그머니 위를 향했다.

계속해서 대화가 이어지자 둘 사이의 거리도 차츰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앞에서 약간의 헤프닝이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둘은 서로 대화할 마음이 가득인 상황이었고 알폰스가 제정신을 차리는 것으로 둘의 대화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헤일리와 이야기를 할때마다 알폰스는 기분 좋은 후련함을 느꼈다.

여태 막혀 있던 것이 뻥하고 뚫리는 듯한 기분이랄까. 마음속에 짊어지고 있던 돌덩이를 몇개 내려놓은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여전히 두근 거리는 심장은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충분히 감내할 만 한 것이었다.

왜 그동안 검을 놓고 있었는지 또 왜 검을 다시 들게 되었는지 헤일리가 그 이유를 이야기 해 줄 때마다 자신이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것으로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 새삼스레 웃음이 나왔다.

"히히. 그러고 보니 이런 이야기는 아가씨께 해드린 적도 없었는데 이렇게라도 밖으로 내뱉게 되니 무언가 후련하네요."

무엇보다 편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헤일리의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나이가 어렸기에 가능했던 것일지라도 어쨌건 헤일리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엘레나 조차 모르고 있던 비밀을 공유하게 된 셈이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제가 새벽에 나오게 되서 도련님이 훈련을 못하게 되신 거네요. 그럼 앞으로는 단장님께 허락이라도 받아서 오후에..."

"안돼요!!!"

"네?"

"그, 그게 해가 떠 있을 때는 할 일이 많으시잖아요? 자칫 잘못하다가 농땡이 피운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고...또 그웬 경이 보기에는 유해 보이셔도 상당히 원칙주의자시거든요! 기사단원이 아니면 연무장을 안 내어주실 수도 있어요. 그리고 기사단 훈련이 끝나면 저와 형님이 사용을 하게 되니까 이번에 가문의 비전 검법을 가르쳐 주신다고 하여 형님이 그 시간대 연무장 통행을 규제한다고 저에게 말씀해주셨기에 지금처럼 일찍 일어나서 아침 운동 겸 하는게 더 낮다고 생각 합니다!!"

"아..하하하 그렇군요?"

쉴 틈 없이 뱉어지는 알폰스의 말에 헤일리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그웬 경을 깐깐한 원칙주의자로 만들어 버린 것에 알폰스는 가슴이 아팠으나 그럼에도 어느정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헤일리의 모습을 보니 그에 대한 죄책감은 씻은 것처럼 사라졌다.

지금 헤일리의 앞에 나타난 이유는 더는 몰래 숨지 않고 이 새벽의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었지 이 시간의 만남을 없에기 위함이 아니었으니 헤일리가 나오지 않게 되면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작은 도련님의 훈련이 안되는게..."

"애초에 저는 새벽에 검법 위주의 훈련보다는 체력을 기르기 위한 단련을 했기 때문에 상관이 없습니다."

"아~"

검법을 아예 건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체력 단련을 더 중히 하기는 했으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반은 맞는 말이니까.

"하기야 도련님 말씀대로 해가 떠 있을 때는 일거리들이 많으니 쉽지가 않겠네요. 부외자가 단원들과 섞여 검을 휘두르는 것도 확실히 민폐일 것이고...그럼 도련님께 폐가 안된다면야 저도 앞으로 이렇게 새벽에 나와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헤일리가 새벽에만 나오겠다고 단언하고서야 알폰스는 밝게 웃으며 답을 할 수 가 있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저 멀리 검은 하늘에 붉은 빛이 올라오는 것이 둘의 눈에 보였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다른이들에게 들키게 되리라.

실컷 이야기만 하다가 들어가게 되었지만 알폰스는 보람찬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던 것이 이렇게 까지 발전하게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 가 없다. 이제 막 날이 밝아오는데 벌써부터 해가 지고 나서가 기대될 정도였다.

"작은 도련님."

그렇게 싱글벙글 웃음을 띄우며 방으로 돌아가려는 때 헤일리가 알폰스를 불러 세웠다. 아직 다 못한 말이 있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알폰스에게 작은 돌 하나를 건내주었다.

"이거 잊으셨어요."

"아, 이건..."

헤일리가 쥐었을 때는 아무런 빛도 내지 않던 무색의 결정이 알폰스의 손에 올라가자 밝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녀가 건낸 것은 알폰스가 램프 대용으로 가지고 온 조명석(照明石)이었다. 헤일리가 덮쳤을 때 무심코 손에서 놓친 것을 그녀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예쁜 빛이네요. 저도 어릴 때는 이것 가지고 연습 많이 했는데. 이렇게 빛이 밝은 걸 보니 작은 도련님은 분명 나중에 커서 훌륭한 기사가 되실거에요."

"네...칭찬 고마워요. 헤일리."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하는 말을 건내는 헤일리의 모습에 알폰스가 이전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는 일은 없었다. 되려 차가운 물에 맞아 여태 까지 행복한 꿈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가 현실로 뛰쳐나오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헤일리의 말에 악의는 없었고 오로지 선의 만이 가득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폰스는 알았다.

밝게 빛을 내는 조명석 너머로 보이는 헤일리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알폰스의 눈에 선명했다.

헤일리와 헤어지고 난 후 알폰스는 한참 동안 자신의 손에서 밝게 빛을 내고 있는 조명석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무엇이 그녀의 손에서 검을 놓게 만들었는지 들었기 때문일까. 헤일리가 건네어준 작은 조약돌 만한 조명석이 바위를 들고 있는 것 마냥 무겁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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