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시녀와 도련님 (3)
요즘 들어 알폰스의 기분은 흐릿한 하늘과 같았다.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싱쾌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기분.
그 날 이후로 헤일리는 매 새벽마다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른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자리를 빼앗긴 알폰스는 새벽 단련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매일마다 반복하던 루틴이 깨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컨디션에 난조가 온 건가 싶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또 아니었는지 새벽에 못 다한 만큼 몸을 움직여 새로히 루틴을 만들어 보아도 이 찝찝함은 가실 줄을 몰랐다.
이러한 기분은 오후에 있는 데미안과의 검술 훈련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웬만한 일이라면 이 시간 만큼은 전부 잊어버리게 되는 알폰스 였지만 이제는 정반대였다. 검술 훈련의 장소가 되는 곳이 이 알 수 없는 기분의 원인이 되는 문제의 연무장이었기 때문이다.
장소가 같아서 그런가.
정작 헤일리 본인은 이곳에 없는데 알폰스의 머리는 계속해서 그녀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검무를 보았을 때 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날 새벽 달빛 아래에서 홀로 검무를 추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서 부터 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알폰스의 머리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머리가 이토록 어지러우니 제대로 몸이 움직일리가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알폰스의 훈련을 봐주던 데미안도 알폰스에게 생긴 이상에 대해서 눈치채고 있었다. 하루라면 몰라도 그것이 사흘을 넘어가니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지 걱정이 될 수 밖에.
결국 데미안은 알폰스에게 이에 관련해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알폰스? 혹시 무슨 일 있니?"
"네?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 아, 아무 일도 없는 걸요?!"
"....그래? 아니, 근래 들어 이전 보다 집중을 잘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고민 거리라도 생겼나 했지. 일단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만 하는 걸로 하자."
"하지만..!!"
"지금처럼 정신이 딴데 가 있는 상황에서 검을 휘두르면 다칠 수도 있어. 상념을 지우기 위해 몸을 더 움직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다만 그것도 최소한의 집중력은 남아있어야 가능한 거야."
가르치는 선생이 된 입장에서 눈 앞의 학생이 집중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것과 같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었지만 평소 언제나 성실한 태도로 훈련에 임하는 알폰스였기에 그 사실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알폰스에게는 아쉬운 말이다만 데미안의 말대로 지금 자신이 집중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알폰스는 훈련을 중단하겠다는 데미안의 말에 달리 반박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검은 잠깐 내려놓고 형과 이야기라도 할래?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형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면 도와줄게."
알폰스는 데미안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싱숭생숭한 자신의 기분을 다른 사람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 때문에 이런지 확실치도 않다.
아마 여기에 대해서 알려면 필연적으로 새벽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텐데 그렇게 되면 데미안에게 새벽 마다 몰래 단련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됨으로 말해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어째선지 다른 사람에게 새벽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 왜 그런지 알폰스 본인 조차 명확히 규정 할 수 없었지만 알폰스는 자신의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 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괘, 괜찮아요. 형님. 잠깐 혼자 명상 좀 하고 있을게요!"
"음, 그래. 알았다."
알폰스가 서둘러 이 화제를 끝내려 하자 데미안은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안고 있는 고민을 이야기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워 하는 것 같았으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지 데미안은 알폰스의 머리를 손으로 몇번 흐트려 놓고는 연무장을 떠났다.
데미안이 자리를 떠나 혼자 연무장에 남게 된 알폰스는 잠시 손에 든 검을 내려놓더니 그대로 흙바닥에 주저 앉았다.
데미안에게 했던 말이 마냥 빈말은 아니었는지 명상을 하려는 듯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는 알폰스였지만 명상으로도 집중을 할 수 없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다시 뜨였다.
눈을 감고 집중력을 올려보자니 평소보다 유난히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귀를 두드린다. 이를 다스리려고 아무리 심호흡을 해 보아도 소용이 없다. 심장 소리를 의식하는 순간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닌 그 날 새벽 연무장의 모습이었다.
마치 무대 위를 보고 있는 관객 처럼 달빛을 조명 삼아 춤을 추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알폰스는 더 이상 명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눈을 뜰 수 밖에 없었다. 그 날의 광경을 잊기 위해 하는 행동이 되려 떠오르게 만드니 말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데미안이 한번 헝클어트린 머리가 알폰스 자신의 손에 의해 더욱 어질러 진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을 전부 사용해 보아도 머릿속에서 그 날의 광경을 빼낼 수 가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알폰스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그 날 이후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알폰스가 또래 아이들 보다 어른스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지만 그렇다 해도 아직 열살도 되지 않은 꼬마 아이에 불과했다.
절대적인 경험의 양이 적으니 알지 못하는 것 또한 많다. 알폰스가 아무리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들 세상을 책이라는 하나의 수단 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알폰스의 주변에는 알폰스가 알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답을 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여럿 존재하고 있다.
방금전 데미안 만 해도 그렇고 켄, 마리아 등 자신보다 앞서 몇년이나 더 살아온 이들이 수두룩 했으니 그 중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아도 한명 쯤은 이에 관련해서 명확한 답을 내려 줄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데미안의 말을 거절했던 것 처럼 알폰스 본인이 남들에게 이 사안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를 꺼려하니 결국 스스로 그 답을 찾는 수 밖에 없다.
***
여느때와 다름없이 알폰스는 새벽에 일어나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헤일리가 새벽의 연무장을 차지한 뒤로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른 적은 없으나 그럼에도 나갈때는 언제나 목검을 챙겼다.
지금과 같은 정신머리로는 데미안이 말 했던 것 처럼 제대로 된 훈련을 하는 것은 불가능 하겠지만 알폰스가 목검을 챙기는 것은 사람이 밖을 나가는데 옷을 입는 것과 같은 의미에 것이었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 답지 않게 알폰스의 얼굴은 무언가 결심을 한 사람처럼 비장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시간 대부분을 앞으로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사용했기에 실제로 누워서 잠을 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잠을 자는 것 보다 생각하는 것에 시간을 더 쏟기는 했으나 그리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알폰스는 서랍에서 예전에 받았던 작은 조명석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었다.
마력을 불어 넣어주면 빛을 발하는 조명석은 원래는 알폰스가 마력을 오러로 치환하는 연습을 하는데 사용하는 도구였다만 알폰스는 이것을 램프 대용으로 사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이제 오러의 운용이 익숙해져 오러를 이용해 밤눈을 밝게 만들 수 있는 알폰스에게 있어 밤길을 걷는데 더 이상 램프는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여태 새벽에 몰래 나가는 데도 들키지 않는 이유도 램프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알폰스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전처럼 몰래 연무장에서 연습을 하고 나오는 것이 아닌 헤일리와의 대화였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게 되면 그녀가 놀랄지도 모르니 처음부터 조명석으로 불을 키고 헤일리에게 다가갈 생각이었다.
여태 연무장에서 그녀가 하였던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사실대로 말 하자는 것이 알폰스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미 이에 대해서 헤일리에게 말할 기회는 여러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알폰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피해 도망쳐버렸다. 그 사실을 알폰스는 이번에 침대에 누워 생각을 하는 것으로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
뭐가 되었든 그녀와 대화를 하고 나면 무언가 바뀌게 될 것이다.
"후우...가자."
알폰스는 길게 숨을 한번 내뱉고는 방문을 조심스래 열어 밖으로 나섰다. 영주성을 나와 어느정도 거리가 벌어진 것을 확인하자 조명석에 마력을 불어 넣어 빛을 만들었다. 그 빛을 손에 쥐고 알폰스는 연무장을 향해 달렸다.
한번 마음을 다잡으니 연무장으로 향하는 발은 매우 가벼웠다.
헤일리와 대화를 한다는 사실에 들뜬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가짐이 달라져서 그리 느끼는 것인지 알폰스는 둘 중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다.
연무장에 가까워지자 그 중앙에 놓인 작은 불빛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알폰스는 이를 보자마자 오늘도 헤일리가 연무장에 왔음을 확신했다. 해가 떠 있을 때만 해도 그녀를 피해다녔던 알폰스였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불빛이 보이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어?"
하지만 알폰스의 예상과는 다르게 연무장에는 불이 켜진 램프 하나가 덩그라니 놓여져 있을 뿐 어디에도 헤일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당황한 알폰스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너무 당황했던 탓일까.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무언가가 자신을 잡아채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에 그대로 몸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왁!!"
"!!!!!"
놀래키려는 의도가 다분한 목소리가 알폰스의 고막을 찔렀다.
부드럽게 자신을 끌어안은 시점에서 부터 알폰스는 자신의 뒤에 선 이가 적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이 깜짝 파티의 주최자가 누구인지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것을. 이런 장난을 칠 수 있는 이라고 한다면야 당연히 이 램프의 주인 말고 누가 더 있겠는가.
"히히!! 어때요? 깜짝 놀랐죠?"
헤일리는 자신이 품에 안은 알폰스를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알폰스가 얼마나 놀랐는지 기대하는 얼굴이다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알폰스에게서 별다른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알폰스는 멍한 얼굴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헤일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헤일리는 잔뜩 놀란 얼굴이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아이가 그저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으니 되려 당황한건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라? 작은 도련님?"
"...."
헤일리가 다시 한번 알폰스를 부르자 그제서야 알폰스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자신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자신의 머리에 느껴지는 푹신한 감각의 근원이 어딘지 알았기에 그런걸까. 아니면 헤일리와 이토록 가깝게 붙어있기에 그런걸까. 알폰스는 자신의 머리를 뜨겁게 만들고 있는 열의 원인을 특정할 수 가 없었다.
지금 알폰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잔뜩 붉게 달아올랐을 자신의 얼굴을 그녀가 보지 못했기를 빌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