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시녀와 도련님 (2)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일까.
헤일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연무장의 중심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동이 트기 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시녀로서의 업무를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어야 한다.
뜬 눈으로 밤을 새게 되면 다음날 자신의 몸상태가 어떠할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잠이 오지 않는다 한들 억지로라도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있었어야지 이리 밖으로 나와서는 안되었다.
하지만 지금 헤일리의 몸은 밖에 있다.
그리 속으로 아니된다고 말 하고 있어도 결국 지금 그녀가 있는 장소는 침실이 아닌 연무장이었다. 방에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나와서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아닌데 헤일리는 이곳에 서 있다.
무엇이 자신을 밖으로 이끌었는지는 이미 그녀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방이 갑갑해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면 굳이 침실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냥 헤일리 본인이 이 장소에 오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젯날 기사들과 마주치고 나서부터, 아니 훨씬 이전부터 그녀는 줄곧 이곳에 서기를 원했다.
단지 그 마음을 여태 참고 억눌러 왔을 뿐.
시녀가 검과 무슨 인연이 있다고 말 할 수야 있겠지만
헤일리 하트먼.
그녀는 엘레나의 시녀이기 이전에 에델바이스 공작가의 봉신 가문인 하트먼 가의 여식이었다.
현재 에델바이스의 백랑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으며 여전히 제국 최고의 기사들 중 한명에 꼽히는 빌헬름 하트먼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하트먼 가는 북부에 몇 없는 명문이라고 당당히 말 할 수 있는 무가(武家)였다.
그런 하트먼 가의 장녀인 그녀가 검과 인연이 없을 리가 있나.
글을 전부 때기도 전부터 조부와 아비에게 검을 쥐는 방법을 배운 사람이 바로 헤일리였다.
"너는 재능이 없다."
아무도 없는 연무장에서 지금 이곳에 있을리가 없는 이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리었다. 어째서 가문에 남아 기사가 되려 수행하지 않고 엘레나의 시녀가 되었냐 하는 것은 매우 흔하고 뻔한 이야기다.
기사라는 존재는 초인(超人)이다.
검 하나로 산천을 가르고 용을 떨어뜨리는 그런 전설 속 영웅들과 가장 가까운 이들. 마치 마법사와도 같이 손에 병장기를 들고 인간으로서 이룰 수 없는 이적을 행하는 존재가 바로 기사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에게 있어 자신들이 이적을 행할 수 있다는 증거와도 같은 것이 바로 오러(Aura)라 불리는 힘인데 헤일리에게는 이러한 힘을 담는데 있어 재능이 없었다.
기사의 이능은 전부 오러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쥔 검을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명검으로 탈바꿈 시켜주는 것도 오러였고 인간을 뛰어넘는 신체능력을 완성시켜 주는 것 또한 오러였다.
이 오러라는 것은 본인이 여태 쌓아올린 무예의 업(業)과도 같은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를 몸이라는 그릇에 담는데 있어 일정 수준 이상의 자질은 필요했다.
헤일리는 어렸을 적 부터 빌헬름이 펼치는 검초의 묘리를 전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오성(悟性)이 매우 뛰어났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몸이 가진 그릇의 크기는 뛰어난 지성과는 다르게 일반인보다 못한 수준의 것이었다.
계속해서 단련한다면야 익힌 무예에 있어 뛰어난 기예를 가지게 될 것은 맞았으나 그 수준이 바람과 같은 속도로 달리고 힘으로 땅을 진동시키는 기사에게 닿는 것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가 가진 체질은 기사가 되기 보다는 마법사에 적합한 체질이었다.
체내에 힘을 담아두어 이를 원동력으로 삼는 기사와는 달리 마법사라는 이들은 외부에서 힘을 움직여 그들이 만든 법칙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이적을 행하는 이들이었으니, 오러를 몸에 담지는 못해도 이를 움직일 수 있는 자질이 있는 헤일리는 충분히 마도를 걸을 만한 자격이 되었다.
이 사실을 알았기에 하트먼 가에서는 더 이상 헤일리에게 검을 잡게 하지 않았다.
마침 그들이 모시는 에델바이스 공작가는 대륙 최고의 마법명가 중 한 곳이었기에 이들은 공작가가 뛰어난 스승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헤일리를 그곳으로 보내었다.
이처럼 처음부터 그녀가 공작가의 시녀로 쓰이기 위해 보내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결정한 것은 바로 헤일리 자신이었다.
헤일리가 마도에 마음이 없었기에 원목적과는 다르게 엘레나의 시녀로서 공작가에 남는 것을 결정한 것이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녀가 엘레나의 시녀가 된 것은 결국 그녀에게 기사로서의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헤일리가 엘레나와 만나지 않고 그녀의 시녀가 되겠다고 마음 먹지 않았더라도 그녀가 계속해서 검을 놓지 않았더라면 여느 귀족가의 여식들 처럼 결국 시녀로 쓰이기 위해 보내졌을 터였다. 헤일리는 타의에 의해 결정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선택했다.
"정말 오랜만에 잡네."
수납대에서 꺼내온 검을 들어올리자 헤일리는 오래간만에 느끼는 이 감각이 어색한지 옅은 미소를 흘리었다.
에델바이스 가에서 지내며 종종 엘레나에게 마법사가 되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가 헤일리에게 건내었던 말은 그녀의 사정을 알기에 하는 말이 아닌 친구로서의 순수한 호의였지만 헤일리가 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없었다.
마도(魔道)와 무도(武道)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길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한다.
어둠에 가려져 작은 램프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만으로는 이곳이 어딘지 분간하는 것 조차 어렵지만 지금 자신이 연무장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정이 그 어느때보다 격양되어 있음이 느껴진다.
시녀로서 생활을 하며 이미 버렸던 것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은 여전히 헤일리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아니, 충분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마도에 발을 들이지 않은 시점 부터 그녀는 검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그간 체계적인 단련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손에 들린 검의 무게가 무겁게만 느껴진다. 그 무거움 만큼 덩달아 헤일리의 마음에도 돌덩이가 앉은 것 같았지만 그 무거움 이상으로 지금 검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처음에는 잠깐의 일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막상 검을 드니 세상 이렇게 진지할 때가 있어나 싶을 정도로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비록 검을 놓은지는 오래되어 몸은 이전과 비교하자면 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이 굳었으나 헤일리는 자신이 배웠던 것을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기수식을 취하고 발을 움직이자 그때부터는 마음이 가는대로 손을 움직였다.
체내에 돌고 있는 내력이 매우 적었기에 헤일리의 검은 매우 느렸지만 그 움직임에 있어 흐트러짐은 없었다.
달빛을 받은 검신이 마치 검기를 두른 것 처럼 어둠 속에서 반짝인다.
지금 이 순간만 유지되는 잠시간의 허상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헤일리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가짜라고는 하지만 달빛을 두른 검은 꼭 자신을 진짜 기사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아 이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배운 하트먼 가의 검은 본래 힘이 가득 담긴 강맹한 검이었지만 지금의 그녀가 기억 속의 검을 재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그저 본인이 펼치기 쉬운대로 검을 펼쳤다. 단순히 힘이 빠진 검이었다면 무언가 엉성해 보였을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검은 그렇지 않았다.
유려한 검로가 달빛과 함께 공간을 매꾸니 마치 주위가 밝아진듯한 착각을 일게 할 정도였다.
그렇게 한동안 달빛 아래에서 헤일리의 검무가 이어졌다.
검식의 끝을 알리는 내려베기를 끝으로 헤일리는 검을 손에서 놓았다.
"하아...하아...역시 너무 오랜만에 잡았나봐. 무거워."
아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지만 그리 말하고 있는 헤일리의 얼굴은 후련하기만 하다.
검을 놓자마자 휘두르는 동안에는 한번도 흔들리지 않던 헤일리의 몸이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단련을 하지 않은지 오래되었으니 이전과 같은 체력이 있을리가 없다. 힘을 빼서 휘두른다고 한들 무거운 쇳덩이를 들고 움직이는 것은 일개 시녀의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이제 잠은 잘 올 것 같네."
몸에 힘이 쭉 빠졌으니 이제 침대에 눕기만 하면 미련과 상관 없이 알아서 잠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다음날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힘이 빠져서 그런가. 제대로 중심을 잡고 서 있기가 힘들었다.
비틀거리는 몸 때문에 하마터면 앞으로 땅을 구를 뻔 하였으나 헤일리는 서둘러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땅에 박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앞으로 넘어갈 뻔한 몸은 검을 지지대 삼아 땅과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멈출 수 있었다.
"응?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헤일리는 연무장의 다른 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었다. 램프의 불빛이 닿지 않아 그곳에는 어둠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내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숨을 고르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
어둠 속에서 작은 소년이 몸을 움직인다.
연무장에서 멀어지려는 소년의 발은 빨랐지만 거기에 대한 발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동안 사람들 몰래 연무장으로 달려가려고 연습했던 것이 지금 빛을 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연무장에서 멀어진 것 같자 소년, 알폰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이게도 알폰스의 뒤를 쫓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후우....못 보신 거겠지?"
헤일리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알폰스는 안도하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검무를 끝내고 휘청거리며 앞으로 쓰러지려는 헤일리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원래대로 였다면 누가 연무장에 있는지만 확인하고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만 그 장소에 서 있던 인물이 너무 의외의 인물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녀가 보여주었던 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그랬던 걸까.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지켜보고 말았다.
달빛이 검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그 모습은 누가 보았어도 신비롭게 느꼈을 것이다. 달빛을 머금은 검로를 그리며 그 빛으로 허공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알폰스는 무심결에 잠옷 차림으로 달빛 아래에서 검무를 추던 헤일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뭐가 좋은지 헤실대며 검을 놀리던 그녀의 얼굴이 자꾸만 기억에 남는다.
그러자 순간 얼굴에 열이 쏠리는 것을 느꼈으나 알폰스는 그것을 자신이 달린 것에 의한 열기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