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시녀와 도련님 (1)
"으아...뜨거워라."
하늘 높이 뜬 태양이 내리쬐는 햇볕에 헤일리는 무심코 그리 중얼거렸다.
전과는 다르게 오늘의 태양빛은 왠지 더 뜨겁게 느껴진다. 1년 내내 설경을 볼 수 있는 메로힘에서 평생을 자랐기에 그런지 헤일리에게는 나날로 뜨거워져 가는 사르함의 기온이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언제나 눈이 내리는 메로힘과는 달리 사르함은 사계절이 뚜렷하다.
엘레나와 헤일리가 사르함에 온지도 어느덧 두달을 넘겼으니 슬슬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진정으로 여름이 다가오려면 아직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으나 계절이 바뀐다는 감각은 헤일리에게 있어 그리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꽤 오랜 시간 사르함에서 지내면서 완전히 이곳에 녹아들었다고 생각이 들 때 쯤이면 메로힘과는 다른 이곳의 환경이 그녀를 일깨워 준다. 매일 같이 한기 만이 가득한 곳 보다는 그래도 이 따뜻한 영주성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완전히 남부에 적응하려면 아직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헤일리는 이에 신기하다는 얼굴로 정원을 걷고 있는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괜찮으신가? 체력도 약하신 분이...."
자신은 당장이라도 그늘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건만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아가씨께서는 오늘도 어김 없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도련님과 바깥을 거닐고 있다. 방에 들어가 쉬어도 되었음에도 걱정이 되어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지만 엘레나의 모습은 마치 바깥의 거리를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 처럼 쌩쌩하기만 하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대마법사들의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은 엘레나가 더위를 탈 일이 있겠냐만은 바로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데미안도 모르는 그 사실을 헤일리가 알리가 만무하다.
"그건 그렇고 두분은 진짜 하루가 멀다하고 떨어지려고 하지 않으시네. 슬슬 날씨도 더워지는 것 같은데 두분은 덥지도 않으신가."
헤일리는 서로 가까이 붙어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 둘의 모습을 보다 저도 모르게 붉어진 제 얼굴에 손부채를 부쳤다.
그녀가 덥다고 느끼는 것은 꼭 계절이 바뀌고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약혼식 이후로 더욱 가까워진 둘의 사이에 끼어 있으니 그 둘이 풍기는 달달한 분위기에 취하다 보면 얼굴이 뜨거워지기 십상이었다.
헤일리는 엘레나의 시녀이기도 하였지만 아직 사춘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어린 소녀이기도 하였다.
엘레나를 보좌하기 위해 행정업무나 교양과 같은 시녀로서 필요한 모든 덕목을 어린 나이에 통달한 그녀였지만 그렇기에 경험이 없음에도 헤일리는 지식으로나마 남녀 사이의 일에 빠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종종 둘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모습들을 보다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멋대로 상황을 진행시켜 종종 상상으로나마 선을 넘는 모습이 그려질 때가 있다. 그러니 절로 헤일리의 머리에 열이 오를 수 밖에.
결국 지금 헤일리가 느끼고 있는 더위는 그녀 본인의 업보였다.
둘의 모습을 몇분간 지켜보다 헤일리는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너무 곁에서 지켜만 보고 있는 것도 제아무리 시녀라 한들 그것은 주인을 감시하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 헤일리는 잠시 자리를 물리기로 하였다. 미리 성으로 돌아가 더위를 식힐 냉수라도 한 잔 준비해두는 쪽이 더 본분에 어울리는 일일 것이다.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아직까지는 고작 입맞춤 만으로도 하루 종일 얼굴을 붉히고 있는 두 사람에게 있어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에는 이르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러니 헤일리는 단 둘이 남겨져도 별 일이 없을 것이라 안심하고는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차갑게 마실 수 있는 음료라~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딸기가 제철이라고 주방에 딸기를 들여온 것을 봤던 것 같은데 딸기 쉐이크라도 준비할까나. 도련님은 얼음을 띄운 커피면 충분하시겠지?"
엘레나의 하루 일과를 꿰고 있다 보니 두 사람이 건물 안으로 돌아와 티타임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걸 아는 것은 헤일리에게 있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원래는 하인을 시켜 준비해도 될 일이었지만 오랜 시간 엘레나의 수발을 들어왔기 때문인가. 헤일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쉐이크~ 쉐이크~ 달달하고 새콤한 딸기쉐이크~"
헤일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이 있는 본관으로 향했다.
기본적으로 티타임에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은 각 별관마다 구비되어 있었지만 이번에 준비 할 것은 재료도 그렇고 주방의 이용이 필요했다.
딸기쉐이크를 연호하며 잔뜩 상기된 헤일리의 얼굴은 엘레나를 위해 쉐이크를 준비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먹기 위해서 쉐이크를 준비하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평소였다면 거리가 너무 멀다고 투덜거리며 길을 걸었을 그녀였지만 딸기쉐이크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헤일리는 주방을 향해 걷는 동안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한스 아저씨! 딸기쉐이크 두 잔에 옅은 커피에 얼음 올려서 한잔 주세요!"
"이 녀석아. 네가 주방에 들어왔으면 네가 직접 만들어서 준비해야지 나 보고 만들어 달라고 하면 어떻하냐? 다 만들 수 있는 녀석이 왜 그런 부탁을 해?"
헤일리는 주방 문을 열자마자 매우 자연스럽게 자신의 몫까지 한스에게 부탁을 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듯 한스는 헤일리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답을 해주었다.
"하지만 이실리아 관에서 여기까지 뛰어오느랴 지쳐 버린걸요. 다시 또 이실리아 관까지 걸어가야 하니 그 정도는 만들어 주세요오오~"
"알았다. 알았어. 그런데 조금 기다려야 할거다. 선객이 먼저 있거든."
늘어지는 목소리로 부탁을 하는 헤일리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하며 주방 창가를 손으로 가리키는 한스.
그곳으로 눈을 돌려보니 훈련을 방금 마친 것인지 땀에 잔뜩 절여져 있는 기사단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한스가 말한 선객이란 저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시 주방을 둘러보니 조리대 위에 올려진 컵들에는 얼음 조각과 함께 딸기가 여러 개 들어 있었다. 딸기가 제철인 것이 영향이 컸는지 지금 한스가 저들에게 만들어 줄려고 한 것도 딸기쉐이크였다.
"아앗. 물론이죠. 천천히 준비해 주셔도 돼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이들이 손을 올려 자신들이 여기에 있음을 알린다. 대체 얼마나 굴러댔으면 초인이라 불리우는 이들의 팔이 이처럼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는 것일까.
기사단 정복 여기저기에 묻은 흙들과 땀에 젖은 그들의 모습만이 이들이 하였던 훈련의 고됨을 상상케 해준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무언가 생각이 난 걸까?
헤일리는 만신창이가 된 이들의 모습을 보고 어울리지 않게 약간의 부러움이 담긴 눈으로 그들을 보더니 이내 한스를 도와 기사단원들에게 줄 음료를 만드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처음 주방에 왔을 때 한스에게 만들어 달라고 반쯤 때를 쓰던 그녀의 모습과는 다르게 한스를 도와 단원들에게 줄 음료를 만드는 헤일리의 움직임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자, 여기 주문하신 딸기쉐이크 나왔습니다!"
카페의 종업원 흉내를 내며 단원들에게 쉐이크를 건내는 헤일리. 창 너머로 컵을 건내 받은 단원들은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기사들이 음료를 전부 마시고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헤일리는 비로소 주방을 나설 수가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다시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을 어딘가 미련이 담긴 눈으로 쫓으며 그녀는 다시 이실리아 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영주성의 불빛을 켜는 사용인들도 일어나기 이전의 시각에 알폰스는 침대에서 눈을 떳다.
"흐아아아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한번 하고는 알폰스는 팔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폈다. 이미 여러번 이 시간에 일어났던 사람처럼 알폰스의 아침 준비는 매우 능숙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은 아직 하늘에 떠있는 별과 달이 내려주는 미미한 빛이 전부이다. 빛으로 사람을 깨우기에는 아직 그 광량이 너무나도 약했다.
저택을 시끄럽게 만들까봐 알람을 준비하지 않았음에도 알폰스가 스스로 이 시간에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일찍 일어나기 위한 그만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알폰스가 일부러 자신의 수면 시간까지 줄여가며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형과 같이 키가 크고 싶은 알폰스로서는 가장 중요히 여기는 것이 우유를 마시는 것과 더불어 적절한 수면시간을 가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단지 이전보다 일찍 침대에 눕고 낮잠 시간을 조절하는 것으로 자신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을 조절했다.
알폰스가 이처럼 새벽에 일어나게 되는 것은 형, 데미안의 일과에 변화가 생기고 나서였다.
원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 훈련을 하는 데미안이었지만 여러 사건 이후 일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데미안의 새벽 훈련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잠이 부족함에도 억지로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 것은 병을 만드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 옳은 선택이다.
대신 기사단과의 합동 훈련량이 늘리는 것으로 이를 벌충했는데, 때문에 알폰스는 늘어난 훈련량 때문에 연무장에서 들어누워 곡소리를 내는 기사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아무튼 이것이 알폰스가 몰래 새벽에 일어나게 된 원인이었다.
형이 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연습했다가 나중에 일취월장으로 늘어난 자신의 실력으로 형을 놀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데미안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단련을 해야 한다.
하지만 단련 시간에는 언제나 형이 곁에 있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마리아가 절대로 검을 들지도 휘두르지도 못하게 하니 이처럼 새벽에 몰래 나가 연습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검은빛을 내는 흑단(黑檀)으로 만든 목검을 챙겨 들고는 알폰스는 방 밖으로 나섰다.
처음에는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복도를 걸었지만 이제는 요령이 생겼는지 언제부턴가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을 수 있게 되어 알폰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놀리며 재빠르게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히히. 이번에도 성공이다!"
오는 길에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점에 다시한번 자신감을 채우며 알폰스는 조용히 웃었다.
"불빛?!!"
하지만 그러한 기쁨도 잠시. 연무장에 가까워지자 눈에 들어오는 불빛에 알폰스는 서둘러 건물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암행에 성공했다고 자신만만했던 알폰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린다.
일찍히 단련을 나온 기사단원이라고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게 아니라 저곳에 있는 사람이 데미안이라면 이미 옛적에 알폰스의 비밀 수련이 들켰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알폰스는 기척을 죽이고 빛이 보이는 근원지를 향해 조심스레 걸어갔다.
이미 들킨거라면야 지금 처럼 기척을 숨기는 행위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 또한 충분히 있었다. 빛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연무장에 누가 있는 것인지 그 윤곽이 서서히 잡혀가기 시작했다.
"어?"
램프 빛에 비춰지는 것은 옅은 아쿠아마린 빛의 머리카락이 눈에 보인다.
알폰스는 검은색이 아닌 머리빛에 곧바로 안도의 숨의 내쉬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빛이 연무장에 있는 수수께끼의 인물을 완전히 비추자 그 정체에 알폰스는 입을 떡하니 벌리었다.
"헤일리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