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외전] 오르커스
기사학부 중앙 정원.
아카데미를 둘로 양분하는 기사학부의 중심에 있는 곳이기에 당연하게도 유동인구가 매우 많은 곳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사학부 학생들이 전공 과목에 알맞게 활기가 넘치는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통행이 자유로워지는 점심시간만 되면 이곳이 소란스러워 지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었다.
마법이나 다른 학문들과는 다르게 이곳에서 자신의 우수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직접 몸을 부딪쳐야 한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쟁 심리의 표출은 기사학부에서는 서로 검을 맞대는 것으로 나타나니 아카데미의 여타 다른 학부들보다 시끄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흔히는 아니었지만 정원에서 결투가 일어나는 일도 아주 없지는 않았으니.
다만 지금은 이러한 것들과는 다른 이유에서 학생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평소와 비교하자면 오히려 조용한 편에 속한달까. 여기에 모인 모두가 어느 한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여기는 언제봐도 떠들석 하구만."
오르커스는 정원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 기사학부 학생들을 눈에 담으며 그리 말했다.
평소보다 조용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 까지나 기사학부를 기준으로 한 말이었다. 마법학부 소속인 오르커스가 보기에 이곳은 언제 보아도 시끌벅적한 곳이었다.
오르커스는 이들을 구경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심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는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평생을 이보다 배는 시끄러운 혈육과 같이 지내온 탓일까.
그는 귀를 가득 채우는 소음 속에서 눈을 감고 있으니 오히려 잠에 들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 불러 놓고 여기서 속 편하게 잠이나 자고 있습니까? 그보다 이렇게 주변이 시끄러운데 잠을 잘 수 있다는게 신기하네."
"노엘과 17년을 함께 살아보게나. 데미안. 이런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오르커스는 눈을 떴다.
신분에서 나오는 격차 때문인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리감으로 무장한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를 깨운 목소리는 언행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바라보니 오르커스가 생각했던 대로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년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전설 속 용을 닮은 소년의 눈동자는 시선이 닿는 것 만 해도 베일 것 같이 날카로웠지만 그 눈에 담긴 감정은 그와 정 반대의 것이었다.
"무얼 그리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가. 혹시 이 앞에 약속이라도 잡아두었나?"
"그, 비슷하죠. 그러니 되도록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빠르게 끝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르커스는 데미안의 말에 오묘한 미소를 짓더니 주변을 한번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군.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
오르커스는 데미안을 옆에 두고 그의 존재에 대해서 찬찬히 생각을 다시 해 보았다. 이미 여러번 해보았던 행동이라 결과는 언제나 이전과 똑같이 나올테지만 검증을 좋아하는 오르커스에게 있어 이는 일종의 습관과 같은 것이었다.
자신과 가까운 인물일수록 더 세세히 뜯어보고 깊게 생각한다.
남을 쉽게 믿을 수 없는 자리에 있는 그였으니 자신의 앞에 선 이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지 판단하는 것은 오르커스에게 있어 사람이 숨을 쉬는 것과 같은 이치의 행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그의 옆에 서 있는 데미안 크라우스라는 남자는 그때마다 평가 결과가 달라지는 오르커스의 계속되는 검증에서도 거의 유일하다시피 가족 다음의 위치에 서있는 인물이었다.
세간에서 부르는 표현으로는 절친.
오르커스는 데미안과 자신의 관계를 그리 확정지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지.'
이미 몇번이고 확인했음에도 오르커스는 검증을 계속했다.
사실 그다지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지금부터 꺼낼 이야기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이 대화를 통해서 데미안과의 관계는 다시금 변화를 맞이 할 것이고 이것은 비단 오르커스 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도 썼나. 이곳만 유독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데."
"이러니 기사들이란. 이 세상에는 마법이라는 것도 있음을 조금 생각해주었으면 하는데. 간단한 인식 비틀기 결계라네. 이 장소의 존재감을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 만큼으로 바꿔주는 결계지. 돌맹이 하나에게도 신경 쓸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한 왠만해서는 이곳에 사람이 오지는 않을껄."
"별 해괴한 결계가 다 있네. 그런 건 또 언제 설치 한 거람."
보는 눈이 없어지자 데미안의 입에서 더 이상의 경어는 나오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가 사용하는 경어는 약간 구색 맞춰 주기 식의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러든 말든 오르커스는 이처럼 경어를 사용하지 않는 쪽을 더 선호했다. 사석에서도 경어를 사용하는 것은 거리감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그 나름대로 자신을 높여 부르는 이를 편히 대하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까지 할 정도면 상당히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바로 요점만 말해 줄 수 있나?"
"무얼 그렇게 조급해 하고 있어. 차기 황제인 이 몸과 정국을 논하는 것 보다 우선시 될 수 있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차피 지금 이 자리를 떠나봐야 네가 하는 건 엘레나 공녀와 별 의미 없이 시간을 때울 뿐 아닌가. 내 말이 틀려?"
"....너?"
정곡을 찔린 건지 데미안의 눈이 휘둥그레 떠진다.
이런 데미안의 모습에 오르커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반응만 보았다가는 무슨 둘 이 밀회라도 나눈 줄 알았을 테지만 오르커스는 엘레나와 데미안이 만나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저 속으로 웃기만 하였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두 사람이라고 해도 아카데미, 황도에 있는 이상 둘의 행적은 오르커스의 귀에 들어가기 마련이다.
당장 이 아카데미에 깔린 눈과 귀만 해도 수백이 넘었으니 대체로 어느 시간대에 둘 이 어디로 향하는지, 또 무엇을 하는지 자세히는 아니어도 대강 알아내는 것은 그에게 있어 식은 죽 먹기였다.
오르커스는 처음으로 보는 친구의 당황한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으면서도 저리 반응을 하는 것을 보니 데미안이 엘레나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약간의 죄책감이 들기는 했으나 오르커스는 끝내 마음을 접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꺼낼 말이 결국에는 데미안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여동생과 자신도 만족하면서 그 역시 행복 질 수 있는 선택은 이것 밖에 없다.
"이 참에 제대로 한 번 물어보도록 하지. 엘레나 공녀와 무슨 사이인가? 다시 재결합이라도 하기로 했나?"
"그걸 왜 네가 궁금해하는지 이해가 안가는데...공녀에게 마음이라도 있는 거냐."
"그렇다면?"
뻔뻔스런 얼굴로 답하자 순간 데미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는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오르커스도 장난스러운 기색을 지우고 이전에 황성에 있을 때 대신들을 상대했을 때와 같은 차가운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거짓말 하지 말고 제대로 된 이유나 말해."
"이유야 많지. 만약 너와 엘레나 공녀가 이어지게 된다면 그건 곧 크라우스와 에델바이스의 문제로 이어지니 말이야. 차기 황제로서 권력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라고. 뭐, 그것 말고 다른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내 주변의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나. 아, 모르는 척 시치미 떼지는 마. 너도 눈치가 있다면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테니 말이야."
오르커스의 말에 데미안은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를 강제로 마주하게 된 사람처럼 그의 얼굴에는 온갖 감정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미안의 입이 다시 열리었다.
"그래서 지금 내게 듣고 싶은 말이 뭐야. 지금 여기서 노엘에 대해 확답이라도 내리라는 건가?"
"그건 당사자들 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지. 내가 끼어들 문제는 아닌것 같고. 나는 그저 지금 너와 엘레나 공녀와의 관계가 궁금할 뿐이야. 음...둘 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면야 뭐 어쩌겠어. 내가 헤어지라고 해야 하나?"
"그럴 줄 알았는데. 아까 권력이 어쩌고 라고 말하지 않았나."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지. 이런 사적인 일에 가족도 아니고 완전히 제삼자가 개입하기에는 명분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은가. 이 일로 황권이 흔들릴 것 같다고 해도 그것은 황실의 문제이지 크라우스와 에델바이스의 문제가 아니야."
자신은 둘 사이의 문제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리 해야만 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저 순수하게 궁금할 뿐이야. 주변 사람들의 관계도로 머리 아파지는 것은 황실 가계도만 해도 충분하거든."
마치 둘의 사이를 응원하는 것 처럼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어서 답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말임에도 데미안이 느끼기에는 서둘러 답을 해달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오르커스는 지금의 데미안이 어찌 답할지 이미 반쯤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오르커스가 데미안과 자신이 절친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만큼 그가 데미안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데미안은 자신과 엘레나가 이어질 수 없다는 일종의 강박에 가까운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그런한 관념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오르커스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지금 상황에서 데미안이 가지고 있는 강박관념이 그가 듣고 싶어하는 답을 듣게 해줄 것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엘레나와 데미안의 재결합이라.
시간이 조금 더 흐르게 된다면 가능성이야 충분히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었다.
확실히 지금 엘레나와 데미안의 사이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던 입학 초기 때와는 다르게 봄바람이 부는 것 같았으니, 이대로 시간만 흐른다면야 데미안이 가지고 있는 관념은 절로 깨지게 될 것이고 둘의 사이는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끝맺음을 지어야 한다.
둘의 사이가 여기서 더 가까워지기 전에.
머리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는지 완전히 가라앉은 얼굴을 한 데미안이 오르커스를 보고는 천천히 그의 질문에 답을 하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 재결합 같은 걸 한 건 아니야. 그냥 나와 그녀에게 공통된 취미가 생겼고 그것 때문에 이전 보다 조금 가까워진 것 뿐이지."
"호? 그 취미라는 건? 아니다. 이건 굳이 답 해주지 않아도 돼."
어차피 제대로 된 답은 들을 수 없을 테니까.
둘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지금은 이렇게 답을 들은 것만해도 충분했다. 여기서 쐐기를 박아 운을 띄우기만 한다면 그 이후부터는 노엘의 몫이다. 때마침 결계에 걸려드는 마력반응에 오르커스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자네는 엘레나 공녀. 그녀와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지?"
둘을 향해 다급히 달려오고 있던 마력반응이 오르커스의 말 한마디에 발을 멈췄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저 정도 거리라면 충분히 데미안의 얼굴이 어떤지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녀가 결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부터 결계를 역으로 펼쳐두니 데미안은 그녀의 기척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 했다. 때문에 데미안은 오르커스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대화를 들은 엘레나의 심정이 어떠할까. 적어도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까지 오르커스가 신경 써야 할 의리는 없었다. 오히려 이대로 상실감을 안고 떨어지면 그건 그것대로 그에게 있어 좋은 결과였다.
"그렇다면 데미안. 방금 그런 질문을 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노엘과 약혼을 하는 건 어떻겠는가?"
연적이야 알아서 떨어져 나가 주면 좋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