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막간
"이걸로...동부와 서부는 마무리 된 것 같군. 수고 많았다. 오르커스."
"네. 아버지."
햇볕이 잘 드는 방.
푸근한 얼굴을 한 남자가 자신과 닮은 소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의 책상 위에는 아직 지우지 못한 지난 날의 격렬한 격무의 흔적이 남아있다. 분명 방 안에는 햇빛에 의해 스며든 온기가 가득한데 정작 남자가 앉아있는 곳을 냉랭하기만 하다.
반듯하게 정리된 서류더미가 책상에 비춰지는 햇빛 마저 가릴 정도로 쌓여있으니 이는 가히 서류의 산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방의 상태가 이렇다 보니 그 중심에 앉아 있는 남자의 안색이야 말할 것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푸근한 미소와 함께 힘이 넘치는 눈동자가 빛을 내고 있었지만 자세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 잔뜩 충혈된 눈과 피로에 절여져 축쳐진 눈가가 보인다.
아무리 성내 관료들이 한번 걸러내었다고는 하지만 제국령 전체에서 몰려드는 업무를 혼자 처리하고 있는데 몸뚱아리가 멀쩡할리가 있나.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그에 못지 않는 능력을 가진 소년이 옆에서 계속 보좌해왔기에 그가 피로에 지쳐 쓰러지기 전 업무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황금으로 치장된 금빛 옥좌에 앉아 인세(人世)를 초탈한 얼굴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제국에 단 한명 밖에 없는 황제의 민낯이었다.
왕관을 쓰려는자 그 무게를 견뎌라.
그 격언에서 나온대로 이것이 그가 가진 권력의 무게였다.
제국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황권을 구축해낸 아슬란 에스텔리아가 폭군이 아닌 현왕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황실의 모든 결정을 자신의 손으로 끝맺음에도 일의 마무리에 결점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국의 정국을 제 한 머리 안에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였고, 그렇기에 자신의 능력을 아끼지 않고 홀로 정국을 안정시켜 절대적인 권력을 취했다. 물론 그렇다 보니 자연스래 업무량이 늘어나게 되었지만 날 때 부터 인간을 뛰어넘은 초인의 반열에 든 그에게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이었다.
신의 피가 섞인 황족의 몸과 정신은 명백히 평범한 인간의 것을 뛰어넘고 있으니.
단순 업무의 처리라면 황가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는 이들에게는 전혀 감당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지금 아슬란이 저런 모습이 되어버린 건 그와 별개로 심력(心力)이 많이 소비된 것이 컸다. 천하제일의 권력자도 결국 아버지였다. 자식이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죽을 뻔 했다는 사실이 그의 정신을 갉아 먹고 있었다.
"확실히 성전(聖戰)의 승리로 다들 많이 안일해져 있었나 봅니다. 한번 털 때 마다 가을 철 추수하는 것 마냥 꽤 적지 않은 인원이 잡혀들어오는 군요. 지난 성전에서 어떻게 숙청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는지 궁금할 정도 입니다."
"내 불찰이다. 황도의 병력을 차출한이 있어도 놈들을 척살했어야 했는데.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제국에 이리 많은 기생충들이 남아있을 줄은 몰랐구나."
아슬란은 오르커스의 말에 자조하듯 말했다.
"만약 그러했으면 황도가 함락 되었을지도 모를일이었으니 옳으신 선택이었습니다."
오르커스가 변호하자 아슬란은 아들의 말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싱긋 미소를 지어올렸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옆에서 자신을 묵묵히 돕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미안했다.
아슬란은 잠시 우수에 젖은 얼굴로 오르커스를 바라보다 짧게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검성(劍聖)이 은거를 깨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는 구나. 아무래도 녀석들과 직접 연결된 일이다 보니 두고만 볼 수는 없었던 모양이지. 뭐, 동부에는 남부에서와 같이 거물들은 없었던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검성이 다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겠지."
"검성은 가주직에서 물러난지 오래되었으니 황도로 불러내어 이곳을 지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들어온 이야기의 검성과 정말 그가 같은 인물이라면 황명을 거역하지는 않겠지요."
"네 말이 옳다. 뭐가 되었든 그 놈들의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들일 테니 말이다. 이참에 황도의 방비를 굳건히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미 크로멜 공작가에는 서신을 보내두었다."
오르커스를 바라보고 있는 아슬란의 눈은 아버지의 눈에서 다시 황제의 것으로 변모해 있었다. 푸르게 빛을 내는 눈동자는 사람의 것이 아닌 구름 한 점 없는 창궁(蒼穹)과 같았다. 마치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것 처럼 아슬란은 오르커스에게 검성이 어째서 밖으로 나왔는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사실 검성이 저리 밖으로 나온 이유는 별거 없다. 이번 일로 크라우스에 전공이 집중되었으니 그것이 맘에 들지 않아 밖으로 나온 것이다."
"같은 삼대무가에 속한다 들었지만 크라우스와 크로멜이 사이가 좋지 않은가 보군요."
"정확히는 검성과 크라우스 백작 그 둘이 사이가 나쁘다. 검성의 아들인 크로멜 공작과는 사이가 좋은 편이야. 둘이 같은 소드 마스터라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다만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더군. 옛날부터 둘이 자주 부딪쳤다. 잘 생각해보니 소드 마스터는 문제가 아닌 것 같구나. 아서가 마스터가 되기 전부터 투닥 거렸으니 그냥 둘이 잘 안 맞는 모양이다."
옛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지 아슬란의 눈가에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는 작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현재 호사가들 사이에서 이름이 올라오는 무가(武家)의 인재들이라고 한다면 누가 있는지 아느냐?"
"기사학부의 차석과 수석을 유지하고 있는 남부의 그레이엄 자작가의 장녀와 그녀와 동문인 기사단장의 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로멜 공작가의 대공자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다. 그런데 이번 일로 두명이 더 추가되었지."
"노엘과 데미안이군요."
"그래."
아슬란의 말에 오르커스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설마?"
"여태까지는 삼대무가의 자제들 중 크라우스의 이름은 들어있지 않았지.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그 아이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것도 젊은 나이에 이교의 추기경을 죽인 인재로 말이다."
아카데미에서 꾸준히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온 인재들과 젊은 나이에 가문의 어른들과 함께 제국을 침략하는 이민족들을 무찔러 자신의 무명을 알려온 대공자.
가히 제국에 새로히 떠오르는 신성이라 불리우기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기는 하지만 그런 그들의 위명을 단숨에 누를 수 있는 것이 이교의 추기경을 죽였다는 사실이었다.
성전을 겪은 이들은 알고 있다. 이교에서 추기경이라는 직책을 받은 이들이 어느 정도의 강자인지. 신성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황실이 버티고 있음에도 이교가 오랜 시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실력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추기경들이란 그런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아카데미에 들어가지도 않은 햇병아리 셋이서 추기경을 잡아 죽였다는 사실은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천재들의 등장을 알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아마 검성은 크라우스가 세운 전공보다는 자신의 손주가 아서의 아들 때문에 평가절하 받고 있는 것을 더 신경 쓸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아이를 직접 본 너에게 묻고 싶구나. 오르커스. 크라우스 백작의 아들은 어떤 녀석이었냐?"
"인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는 실력을 말하시는 겁니까."
"아무거나. 네가 확신하고 답할 수 있는 것이면 되었다."
아슬란의 말에 오르커스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곧장 답을 내었다.
"제가...친구로 삼은 녀석입니다. 이거면 답이 되셨습니까?"
"허."
오르커스에 대답에 아슬란 순간 공기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 그래! 네가 친구를 허투루 사귈리가 없지. 그거면 되었다."
평소에 나지막히 웃어보이는 것은 보여주었어도 이리 박장대소를 하는 것은 처음보았기에 그런걸까. 오르커스는 방이 떠나가라 웃는 아슬란의 모습에 머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제가 검에 조예가 없으니 함부로 녀석의 실력을 재단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여태 황궁에서 보았던 그 어떤 기사에게도 뒤쳐지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인품에 대해서는 야욕이 없다고 해야할까 무언가 딱히 바라는 것 없이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성격입니다. 제가 선을 넘지 않는 이상 그 역시 선을 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주 제 아비를 똑 닮았다는 소리구나. 네가 말한 데미안이라는 아이의 첫인상과 내가 크라우스 백작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 같다. 이번 대에도 크라우스는 제국의 든든한 검이자 방패가 될 것이다."
아슬란은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서류들을 하나 둘 씩 밑으로 내리며 자리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서랍에서 황가의 인장으로 봉인되어 있는 낡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올려놓았다. 저 두루마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지 오르커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그래 '신언 서약서'다. 우리 주신(主神) 알테어의 이름 아래에 쓰여지는 기아스지. 이건 너희들이 태어나기 전 크라우스 백작, 에델바이스 공작과 쓴 서약이다. 내용은 뭐, 둘의 자식들간의 약혼 이후에 합심해서 황실의 권위를 위협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적혀 있지."
신언 서약서.
온갖 보물들을 가지고 있는 황실에서 그 수가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신물로. 이름 그대로 신의 이름 아래에 계약을 이행하게 해주는 보물이었다. 오르커스는 이걸 왜 이제서야 보여주냐는 얼굴로 아슬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 때문에 처음 저를 보내실 때 그렇게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래. 이미 대안이 있었으니 말이다. 너도 잘 알다 싶이 여기에 쓰여진 것은 절대로 어길 수 없다. 그때는 단순히 술자리에서 얼떨 결에 나온 이야기였지만 이용할만하다 싶어 적어두었지."
"그러다 두 집안 다 아들만 낳거나 딸만 낳았으면 어쩌시려고. 하마터면 애꿎은 보물 하나만 낭비할 뻔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나도 술에 취해서 말이다. 음, 조금 즉흥적이었다고 해야할까."
술에 취한 인간 치고는 곧바로 서약서를 준비해서 꺼내둔 것이 참으로 정신나간 준비성이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오르커스의 눈에 아슬란은 웃으며 이리 답했다.
"그리고 만약 서약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내가 아들 딸 둘 다 낳아 대신 약혼 시키려고 생각했었다."
"어머니가 들으셨으면 경을 치실 이야기군요."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하려무나."
열어둔 창문을 통해 바람이 불어와 책상 위의 먼지를 쓸어넘겼다. 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더니 분위기가 어느정도 환기가 된 것 같자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말을 시작한 것은 아슬란이었다.
"처음 너를 남부로 보내었을 때 나는 네가 돌아와서 나에게 노엘과 크라우스 소백작을 약혼시키자고 말 할 줄 알았다."
"음...."
"그런 얼굴 지을 필요 없다. 너는 나와 아주 판박이니 나도 너였다면 그리 생각했을 거다. 노엘의 취향이야 소백작에 대해서는 꽤 오래전 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니 네가 그런 얼굴을 지을 정도였다면 내가 생각했던 대로가 맞았겠구나."
"뭐...그렇지요. 그건 그렇고. 친구를 사귀고 오라 하셨으면서 제가 그리 말할 거라 생각하고 계셨던 겁니까?"
"부정은 않겠다. 사람이라는게 그리 단기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니. 결국 너는 돌아와서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 너가 이긴 셈이구나. 축하한다."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오르커스의 날 서린 말을 아슬란은 그냥 웃어 넘겼다.
"그래도 너에게 친구가 생겼으면 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사실 권력자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는 너의 선택이 맞는 것이다. 노엘과 소백작을 이어주어 황실과 지방의 연결을 공고히 하는 것. 틀린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아슬란은 꺼내 들었던 두루마리를 다시 서랍 안으로 집어 넣고는 다시 오르커스와 눈을 마주했다. 그윽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아슬란의 모습에 오르커스는 괜시리 멎쩍어 하며 볼을 긁적였다.
"다만 너가 나에게 그리 권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다른 눈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 아들에게 친구가 생겼다니 이 아비는 기쁘구나."
".....일도 끝난 것 같으니 이 아들은 나가 보겠습니다."
"녀석. 부끄러워 하는 게냐?"
"그게 아니라 할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오르커스의 대답에 아슬란은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오르커스의 일이라고 하면 방금전 자신과 이곳에서 마무리를 지었으니 그에게 남아있는 일정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슬란의 시선에 오르커스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빠르게 말을 이어 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친구가 약혼식을 올렸다고 하니 축하 편지 한 통 정도는 직접 써서 보내야겠지요."
이후 문이 닫힌 방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