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샛별 (39)
일찍히 피었던 봄의 꽃들이 꽃잎을 온전히 땅에 내려 놓기 전, 일전에 그녀와 약속했던 대로 나와 엘레나의 약혼식이 진행되었다.
약혼식이라는 이름이 붙기는 했어도 그리 거창한 행사는 아니었다.
혼례를 올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약식 의례에 불과한 행사였으니. 오늘 진행되었던 약혼식의 의미는 축하의 의미보다는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진 나와 엘레나의 약혼관계를 양가에서 공식적으로 문서화하는 절차였다.
그래서 그런지 약혼식의 규모는 매우 작았다.
나와 엘레나의 의사가 반영되기는 하였지만 연회 때 처럼 다른 가문의 인사를 불러 모으지도 않았고 그저 양가 사람들끼리 모여 조용히 진행되었다. 얼마전에 큰일이 있기도 하였고 그로 인해 괜한 벌레가 꼬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번잡하지도 않았고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연달아 사람들 앞에 서는 일도 여간 일이 아니었으니, 이 기분 좋은 날 괜히 기분을 꿀꿀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 까지 소식이 전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와 엘레나의 약혼에 대해 물어보면 다들 적당히 언제 쯤에 할 것 같다고 말을 흘리기는 했을 테니.
듣자하니 엘레나에게 노엘이 약혼식에 오고 싶다고 하는 편지가 왔었다는데, 예상했던 대로 그녀와 오르커스는 약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황족에 대한 보호가 강화된 지금 황도 밖으로 나가겠다는 말을 허락해줄 황제가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시간이 좀 지나면 오르커스에게 약혼식에 가지 못해 미안했다는 편지가 오지 않을 가 싶다.
약혼식은 엘레나가 과거 내게 이야기했던 대로 이실리아 관 앞의 화원에서 열리었다.
화원에는 간단히 식사를 할 수 있는 티테이블이 구비된 장소가 있었는데 그곳이 이번 식의 개회 장소로 뽑히었다. 참가하는 인원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리를 정리하고 음식을 가져다 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약혼식의 전체적인 모습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가족 다같이 나갔던 나들이와 많은 모습이 닮아 있었다. 조용히 주변 풍경이나 둘러보며 시답지 않은 잡담이나 떠는 것. 제국의 정세를 바꾸는데 있어 시발점이 될지도 모르는 이 곳의 모습은 가볍고 평안했다.
알폰스는 따스한 봄볕에 잠을 참을 수 없었는지 눈을 반 쯤 감은 채 연신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고 아버지와 요하임은 서로 맞은 편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전혀 약혼식 같지 않은 봄날의 나들이와 같은 이 모습이 나는 보기 좋았다.
"약식이기는 하다만 이런 건 메로힘에서 했었으면 좋았을 것을."
"무슨 그런 소리를. 볼 거라고는 눈 밖에 없는 곳보다는 이곳에서 지내게 하는게 더 낫지. 새아기도 식은 꽃이 잔뜩 핀 곳에서 열었으면 좋겠다고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네 녀석이 마법으로 만들어 낼 설화(雪花)가 전부 잖냐."
"....일절 만 해라."
아버지의 말을 피해 요하임은 내게로 눈을 돌렸다.
서릿발 같은 요하임의 눈빛에 나는 슬그머니 엘레나의 곁으로 몸을 더 붙였다. 어째 아버지의 입방정에 의한 피해는 내가 받게 되는 것일까.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거늘, 억울하다.
하지만 이내 그 모든 것이 장난이었다는 듯 요하임은 옅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우리를 둘러싼 주위의 풍경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버지의 말에 긍정하듯 입을 열었다.
"확실히 남부가 아름답기는 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어보이는 요하임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어째서 이곳을 바라보고 기분이 풀렸는지를 이해할 수 가 있었다.
요하임의 눈이 향한 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엘레나가 있었는데 처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엘레나는 아버지와 요하임의 대화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하늘과 맞닿아 있는 화원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멍한 얼굴로 있는 그녀였지만 오늘 하루 내내 그녀의 입가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미소를 보니 지금 그녀가 어떠한 기분인지 짐작이 가능했다.
아마 요하임의 얼어버린 얼굴을 녹인 것은 이런 엘레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누가 팔불풀 아니랄까봐 엘레나가 기뻐하니 그것으로 만족하신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하임은 완전히 정원의 분위기에 녹아들었고 아버지와의 잡담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슬그머니 지켜보고 있으니 엘레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무얼 그렇게 즐겁게 보고 계세요."
"그냥. 아버지와 아버님이 너무 웃기셔서요. 엘레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내가 투닥거리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아버지와 요하임을 가리켰다. 서로를 골리면서 놀고 있는 두 가문의 수장들의 모습은 전혀 한지역의 군주라고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가족된 입장에서 딱딱한 꼰대 어르신들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말에 엘레나는 이를 한마디로 일축했다.
"어린 아이 같으신거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 말에 나도 엘레나도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웃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째선지 나는 처음 엘레나와 이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가 생각났다.
나와 그녀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지금의 자리와 엘레나에게 파혼을 제안했던 그날의 상황은 완전히 정반대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이런 순간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까.
내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지금의 상황에, 단순히 내 앞에서 울고 있던 여자아이를 달래기 위해 거두었던 말의 결과가 이리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엘레나가 진정으로 원하는 이가 나타난다면 그때 놓아주면 되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 속에서 진행된 이야기의 결과가 이렇게 나타났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나는 그녀를 놓아주기 싫어졌고 초반에 퇴장하는 삼류 악역의 역할에서 감히 남자 주인공을 꿈꿨다. 원작과 너무 많은 것이 바뀌어 앞으로 일이 어찌 진행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내가 품고 있는 마음이 바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게 변화가 일어난 만큼 엘레나 역시 무언가 바뀐걸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처음 만났던 그 날 부터 지금까지 나를 매우 좋아하는 한 소녀가 눈에 보일 뿐이다. 그녀에게 변화란 나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것이 전부일테다.
그것이 엘레나가 원하던 것이기도 하였고.
아마, 지금 상황이 이렇게 까지 바뀐 가장 큰 이유는 나의 행동이 아닌 엘레나에게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 속 악역이 되어버린 빙의자의 존재보다 원작과는 다른,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엘레나의 행동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는 거다.
나와 만나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가 말이다.
이유 없는 호의를 마주하면 그 호의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만 나는 이미 그것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바 있다.
깊게 파고 들었다가 혼자 오해하고 상처받기가 싫어 그런것이기도 하지만 모르는게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굳이 나는 내가 진실을 알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언젠가 넌지시 물어볼 수야 있겠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었다.
설령 그녀가 내가 소설 속에서 보았던 엘레나가 아니어도, 아니며 나와 같은 존재여도 지금은 상관없다 생각한다.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는 엘레나 에델바이스라는 여자는 여태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낸 그녀니까.
그러니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으면 한다.
***
짧고 소탈했던 약혼식을 끝내고 나는 그때처럼 엘레나와 단 둘이서 화원을 거닐었다.
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듯 볼때마다 생기 넘치던 꽃잎들의 힘이 떨어지고 있음이 눈에 보였다. 그럼에도 이곳을 감돌고 있는 향기는 여전했기에 때때로 나는 처음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듯 했다.
"이 광경도 당분간은 안녕이네요."
길가에 밟히는 꽃잎을 보며 엘레나가 말했다.
꽃들이 피어있는 시기는 계절마다 한번이니. 봄, 여름, 가을, 겨울 마다 피는 꽃들이 제각각 다르고 영주성의 네개의 별관마다 있는 화원은 사계절에 맞추어 꽃들이 심어져 있지만 이실리아 관의 경우 그곳에 심어져 있는 것들은 봄꽃이 대부분이었다.
엘레나와 내가 함께 지내었던 시간 만큼 계절도 흘러가니 봄의 끝을 달리고 있는 지금이 아니면 당분간 이실리아 관에서 이와 같은 풍경을 보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엘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주위에 핀 보라빛 히아신스들을 둘러 보았다.
이 꽃의 향기를 마음에 들어했기에 아쉬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엘레나가 이곳에 오기 전 이실리아 관을 가장 많이 들락날락 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으니까.
나와 엘레나는 별다른 말 없이 나란히 발을 마추며 길을 걸었다.
간간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침묵을 즐겼다. 그날과 같이 잠시 발을 멈춰 하늘을 올려다 보기도 하였고 꽃향기를 실고 날아오는 춘풍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대기도 하였다.
그렇게 영주성에 돌아올 때까지 유지될 것 같던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엘레나. 당신과 처음 이실리아 관에 왔을 때 제가 하였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두서 없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오늘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그 얼굴을 보니 엘레나의 답을 듣지 않아도 그녀가 나와 했던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그녀에게 나는 잡고 있던 손에 약간의 힘을 더했다. 그걸로 안심이 되었는지 엘레나의 눈동자의 떨림이 멎었다. 나는 말을 계속 하였다.
"제가 분명 약혼은 시기상조라고 했지요. 그리고 엘레나는 제 말을 듣고 그대로 울어버리셨고 말이에요. 솔직히 그때 많이 당황스러웠어요. 약혼을 거절 한것도 아니었고 잠깐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는데 그렇게 서럽게 우실 줄은 몰랐거든요."
"그, 그건..!!!'
"그래서 하자고 한 거였어요. 약혼."
"네?"
"그때 엘레나의 눈물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그것 말고는 딱히 생각이 나지 않았거든요."
엘레나는 내 말에 잠시 어벙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음, 너무 그대로 이야기 해버렸나?
나는 얼음 조각상 처럼 굳어버린 엘레나를 품에 안았다. 조금 차갑기는 했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당시에는 만난지 하루도 안되었고 애정이라고 할 것도 없었죠. 그날 제가 엘레나에게 했던 말은 그저 당신이 저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싫었고 그것을 멈추기 위해, 그때의 상황을 넘기기 위해 했던 것에 불가해요."
"그래서...이제 전부 없던 걸로 하자구요..?"
"그럴리가요. 만약 그랬다면 약혼식을 하지도 않았겠지요. 지금 엘레나도 제 심장 소리 듣고 계시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단순히 순간의 상황을 면피하기 위해 수락하였던 약혼. 그리고 그것에 가려져 여태껏 유야무야 흘려 넘겼던 말을 하려한다.
"좋아해요. 엘레나."
짧았지만 분명 키스라 할 수 있는 입맞춤도 했었고, 그간 약혼이라는 이름 하에 연인과 같은 생활을 하였던 나와 엘레나였지만 내가 그녀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마음을 말한 것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일 터이다.
바짝 붙였던 몸을 살짝 떨어뜨리고 엘레나와 눈을 맞춘다.
그리고 그때와는 다르게 분명한 감정을 담아 그녀에게 말한다.
"앞으로 있을 미래에도 저의 옆에 계속해서 있어 주시겠습니까."
약혼식을 끝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제대로 된 약혼 신청을 그녀에게 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