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샛별 (38)
"데미안! 설마 지금 그 손에 든게 커피를 끓이기 위해 커피콩 가루를 뭉쳐서 만든 경단은 아니겠죠?!!"
"초콜릿인데요..."
"거짓말!!"
막 눈을 뜬 노엘은 꿈 속에서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불신이 깃든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처럼 주머니에서 초콜릿 조각이라고 말하며 꺼내었더니 그걸 커피 경단이라고 하지를 않나.
무슨 연유에선지 내가 하는 행동을 전부 커피에 관련지어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써어!! 거짓말쟁이!! 날 속였어!!!"
"원래 초콜릿은 쓴게 정상이랍니다."
그렇게 인상을 지을 정도로 아주 쓰지는 않을 텐데.
우리 주방장이 단것을 잘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특제품으로 다른 초콜릿들에 비해 카카오 함유량을 높게 만든 것이다. 카카오 함유량이 높은 만큼 단맛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천천히 녹여 먹으면 쌉쌀하면서 달달한게 맛이 있다.
"대체 이런걸 왜 가지고 다니시는 거에요?!"
"그거 피곤할 때 먹으면 머리가 개운해 집니다."
"그러고 보니 약간은....아니, 그게 아니라! 초콜릿이라고 하셔서 당연히 달달한 초콜릿인 줄 알았잖아요. 음...아주 못 먹을 건 아니네요. 그래도 윽! 써어....."
카카오에 들어있는 카페인은 뇌에 각성 작용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니 말이다. 조금 형태는 다르기는 하다만 전생에서의 에너지 드링크 역할을 지금은 이것이 대신 해주고 있다.
나에게는 나름 간식으로도 먹을 만해서 챙겨 둔 건데 노엘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을 구르기라도 한건지 옷이 잔뜩 엉망이 되어버린 오르커스가 우리의 앞에 나타났다.
체력이 온전치 않았음에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는지 녀석의 호흡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이 거칠어져 있었다.
처음 수풀 사이에서 마주했던 오르커스의 얼굴은 노엘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지만 이내 멀쩡한 노엘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오자 오르커스는 등장과 동시에 굳은 얼굴을 풀며 그대로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이다..."
"오라버니?!"
땅바닥에 쓰러지는 오르커스를 받아내는 노엘.
나는 조용히 오르커스에게로 다가가 이전에 노엘에게 해주었던 것과 같이 내력을 흘려주었다.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고 단순히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었기에 오르커스가 다시 일어서기 까지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넘치는 신성력으로 회복이 빠른 두 남매라 내력으로 회복력을 가속 시키니 일어서는 시기도 빨랐다.
우리는 앞에 있었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오르커스의 거동이 가능해지자 곧장 성으로 향했다.
숲에서의 일을 생각한다면 마물들의 최종 목적지는 성이었다. 어쩌면 지금 쯤 성을 둘러싸고 마물들과의 전쟁이 한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으로 향하는 것이 지금 숲에서 얌전히 있는 것 보다 더 안전한 길인 것은 확실했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과는 달리 성에는 남부군이 주둔해 있었으며 무엇보다 아버지가 그곳에 계셨기에 마물들이 아무리 몰려왔어도 성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무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데미안!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되나? 무얼 그리 조급해 하고 있어?"
"....."
하지만 그리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성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안전한 곳으로 가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엘레나와 알폰스 그 두 사람의 안전이다.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고 한들 그 둘이 성에 있고 마물들의 목적지가 성이었다는 사실이 내 이성을 흔들었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살펴 보고 문제가 없을 것이라 머리가 결론을 내렸어도 이 불안함은 가시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그 둘의 모습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숲의 끝에 도달해 멀쩡한 성과 캠프의 모습을 보자 나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물들은 패퇴해 한줌의 거름이 되어가고 있었고 캠프 주위로 일정선을 넘지 않게 깨끗한 잔디가 이들이 얼마나 잘 막아주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캠프 앞이 이렇게나 깔끔한데 그럼 당연히 성 안에 있는 사람들 또한 무사하겠지. 엘레나와 알폰스의 확인된 것 같자 나는 금새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내 발밑에 새겨진 익숙한 흔적을 보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마법?"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하기에는 미묘한 땅에 새겨진 균열에 나는 과거 나를 산사태에서 구해주었던 요하임의 마법을 떠올렸다. 그렇게 눈이 트이고 나자 주변을 둘러 보니 마법으로 새겨진 흔적으로 보이는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전장 곳곳에 불과 얼음이 춤추고 지나간 흔적들이 가득하다.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 중 이러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는 한 단 한명 밖에 없었다.
그 사실에 정신이 혼미해지려는 찰나 나의 눈에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엘레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엘레나!!"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지금 이게 어찌된 일인건지 물으려 하였지만 그럴 새도 없이 우리에게 달려온 엘레나는 나와 노엘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강한 엘레나의 팔 힘에 우리는 어떠한 저항도 없이 그대로 그녀의 손에 잡혔다.
갑작스러운 엘레나의 행동에 당황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서 엘레나에게 끌어안겨진 노엘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어찌할 줄 몰라 하였다.
'아.'
다시 한번 우리의 주변에 펼쳐진 전장을 눈에 담고서야 나는 그녀가 어째서 이리 행동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숲에서 내가 그리하였던 것 처럼 엘레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새 내 곁을 떠나 성의 첨탑 한편에 서 있는 푸른 새를 바라보며 나는 살포시 그녀의 머리에 내 머리를 맞대었다. 그 모습을 본 노엘도 이에 질세랴 나와 같이 엘레나와 머리를 맞대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간 서로를 안아주었다.
"와...이걸 나만 빼놓고?"
한 명 빼고.
***
레기온에서의 일은 노엘과 오르커스의 살해를 계획한 이교도들이 모두 죽고 성을 급습했던 마물들이 정리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사건의 규모가 큰 만큼 혹시 모를 제 삼의 인물이 추가로 있을 수도 있으니 이후 추가적인 숲의 수색과 몇몇이들에게 심문이 이루어졌지만 별다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앞서 죽은 두명이 사건의 주동자로 공표되었다.
그리고 그 둘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악신으로 여겨지는 외신을 섬기는 집단<진실된 밤>의 추기경.
<진실된 밤>과의 성전이 일어난지 얼마지나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그것도 다름아닌 황실의 단 둘 밖에 없는 후계자들을 건드렸다는 소식을 접한 황성은 곧장 대대적인 대응에 나섰다.
당연하게도 노엘과 오르커스는 곧바로 황성으로 올라가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도에서 파견된 황군이 사건의 발단지가 된 남부는 물론이고 아예 이교도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생각하에 제국령 전부를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번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황실의 후계자들을 건들인 일이었으니 아무리 자치적인 성향이 강한 영토들이라 하더라도 순순히 황군의 개입을 받아야 했다.
물론 몇백년간 제국과 싸워온 집단을 이번 한번의 수색으로 뿌리를 잘라 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 잡듯이 전국을 털다 보니 성전 때 박멸되었을 거라 생각되었던 몇몇이 그물에 걸리기는 했다.
어찌되었든 녀석들의 영향력을 줄이는데 성공은 한 셈이다.
이런 대형사건이 터져버렸으니 사냥대회는 당연히 중단될 수 밖에 없었고 대회의 우승으로 무명을 떨치겠다는 나의 계획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도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만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몇년 후 남부 침공의 주축이 될 인물들이 미리 제거되었다는 점일까.
무명이야 다른 방법으로도 올릴 수 있는 것이니 여기에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하였다. 중요한 것은 황족 시해까지 갈 수 있었던 일을 미리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니. 그리고 생각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방향이기는 하다만 내 이름이 아예 알려지지 않은 것은 또 아니었다.
레기온 성의 침공을 주도한 쪽은 아버지의 손에, 황자와 황녀를 공격한 쪽은 내 손에 죽었다.
남부에서의 수색이 크라우스가 주축이 되어 진행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하여튼 우연찮게도 추기경급으로 알려진 이들이 모두 크라우스 가문의 사람 손에 목숨을 잃게 된지라,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가문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의 낙수 효과를 받아 나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인식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에는 그저그런 명가의 후계자였다면 이제는 그래도 가문의 이름값을 한다는 정도?
제 아무리 태양의 신성력이 외신의 신성에 상극이었다고는 하지만 이제 열여섯이된 아이 셋이서 추기경급의 강자를 잡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으니 생각했던 것 만큼은 아니더라도 새로히 평가가 쓰일만 하다.
'뭐, 나의 경우에는 거의 다 죽어가는 놈을 막타 쳤다는 의견이 대부분이기는 하다만.'
그런데 그게 사실이니 뭐라 할 말이 없네.
실제로 내가 녀석과 맞닥트렸을 때 놈은 이미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의 말 대로 내가 한 것이라고는 입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녀석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 보니 본래 세우려 했던 무명보다는 황녀를 위험에서 구했다는 점에서 이름이 퍼지게 되었는데 이것도 실력이나 충의지사와 같은 경우로 보는 것이 아닌 그저 운적인 요소가 작용했다는 평이 크다.
나와 오르커스 일행과의 거리는 상당히 벌어져 있었고 그걸 내가 마력이 짙어 기감이 봉쇄된 숲에서 곧바로 찾아갔다는 건 누가 보아도 이상하니까. 능력적으로 뛰어나서 찾을 수 있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크라우스 가문 역대 최고의 천재라고 알려진 아버지 조차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생각하기에는 그저 내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게 편할거다.
나 역시 엘레나에게 받은 도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기에 이 사실을 밝혀 일을 키우는 것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는 걸 택했다.
정 이름을 알리고 싶다면 숲에 두고온 잡아두었던 마물과 사냥감의 시체를 찾는 것으로 실력을 증명을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사냥 대회도 중단되었고 기회가 이번 한번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렇게 까지 질척되며 나를 다른 이들에게 잘 보이려 용 쓰고 싶지는 않았다.
"뭐, 그녀가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니 그런걸 한트럭 가져온다 한들 금방 묻히겠지..."
내가 숲에서 마물을 몇을 잡았든 간에 그걸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란 눈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 일보다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 것에 더 집중하는 편이니.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그녀의 생각을 하며 잔을 집어들었다.
사르함을 떠나야 했던 것은 노엘과 오르커스 만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의 주역 중 한명인 엘레나 또한 지금 이 자리에 없다.
큰 일은 아니었고, 사건이 터지고 난 후 딸을 걱정한 요하임이 사건이 마무리 될 때까지 그녀를 에델바이스 가에서 지내게 하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상당한 팔불출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엘레나가 레기온에서 보여주었던 마법에 대해서 확인하기 위함도 있을 것이다.
엘레나가 대외적으로는 어린 나이에 5위계에 도달한 천재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녀가 레기온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은 절대 5위계 선에서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으니 요하임의 반응이 이해가 간다. 어쩌면 대륙의 마법계에 공전절후 할 천재의 탄생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나 역시 미리 소설로 그녀의 재능을 접하지 못하였다면 그 보다 더한 호들갑을 떨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새 잠을 못자서 그런가. 눈이 아주 사람 한 명은 담가버릴 것 같은 눈 이구만...."
나는 사과주가 담긴 잔을 기울이며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곤 눈가를 주물러 얼굴 근육을 풀어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날카롭다는 평을 많이 받는 얼굴인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완전히 날선 칼과 같아 당장이라도 싸움을 걸 것만 같은 얼굴로 변해 있었다. 어째 오늘따라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지 않더라니 얼굴이 이러니 다가올 수도 없었던 것이랴.
큰 일은 이제 다 지나갔건만 어째서 내 얼굴은 왜 이렇게 피로해 보이는 걸까.
엘레나가 곁에 없어서? 그것도 부정할 수 는 없겠다만 가장 큰 이유는 황가가 사건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다른 제국령의 가문들과는 다르게 남부의 조사와 뒷수습을 하는 역할을 오롯이 크라우스만이 할 수 있도록 위임한 것에 있었다.
제정일치 사회인 제국에서 황제가 내려주는 정당한 이단심문관 역할이랄까.
이번 조사에 있어 제국에 속한 모든 가문들이 황실의 개입을 받았지만 남부 만은 예외였다. 수사 초기에 황실에서 사람들을 보내오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할 뿐 얼마 지나지 않아 황실은 남부의 수사권을 모두 크라우스에 양도했다.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데 있어 황가는 물론이고 다른 가문마저 크라우스의 행사에 관여할 수 없다. 한마디로 나와 아버지가 작정하고 남부의 한 가문을 지워 버리고 싶다면 이번 사건을 빌미로 어떠한 가문이든 소리소문 없이 멸문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아무튼 이는 이번 사건에서 크라우스 백작가가 보여준 모습과 더불어 황가가 본 가문을 이렇게 까지 신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명예로운 일이었지만 내가 누구인가?
크라우스의 소백작이다.
명예고 뭐고 다른 가문과 협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오로지 크라우스 내부 인력만으로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문의 힘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만 당연히 소백작인 내 업무는 늘어날 수 밖에 없었고 덕분에 지금과 같은 얼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황가는 이 권리를 줌으로서 어느정도 보답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권한을 받은 나는 그저 짬처리 당했다는 기분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외부의 간섭이 사라졌기에 이 과정에서 소백작으로서의 상당한 자유도가 보장될 수 있었다.
미래를 약간이나마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손 쉽게 내 뜻대로 수사를 진행하는, 미래에 화근이 되는 이들을 미리 제거 할 수 있을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나는 잠을 빼았겼다. 뭐, 일이 다 끝난 만큼 이제 실컷 잠이나 잘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게 작게 중얼거렸다.
"귀족들은 왜 그리 연회를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하필이면 일이 끝난 당일 저녁.
사건이 마무리된 기념으로 연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거의 재해나 가까웠던 일을 아주 적은 피해로 끝 낼 수 있었으니 그 기념으로 연회 한 번 쯤은 열릴만도 하다.
"하다못해 내일이나 내일 모레에 열었으면 좋잖아..."
놀랍게도 이번 연회의 주최자는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연회를 여는 것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다만 이번 연회의 경우 일이 무사히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부분이었다. 아마도 이를 당일치기로 빠르게 끝내시려는게 목적이었던 것 같다만 주변 사람들 체력도 좀 고려해 주었으면 좋겠다.
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기사들이야 연회가 강제는 아니었기에 참가하지 않으면 그만이다만, 나는 아버지와 더불어 연회의 주역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자리를 빠져나올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에서는 수사 기간 동안 항시 같이 있었던 그웬 경이나 다른 기사들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아마, 다들 쉬러 간 것이겠지. 이 배신자들.
오늘은 잔뜩 날이 서있는 내 분위기 때문인지 나에게 말을 걸려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혼자가 되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라 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했기에 모처럼 연회에 나왔음에도 조용해진 주변의 분위기를 즐기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평소보다 다가오는 사람이 없다 한들 연회장에서 고개를 꾸벅이며 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적당히 몇번 사과주를 들이키고 한번 시계를 들여다 보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연회장에 있은지 어느새 한시간이 다 되어 갔다.
이 쯤되면 어느 정도 자리를 지켰다고 할 수 있으니 이제 자리를 떠나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랴.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먹은 순간 갑자기 장내가 시끄러워 졌다.
"헉, 저기....저!!"
"아. 저 영애가 이번 사건에서 큰일을 했다는 그?"
"큰 일이고 말고! 내가 그 자리에서 직접 두 눈으로 봤는데, 성을 향해 달려오던 마물들이 영애가 부린 마법들에 싹 쓸려갔다니까."
"허.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데....그럼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까 다들 저 외모에 홀려 쉽게 다가갈 생각하지 말어. 그렇지 않아도 소백작의 약혼녀. 괜한 짓을 하려다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
성량을 조절하기는 했으나 내 귀에는 잘 들리기만 하다. 사람들의 수근 거리는 소리가 누가 이곳에 왔는지를 알려 주었다.
나는 익숙한 꽃내음을 쫓아 방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몸을 움직이자 사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몸을 비키었다. 반대편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람들은 홍해와 같이 갈라졌다.
내 앞에 서 있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자리를 피하자 그제야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저들끼리 이리저리 수근 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더니 멀찍히 자리를 피했다.
나는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가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쉬다 돌아오시지 일찍 돌아오셨네요. 엘레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시기는....그래서 본심은요?"
"언제 오시는지 목이 빠지랴 기다렸습니다."
나의 대답에 엘레나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조금은 피로가 풀리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