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샛별 (36)
"녀석들이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일까요? 황실에서 성전(聖戰)을 벌인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 언제 이 녀석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것 봤나? 그래도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를 노린 건 단순히 몇놈 모여서 계획한 것 같지는 않은데....그건 그렇고 데미안, 이 녀석은 이걸 왜 경에게 주고 간게야? 경이 그렇게 걱정이 되었나?"
"그만큼 신뢰하고 있다고 정정해주시죠. 그리고 내력(內力)이 넘쳐나는 가주님이나 도련님과는 다르게 저는 일반인이 잖습니까."
윌리엄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던 그웬은 아서의 빈정거리는 말에 씁쓸한 얼굴로 답하였다.
지금은 아서의 손에 들려있는 붉은 보석이 박힌 단검.
데미안이 그웬에게 맡긴 저 단검은 크라우스 가문 대대로 소가주에게 내려오는 물건으로 가문의 내력 만큼이나 단검 역시 범상치 않은 기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검에 박혀 있는 저 붉은 보석의 정체가 과거 초대 크라우스의 가주가 죽인 드래곤의 드래곤 하트 조각이었으니 말이다.
영구기관이나 다름 없는 드래곤 하트인 만큼 소유자의 내력 회복을 돕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외에도 아서가 정확히 그웬이 있는 곳으로 달려 올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저 단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능력들 때문에 가주의 반지와 마찬가지로 가문의 후계자 말고는 지닐 수 없는 신물로 취급되는 것이었는데 그런걸 데미안이 임시로나마 타인에게 넘겨주었으니 아서가 저리 반응하는 것이었다.
'쪼잔하기는.'
하지만 그 진의가 따로 있다는 것을 그웬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서가 신물이라고는 하나 단검 좀 만졌다고 해서 화를 낼 위인이 아니었음을 그웬은 알고 있었다. 당장 지금 그웬이 사용하고 있는 검도 아서에게 받은 것이었는데, 드래곤 하트만 박혀 있지 않을 뿐 용의 뼈로 만들어진 명검 중 하나였다.
용골로 만들어 진 검을 주었다는 건 그만큼 아서와 그웬의 신뢰관계가 돈독하다는 뜻, 그럼에도 지금 아서가 그웬에게 면박을 주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이 데미안에게 주었던 검이 그웬의 손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생각하자면 생일날 고심해서 고르고 골라 아들에게 준 선물이 다음날 보니 아들과 친한 삼촌 손에 들려있는 것을 본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 한마디로 그냥 심술이었다.
아서는 그웬의 대답에 웃으며 말했다.
"천하의 검은 용 기사단의 단장이 일반인? 하하! 이 세상의 일반인들은 다 죽었나 보군!"
"어디까지나 두 분을 기준으로 한 말입니다. 괜히 또 곡해해서 말씀하시지는 마시죠. 것보다 가주님께서는 강해서 참 좋으시겠습니다. 어디에다 던져 놓아도 살아서 돌아오실 테니 굳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웬 경. 방금 뭔가 기사단장으로서 가주에게 할 말이 아니지 않은가?"
그웬 역시 아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유상종이라는 말과 같이, 아서가 가주로 앉아있는 크라우스 가문에서 거의 종신직이나 다름 없는 기사단장을 맡고 있다는 것 부터 말 다한 셈이다.
둘은 그렇게 티격태격 말을 이어가면서 주위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는 친구 간의 장난과도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일을 꼼꼼히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웬과 아서는 윌리엄이 입고 있던 로브를 벗겨 소지품들을 하나하나씩 뒤져보았다. 윌리엄이 교단 내에서 추기경이라는 위치에 있었던 이상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정보가 발견될 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둘의 기대와는 다르게 윌리엄의 소지품에는 약간의 돈이 들어있는 주머니와 신앙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을 조각해 놓은 작은 금제 신상 하나가 전부였다.
위에서 받은 명령서나 사건의 단서로 보이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웬은 윌리엄의 몸에서 나온 물건들을 가죽 주머니에 담고 시체는 그가 입고 있는 로브를 넓게 펴 덮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추기경이라고 하기에는 주머니가 너무 가볍군."
"숲에 숨어 있는데 돈이 필요한 일은 없을테니 말이죠. 그래도 그렇지 정말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군요. 아마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전부 태워버린게 아닌가 싶습니다."
"쯧- 아까워라. 얻은 건 이 녀석의 머리 정도인가. 일단은 꼴에 추기경이라고 나름 얼굴이 잘 알려진 녀석이었으니 말이야. 목을 효수해서 황성에 보내면 미약하나마 놈들의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겠지."
"아, 그러고 보니 윌리엄이 가주님을 뵈었을 때 상당히 놀라하는 것 같더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이 녀석 마물술사라고 했지? 숲에 얼마만큼의 마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 녀석은 자신의 전력에 가까운 병력을 캠프가 있는 곳으로 보내 침공을 강행했다. 뭐, 내가 숲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발을 묶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떡하니 이곳에 나타났으니 당연히 놀랐겠지."
"....설마 마물들의 정리를 다른 가문에게 맡기고 바로 이곳으로 달려오신 겁니까?"
"그럴리가 있겠나. 당연히 캠프를 침공한 마물들을 쓰러뜨리고 오는 길이지. 이 녀석 꽤나 공을 들여서 준비했더군. 숲의 최심부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보기 힘든 마물들도 여럿 섞여있었어. 아마 그 아이가 없었다면...."
아서는 말하는 도중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곤 평소 그가 자주 하던 장난기 어린 미소를 흘리며 그웬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니다. 아니야. 이런건 말로 하는 것 보다 직접 가서 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무슨...말씀이십니까?"
"그런게 있다. 아마 실제로 보면 너도 놀라 까무라칠게야. 이야...내가 세상에 우리 아들 만큼이나 천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건 또 아니더라고.
***
"헉...허억...젠장!!! 진짜 끈질기게도 쫓아오네!!!"
로빈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 마물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늑대의 형상을 가졌지만 그보다 배는 큰 덩치를 가진 마물이 노란 눈을 빛내며 로빈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거대한 늑대의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는 듯 싶자, 로빈의 뒤를 쫓고 있던 녀석 중 하나가 로빈을 향해 도약했다. 로빈의 등을 덮치기에는 거리가 약간 모자랐지만 그의 뒷 발꿈치에 이빨을 박아 넣기에는 충분했다.
"저리 꺼져!!"
하지만 후방경계를 개을리 하지 않던 로빈은 녀석이 달려드는 타이밍에 맞춰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그러고는 몸을 한번 회전시켜 그대로 녀석의 주둥이를 향해 발을 날렸다.
깨갱-
마치 둔기에 맞은 것 처럼 발이 꽃힌 부위가 함몰된다. 살이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놈의 부서진 이빨이 공중에 흩뿌려졌다. 충격이 상당했는지 로빈의 발에 맞은 녀석은 그대로 균형을 잃고 무리에서 나가 떨어졌다.
아무리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다 한들 범인(凡人)으로서는 할 수 없는 기예. 방금 전 로빈의 모습은 그야말로 초인(超人)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비록 지금은 마물들에게 쫓기고 있다고는 하지만 로빈은 엄연히 남부 최강의 기사단이라 평가 받는 곳에서 인정을 받은 인재 중의 인재였다. 만약 그가 검을 뽑을 수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도망만 다니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로빈의 허릿춤에는 그가 기사단에서 지급 받은 검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가 홀몸이라면 모를까, 로빈의 등에는 정신을 잃은 한 소년이 업혀 있었다. 원래라면 수레에 실려 편히 이송되고 있었던 소년이었지만 마물들이 수레를 부숴버리는 바람에 결국 상황이 이리 되어 버렸다.
기사단 내에서 기대받는 신인인 로빈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발로 검술을 펼치는 재주는 없었다. 이동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공격권에 다가오는 마물들을 밟아 제압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흑...지친다 지쳐...무슨 마물 녀석들이 어떻게 사람 새끼들 보다 의리가 좋냐."
로빈은 전혀 줄어들지 않은 마물 무리들을 보며 질린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 한마리를 무리에서 떨쳐냈으니 남은 마물들은 여섯이 되어야 할게 분명한데 달리는 도중 자가증식이라도 했는지 그의 등 뒤에 있는 녀석들의 수는 어느새 열을 넘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짐을 하나 얹고 움직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계속되는 공격으로 인한 소모전은 로빈의 체력을 조금씩 야금야금 갉아 먹었다.
이미 여러번 자신의 뒤를 노리는 녀석들을 물리친 로빈이었지만 녀석들은 로빈의 행동에 겁을 집어먹기는 커녕 복수라도 하려는 건지 더욱 집요하게 로빈을 노렸다.
한 놈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갈때 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은 계속해서 울음소리로 자신의 동족들을 불러 모았고 그 결과 오히려 추격자의 수가 더 늘어나게 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상황이 이리도 절망적이니 로빈의 얼굴이 좋을리가 있나. 뒤를 돌아볼 때마다 바뀌는 무리의 수에 로빈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힘의 차이를 알려주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거라 생각했거늘, 되려 그로 인해 추격자의 수를 늘리는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절벽 끝에 내몰린 상황이라 할 수 있는 로빈에게 약간이나마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열심히 쉬지 않고 달린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캠프까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숲의 끝이 보이는 것 같자 그제야 그의 얼굴에 다시 빛이 들기 시작했다.
끝에 가까워지면 가까워 질 수록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다른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온다.
보아하니 마물들의 습격으로 캠프도 그리 안전한 곳은 아니게 된 것 같지만 그것이 로빈에게 있어 유일한 동아줄이었기에 그런 몇몇 사소한 사실은 그가 신경 쓸게 되지 아니하였다.
'캠프, 캠프에 돌아가기만 하면 이 녀석 바로 던져 버리고 저 녀석들 다 죽여 버려야지. 씨발 오늘 저녁은 개고깃국으로 결정이다.'
일단 이 빌어먹을 숲 만 벗어나게 된다면 어떤 방향으로든지 상황이 바뀌는 것은 확실했으니. 그리고 그가 예상했던 대로 로빈이 숲의 끝에 도달하자 상황의 변화는 극적으로 바뀌었다.
컹!
"그래. 조금만 더 쫓아...어...잠깐! 아니, 니들 왜 다시 돌아가는 건데에?!!"
숲을 벗어나기 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서 갑자기 우두머리가 무리를 이끌고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한것이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로빈을 죽일 듯이 쫓던 녀석들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잔뜩 겁에 질린 채 꽁무니를 내빼는 녀석들의 모습에 로빈은 기뻐해야하는 건지 슬퍼해야는 건지 모를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뭔데...?"
처절한 피의 복수극을 계획하고 있던 로빈의 입장에서는 허탈하기 그지 없었다.
이제야 그동안의 설욕을 갚아 줄 수 있는 가 했더니 그 대상들이 자리를 내뺀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놈들의 뒤를 쫓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그는 곧바로 이성을 되찾고는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녀석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로빈은 거의 다 잡은 사냥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놈을 쓰러뜨리면 둘 셋이 더 따라 붙을 정도로 로빈을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녀석들이었는데, 그런 녀석들이 로빈을 두고 떠났다는 것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 앞에 무언가 있나...?'
캠프에는 소드 마스터인 아서 크라우스가 있었다. 만약 녀석들의 대장이 그의 존재를 느꼈다고 한다면 지금 상황이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어쩌면 숲에서 보았던 것 처럼 상위의 마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조심하게 만들었다. 그의 기감에 불온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로빈은 경계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숲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하늘을 가리던 나무가 걷히며 태양빛과 함께 숲 밖의 전경이 로빈의 눈에 들어왔다. 소리를 들어 예상했던 것과 같이 캠프가 설치되어 있던 장소는 전장으로 변해있었다.
숲의 입구에 깔려있던 푸른 잔디는 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고 이곳저곳에서 아직 치우지 못한 사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인 점이라고 한다면 눈에 보이는 시체의 주인이 사람 보다 마물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는 점일까나. 정황 상 이곳에서 일어났던 전투는 남부군의 승리로 마무리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아, 이런."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전장의 모습에 넋을 잃고 있던 로빈은 자신의 몸을 흔드는 땅울림에 정신을 차렸다.
전투는 누가보아도 남부군의 승리였다.
하지만 아직 이곳에는 전투에서 살아남은 마물들이 남아있었고 그것들은 본능에 따라 살아남기 위해 숲을 향해 달렸다.
바로 지금 로빈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말이다.
이는 로빈에게 있어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마물의 수가 적지 않아 옆으로 돌아서 피하려고 해도 피하기 전에 놈들과 맞딱들이게 된다. 스물이 조금 안되는 늑대 마물들의 무리에 고전을 했던게 방금 전인데, 로빈은 성난 황소 떼 처럼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마물 군단 사이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설마 아군의 승리가 이런 식으로 영향을 끼칠 줄이야.
지금 상황에서는 다시 숲으로 달려가 나무 위에 오르던지 해서 몸을 피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 같았다. 다시 숲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로빈은 얼굴을 일그러 뜨리며 몸을 뒤로 돌렸다. 그래도 이 길이 어물쩡 거리다가 마물들에게 밟혀 죽는 것 보다는 나아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 소리에 무슨 마력이라도 담겨 있던 것일까. 소리를 쫓아 로빈의 목이 절로 뒤를 향했다. 그리고 로빈은 보았다. 자신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던 마물 군단이 그 잠깐 사이 한줌의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는 모습을.
"아, 누군가 했더니 로빈 경이셨군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비로소 로빈은 회색빛으로 물들고 있던 세계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람에 흩날리는 잿가루 사이에서 걸어왔다. 세상은 아직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정작 세상을 그리 만든 중심지에서 걸어 나오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같이 새하얗기만 하다.
무엇이 숲의 늑대들을 도망치게 했는지, 왜 방금 전 마물들이 숲을 향해 도망쳤는지 로빈은 그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