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샛별 (35)
데미안이 발터를 죽임으로서 레기온의 숲에서 일어난 사건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문제가 완전히 해결이 된 것은 아니었다.
나무 위를 달리는 남자를 향해 사방에서 신체를 개조당한 마물들이 달려든다.
지금 숲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원흉 중 한명을 쫓고 있는 남자. 그웬은 현묘한 움직임으로 마물들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하곤 그대로 검을 휘둘러 자신에게 달려든 마물들을 하나 둘 씩 베어넘겼다. 나무 위를 달리며 나가는 검격에는 막힘이 없고 정확하기만 하다.
몇몇은 일검에 몸이 토막나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렇지 못한 녀석들도 힘줄이 끊어진 것인지 더 이상 그웬을 쫓지 못하고 나무 밑으로 떨어졌다.
평소의 그였다면 땅 밑으로 따라 내려가는 것으로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었겠다만, 지금은 사람을 헤치지 못하도록 무력화 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을 조종하는 술사의 목숨이지 마물의 목숨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십여분을 넘게 쫓으며 마물들을 수를 줄여온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웬을 향해 달려오는 마물의 수는 처음과 비교하자면 그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방금 전 그가 베어버린 녀석들이 그의 기감에 걸려든 마지막 마물들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녀석들을 조종한 것으로 추정되는 술사만이 남았다.
더이상 그의 앞을 가로막을게 없었으니 여태 좀 처럼 줄어들지 않던 원흉과의 거리는 육안으로 놈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놈을 보았을 때, 그웬은 곧바로 녀석이 자신이 쫓고 있는 이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근거 없는 확신이 아니었다.
녀석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광고라도 하는 것 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지 않고 계속해서 드러내었으니. 그의 기감(氣感)은 눈 앞의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술사의 위치를 확인한 그웬은 곧바로 허릿춤에서 비도를 꺼내 놈을 향해 던졌다.
진한 녹빛의 오러가 담긴 비도는 바람처럼 빠르게 날아가 정확히 술사의 머리 앞에 박혔다. 계속해서 나무 위를 오가던 녀석은 갑자기 자신의 머리 앞으로 날아온 비도에 발을 멈출 수 밖에 없었고 이내 자신의 앞에 박힌 비도에서 터져나오는 바람에 의해 땅으로 떨어졌다.
풍압에 밀려 떨어지는 술사의 머리 위로 검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바람 소리가 섞여 소름끼치게 울어대는 검명(劍鳴)은 절로 술사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질풍과 같은 검이 술사의 머리를 향해 내려쳤다.
하지만 호기롭게 그어진 검은 결국 술사의 머리를 쪼개지 못하였다.
고목도 단번에 베어버릴 만큼 예리한 검기를 담은 검이었지만 언제부터 만들어 두었는지 모를 반투명한 막에 가로막혀 더는 앞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다만 검을 막아내었다고 한들 술사의 몸은 땅으로 추락하고 있는 모양새인건 변하지 않아, 그웬은 그대로 힘을 주어 방어막과 함께 술사를 땅으로 내려 꽃았다.
콰앙-! 하고 땅울림 소리가 숲 전체에 퍼져 나간다.
충격에 의해 생긴 흙먼지는 잠시나마 둘의 모습을 가렸다. 다만 찰나에 불과할 뿐, 흙먼지는 둘을 중심으로 터져나간 풍압에 의해 금새 걷혔다.
먼지가 걷힌 장소에서는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분명 그웬의 검에 깔려 땅에 박혀 있어야 할 술사는 무슨 술수를 썼는지 흙이 잔뜩 묻은 로브를 두른 채 땅 속이 아닌 자신의 두 발로 그웬의 앞에 서 있었다.
여태 그렇게 광고를 해댔으면서 정작 그웬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은 몰랐는지 그웬과 마주한 술사의 눈은 순간 당황하는 것 처럼 보였으나 이내 그웬은 그것의 입꼬리가 위를 향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로브에 묻은 흙은 털어내더니 그는 검을 치켜든 그웬을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흘리었다.
"이거, 용을 낚고자 했더니 왠 비룡 하나가 걸려들었구나. 뭐...좋다. 크라우스의 기사단장 정도면 저승길 동무로서 합격점이라 할 수 있지."
"별 같잖은 녀석이 입만 살았구나. 마물술사 윌리엄 크롬웰."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굳이 귀찮게 통성명을 할 필요가 없어 좋군."
그웬은 다시금 자신의 기감으로 주변을 살피었다.
마력이 짙게 깔려있는 룬프라우드 산맥의 특성상 기감으로 살펴 볼 수 있는 영역이 그리 넓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의 감각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이 장소에 느껴지는 기척은 그웬과 눈 앞의 마물술사, 윌리엄이 전부였다.
마물술사는 그 이름 처럼 자신이 조종하는 마물을 힘으로 삼는다. 그런데 그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윌리엄이 왜 이런 짓을 했을까.
그웬은 자신이 윌리엄에게 도달할 때까지 꽤 많은 마물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녀석의 전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는 황실에서 주적이라고 선포한 이교도의 추기경이다. 단순한 허세일 수도 있겠다만 숨겨둔 수가 있을 거라 판단하는게 옳은 선택일 것이랴.
그웬은 아까전 교전으로 인해 윌리엄과 자신의 사이에 박힌, 데미안이 그에게 넘겨준 단검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단검에 박힌 붉은 보석은 빛을 받지 못했음에도 홀로 빛나고 있었다.
***
이렇게 전력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그웬이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을 때, 반면 윌리엄은 그웬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는 것 처럼 얼굴에 여유가 넘쳤다. 자신의 명이 오늘 끝이 날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유인책은 성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윌리엄의 얼굴에 미소를 가져다 준 건 다름아닌 그웬의 존재였다.
윌리엄은 그웬의 생각대로 다룰 수 있는 마물들을 전부 다른 곳으로 빼 둔 상황이었다. 적은 숲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마물 군단은 이미 레기온의 캠프를 향해 진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침공의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역시 침공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캠프에는 검은 용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 거기에 남부의 쟁쟁한 명문 무가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검은 용 한명 만으로도 만인지적이라 해도 될 정도인데 거기에 명장들과 군사까지 있으니 승산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그곳에 전력을 투입한 것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함이었다. 그들의 시선을 숲 안쪽으로 향할 수 없도록 하는 것. 그것이 윌리엄이 바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사건의 원흉을 쫓기 위해 이들은 결국 숲 안쪽으로 향할 수 밖에 없을 테지만 침공을 받는 그 순간에는 마물들에게 시선이 쏠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일신의 무력이 하늘에 닿아있다는 소드 마스터(Sword Master)라 해도 마찬가지. 무엇보다 그는 저 남부의 맹주였으니 상황이 안정화 될 때까지 쉽사리 자리를 떠날 수 없다.
물론 그의 실력이라면 마물의 진압은 그리 오래걸리지 않을테지만, 이렇게 까지 해서라도 시간을 벌어야 할 이유가 그에게는 있었다.
이런 목적을 가진 윌리엄에게 변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좀 처럼 회복되지 않는 마물들과의 연결.
단편적인 지시는 내릴 수 있었지만 이전처럼 세세하게 하나하나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평소라면 '망'을 넓혀 주위에 있는 야생의 마물이라도 동원하는 것이 가능했을 텐데 지금은 이것들과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 만으로도 큰 힘을 써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주류가 되지 못한다.
윌리엄이 원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었으니까. 어떻게든 마물과 남부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다만 그가 지휘를 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버려질 시간이 아까웠다. 그의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어야 했으니.
두번째는 바로 검은 용에 이어 남부 최대 전력 중 한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은 용 기사단의 단장이 자신을 쫓아오는 것.
이 둘째 문제야 말로 그의 계획을 뿌리부터 뒤흔들 수 있는 것이었기에 윌리엄이 자신을 공격하는 그웬을 보고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쫓아오라고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지만 그가 정말로 자신을 쫓을 것인지는 윌리엄이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만일 하나 그가 황녀와 황자를 만나게 된다면 여태 윌리엄이 준비한 일들은 모두 헛짓거리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제 되었다. 비룡은 이곳으로 날아왔고 지금 황녀와 황자에게 보호자는 없다.'
모든 변수가 지워졌다.
그웬을 제외하고는 지금 숲에서 발터와 맞붙을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의 실력은 확실하니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능히 임무를 완수하리라.
그 사실에 윌리엄은 지금 그웬이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웃었다. 공멸할 생각으로 덤벼들었건만 전력으로 삼는 본대를 캠프로 보낸 지금의 윌리엄과 그웬의 차이는 그런 각오 하나로 뒤집을 만큼 얕지 않았다.
"역시 입만 살았지 실속은 없는 놈이었구나."
"크하하하하!! 어리석은 놈. 그래. 멋대로 지껄이거라...."
하지만 그는 웃었다.
어차피 버린 목숨, 계획이 성공했으니 지금 당장 목을 내어주어도 상관 없었다.
"고놈 참 웃음소리가 듣기 경박하구나."
이 목소리가 들리기 전 까지는.
하늘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윌리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방금 전 음성의 주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태양을 등진 채 서 있었다.
태양을 가리고 별세계에서 지상을 내려다 보는 남자의 눈은 흡사 하늘 위에서 미물을 보는 용과 같았다.
아니, 저 남자는 분명 용이 맞으랴.
윌리엄은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번 계획을 짜는 동안 수십 수백은 되내었던 검은 용이 바로 저 남자를 지칭 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이 지금의 상황을 말하는 것일까. 앞서 그웬과 마주했을 때 허세로 말했던 것이 실제로 실현되어 버렸다.
"아니, 대체 어떻게 지금...!!"
"음? 아까 시원하게 웃던 모습은 어디가고 겁에 질린 개새끼마냥 부들부들 떠는게야?"
혹시 쫄았냐?
한 지방을 다스리는 군주라고 하기에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언사. 하지만 이것이 그가 아서 크라우스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준다.
그 목소리에 윌리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아서의 말에 모욕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의 머리속은 어째서 지금 전선에 묶여 있어야 할 이가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났는지에 대한 의문만이 가득했으니, 이것은 경악에 가까웠다.
아서가 손을 뻗자 땅에 박혀 있던 단검 하나가 그의 손으로 빨려들어갔다.
단검이 그의 손에 잡히자 검에 박힌 붉은 보석은 그 어느때 보다 밝게 빛을 내었다.
"가문의 신물(神物)은 땅바닥을 구르고 있고...에잉, 괜히 맡겼어."
"....죄송합니다. 가주님."
"경께 말한 것이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네. 이걸 맡긴 녀석에게 하는 말이지. 절대 몸에서 떨어뜨리지 말라고 내 그리 말했거늘..."
쯧-
혀 차는 소리가 조용히 숲을 울린다. 둘은 마치 목적을 잊은 사람들 처럼 윌리엄을 중앙에 두고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서의 말과 행동은 절대 방금전 까지 전투를 치루고 온 사람이라고 생각 되지 않았다. 걸치고 있는 옷과 갑옷에 피 하나 묻어 있지 않고 깨끗한 것이 곧바로 숲으로 달려온 것이라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윌리엄은 그러한 생각을 부정하였다. 그가 싸우지 않으면 그는 남부의 가문으로부터 신의를 잃는다. 크라우스가 남부에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가장 힘이 강력하기 때문도 있지만 동시에 남부의 수호자인 것이 가장 컸으니 아서가 이를 무시 할 수는 없었다.
상식 외의 일에 윌리엄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정신줄을 부여 잡으며 아서를 바라보았다.
일이 어떻게 흘러갔던간에 검은 용이 숲으로 들어오는 시간이 일러도 너무 일렀다. 발터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만약 아직까지 황자와 황녀를 처리하지 못했다면 계획이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
윌리엄의 행동은 빨랐다.
결단을 내리자 마자 그는 자신의 마력을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마물을 군단 단위로 조종하는 마물술사 답게 그가 지닌 체내에 담고 있는 마력은 범상치 않았다. 거기에 자신이 추기경으로서 부여받은 신성까지 쏟아부으니 새어나오는 기세 만으로도 숲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변하고 있음을 안 걸까. 계속해서 무시로 일관하며 그웬과 대화를 나누던 아서가 드디어 윌리엄을 향해 고개를 돌리었다.
"이미 늦었다! 멍청한 놈!!"
마력을 집중시킨 윌리엄의 몸은 일촉즉발의 폭탄과도 같아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그의 몸은 조금만 건들여도 이 일대를 날려버릴 정도의 폭발력을 갖추게 되었다. 제 아무리 초월자라 한들 무적은 아닐 터. 죽음까지는 몰라도 이렇게 가까이 있는 이상 적지 않은 피해를 줄 것이라 윌리엄은 자신했다.
함부로 검을 휘둘렀다가는 그대로 폭발에 휘말린다. 저들 역시 그것을 알고 있겠지만 성격 상 자신을 그대로 두고 갈리 없었으니 윌리엄은 반드시 성공하는 기폭장치를 눈 앞에 두고 있음을 확신했다.
"아까부터 사람 말하는데 너무 시끄럽군."
하지만 세상사 사람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처럼, 그는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른 아서의 얼굴을 마주해야했다. 그는 정말 옆에서 시끄럽게 해서 짜증이 난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아서는 손에 쥔 단검으로 허공에 가볍게 선을 그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의 행동에 기세를 내뿜으며 위협했던 윌리엄은 얼이 빠진 얼굴로 아서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검을 들기는 했지만 검기도 뽑아내지 않고 허공에 헛손질 하는 그의 행동을 윌리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시야가 반으로 갈라지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