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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77화 (77/131)

< 77화 > 샛별 (34)

생각했던 것 보다 길어지는 전투에 검사, 발터는 참담한 기분이었다.

황자와 황녀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미리 보고 받은 사실이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고전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아무리 상대가 태양의 신성을 가장 짙게 이어받은 아이들이라고는 하나,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이들이 아닌가.

기껏해봐야 이제 열여섯의 아직 피도 안 마른 애송이들일 터인데, 과연 이것이 범인(凡人)들이 천재를 바라볼 때의 느낌이라는 것인가.

교단 안에서 열 밖에 되지 않은 추기경 자리를 그가 꿰찮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교단이 지닌 무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추기경의 자리는 철저한 실력지상주의였고, 신의 은혜를 받은 것도 추기경의 위에 오르고 나서 받게 된 것이었지 그 이전의 발터 또한 충분히 추기경의 자리에 어울리는 강자였다.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 수록 발터는 어째서 대주교가 자신에게 이들을 반드시 죽이라 하였는지 알 것 같았다.

아직 온전히 성장하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대로 이들이 자라게 된다면 분명 교단의 대업은 몇십, 몇백년은 뒤로 미루어지게 될 것이었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현 상황이 지속되었다가는 둘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올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여기서 새로운 인력이 투입된다고 한다면 결과가 어찌될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해도 뻔하다.

발터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죽음이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하는 것은 두려워 하였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고 발터의 결단은 빨랐다.

그는 여태 쓰지 않고 있던 어둠을 꺼내들었고 그대로 성역의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오르커스와 노엘을 향해 달렸다.

발터의 검을 받아내는 둘의 연계는 매우 훌륭했다.

둘 모두 가지고 있는 재능이 뛰어났으나 만약 한명 뿐이었다면 발터가 지금처럼 고생을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노엘과 오르커스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서로가 보완해 주어야 할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고 각기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잘 살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틈이 생기는가 싶으면 곧바로 다른 쪽에서 그 틈을 막아버린다.

완벽에 가까운 대응에 짜증이 날 정도였지만 발터는 물러서지 않고 전보다 더 성역의 안쪽으로 전진했다.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검력에 노엘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음을 안 것이다. 검을 떨쳐내고자 손을 움직여 보지만 둘의 기량은 백중세였고 더 강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발터에게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상황이 달라졌음을 안 오르커스가 서둘러 발터를 향해 마탄을 쏘았지만 발터가 노엘에게 바짝 붙어있는 탓에 궤도가 상당히 제한될 수 밖에 없다. 발터는 노엘을 힘으로 밀어 붙이는 것으로 마탄의 궤도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상황이 역전된 것 같았지만 발터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쿨럭..."

여태 유효타가 성사된 적이 없었건만 꼭 내상을 입은 것 처럼 발터의 입에서는 검은 핏물이 줄줄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성역 내부에서 상극이나 다름 없는 힘을 끌어 썼기 때문이었다. 여태 발터가 쓰고 싶지 않아 자제하였던 것이 아니었다. 섯불리 힘을 사용했다가는 아무런 성과 없이 몸만 망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발터에게 여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단 한명 만이라도...'

동귀어진의 수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할 생각이었다.

성역의 신성과 반발하는 신성력이 혈도 안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서둘리 성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전신의 혈맥이 터져 그대로 쓰러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몸을 망치면서 까지 얻을 수 있는 힘은 매우 컸다. 신성이 내려주는 은혜를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게 된 발터의 힘은 이전과는 비교할게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하여도 백중세를 이루었던 노엘을 단 한손만으로 압박하는 것이 가능했다. 손의 여유가 생긴 발터는 힘을 가득 담아 주먹을 쥐고는 그대로 노엘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컥-!"

"노엘!!"

짧은 비명이 튀어나왔지만 발터는 그 비명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주먹에 맞은 노엘의 몸이 그대로 날아가버렸기 때문이다. 발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땅을 박차 올라 숲으로 날아간 노엘을 따라 성역을 벗어났다.

"이런!!! 야 이 새끼야!!!! 멈춰!!!"

오르커스가 울부짖으며 곧바로 뒤를 따랐지만 마법사인 그로서는 발터의 움직임을 쫓지 못하였다. 발터는 숲으로 들어가면서 가는 길목마다 나무를 베어 길을 막았다. 금방이면 파훼될 조악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지만 잠깐이라도 발을 묶을 수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주먹에 의한 충격이 컸는지 그녀는 검을 지지대 삼아 겨우겨우 일어서고 있었다.

아무리 오러 유저라 하여도 보통 그런 주먹에 맞았다가는 그대로 몸이 꿰뚫렸어야 정상이었지만 오르커스로 부터 받고 있던 가호와 황족 특유의 튼튼한 몸 덕분인지 내상을 입은 수준에서 그친 모양이다.

노엘을 발견하자 마자 발터의 검은 그녀를 향해 검기를 뿜어대었다.

성역에 의해 힘이 제한되었을 때와는 다르게 검은 신성력이 섞인 거대한 검기가 노엘을 덮친다.

노엘은 검을 들어 막아내는 대신 몸을 굴러 검기를 피했다.

내상을 입은 탓에 그녀의 움직임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지닌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어떻게든 피하는데 성공은 했지만 내상으로 인한 고통이 노엘의 몸을 둔하게 만들었다.

그 탓에 노엘의 발버둥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윽!"

억지로 움직인 몸은 금새 한계에 달했다.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할 고통으로 인해 노엘의 몸이 휘청거렸고 그렇게 몸의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쓰러진 노엘의 호흡은 매우 거칠었다. 검기를 피하는 동안 기력을 전부 사용해 버린 것인지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그 모습에 발터는 이번 검격이 자신에게도 그녀에게도 마지막이 될 것임을 확신했다.

정상이 아닌 것은 발터도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끌어올린 힘은 몸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상황은 삽시간으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투구 너머로 새어나오고 있는 핏물이 바로 그 증거였다.

노엘을 처리한 후 뒤 따라오고 있는 오르커스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 명이라도 확실히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나지막한 위안을 주었다.

"끝이다."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노엘을 내려다 보며 발터는 말했다. 그가 검에서 힘을 빼는 일은 없었다. 설령 승리를 확신했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약간의 여지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검을 들어올리자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오러는 마치 노엘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 처럼 커져갔다. 비록 반쪽짜리기는 하다만 어찌되었든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며 그는 검을 내려그었다.

그 순간.

진한 푸른 빛의 깃을 가진 새가 발터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갑작스런 기습 아닌 기습에 발터는 검을 휘두르다 말고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로 달려든 새를 살펴보니 새의 몸에는 푸른 빛을 띄는 전기가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하! 이제 와서 이건 또 무슨 난리란 말인가."

상식 외의 생물체의 등장에 발터는 잠시 얼이 빠졌다.

아무리 세상사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지만 그것이 왜 하필이면 지금이란 말인가. 자신이 맡은 임무를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세상이 그리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곧바로 검을 휘둘러 새를 죽이고자 하였지만 발터의 검은 허공을 헛 돌 뿐 새를 베어내지 못하였다. 한번 더 검을 휘두르자 새의 모습은 마치 환영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의 귀를 시끄럽게 만들던 전기 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방금전 일은 환상이었다는 것 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푸른 새는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발터의 고개는 여전히 정면을 향해 있다.

새가 사라진 장소의 너머, 숲의 어둠 속에서 용의 것을 닮은 눈 한 쌍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목숨까지 버리면서 달성하고자 하는 임무의 성공이 목전까지 왔는데 어째서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것일까. 전신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몸이 굳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는 용의 눈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서 발터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눈 앞의 저 자로 인해 자신의 임무가 실패할 것임을.

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을 찢어내고 발터는 노엘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번개와 같은 속도의 쾌검(快劍)이 쓰러진 소녀의 목을 향한다. 노엘은 발터의 발 밑에 있었고 아무리 손이 빠른다고 한들 이 검격을 막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였다.

팔을 아래로 내렸을 때, 발터는 노엘의 잘려진 머리가 아닌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자신의 비어있는 손목을 볼 수 있었다.

언제 몸에서 떨어졌는지 모를 손은 굳게 붙잡은 검과 함께 허공을 날았다.

이미 진창이 되어버린 몸이었기에 결손에 의한 고통은 없었지만 그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발터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 앉았다.

흐릿해진 눈에는 더 이상 생기가 없었지만 투구를 썼기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점점 어둠 속에 잠기는 시야에 잠깐이나마 빛이 그의 눈을 훑고 지나갔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노엘은 꿈을 꾸었다.

분명 자신은 방금전 까지만 해도 죽지 않기 위해 숲속을 이리저리 굴러다녔는데, 지금은 사방이 탁 트인 정원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다.

눈 앞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 밖에 없었다.

바로 앞에 놓여진 새콤달콤한 과일들의 모음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에 든 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앉아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 꼭 실제 있었던 일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지만 이런 일은 기억에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분명 이것은 꿈일 것이었다.

꿈이면 뭐 어때. 이렇게 즐겁기만 한데.

노엘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자신의 앞에 앉은 둘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는 데미안과 엘레나의 얼굴을 보니 그녀 또한 웃음에 전염되어 미소지었다.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사람의 입은 무어라 움직이고 있는데 그녀의 귀에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기에 노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 풍경에 녹아들었다.

엘레나가 자신의 앞에 놓인 딸기 파르페를 한 스푼 떠 그녀에게 가져다 주었다. 노엘은 당연히 아무런 망설임 없이 파르페를 입에 넣었고 엘레나가 먹여준 파르페는 생긴 것과 같이 그 맛이 아주 달콤하기 그지 없었다.

차가운 생크림 위에 올라간 딸기와 시럽. 오물거리는 것 만으로도 달콤한 딸기향이 입안에 가득 퍼지는 것 같았다.

좋아. 꿈에서 깨면 엘레나와 같이 파르페를 먹어야지.

***

"엘레나...파르페에...달콤..."

"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나는 이상한 잠꼬대를 하고 있는 노엘을 바라보았다. 분명 처음 발견했을 때만 해도 심각한 내상을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체내에 지니고 있는 막대한 양의 신성력 덕분인지 잠깐 사이에 많이 호전이 된 모습이다.

"잠꼬대까지 하는 걸 보면 괜찮은 것 같네... 네 덕에 살았다. 파랑아."

감사인사를 하자 노엘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던 파랑이도 부리를 주억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역시 드래곤이 만들어 낸 생명체라 그런가. 사람 말도 알아 듣고 아주 영특해.

만일 그때 이 아이가 나서주지 않았다면 노엘은 원 역사보다 일찍히 목숨을 잃었을 테니, 정말 큰 일을 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엘레나가 미리 녀석을 둘에게 붙여 놓아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원작 보다 일이 더 복잡하게 꼬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도 내가 데미안이 된 영향인 걸까.

나 때문에 많은 것이 바뀌었으니 어쩌면 그것에 대한 나비효과로 인해 원래 일어나야 하는 일들이 다른 형태로 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걸지도 모른다.

확신은 아니고 그저 내 추론에 불과했으니 나는 잠시 이에 대한 문제는 접어 두기로 했다. 무언가 다른 요인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어쨌거나 내 가설이 맞다면 결과적으로 노엘이 죽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되었으니 잘 된 일이었다.

"일단 거기서 내려오도록 하자."

나는 파랑이의 머리를 몇번 쓰다듬어 주고 내 팔 위로 녀석을 올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오르커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생을 끔찍하게 아끼는 녀석인데, 그런 녀석이 어떤 새가 노엘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본다면 파랑이를 그대로 치킨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 이 녀석이 쉽게 당해줄 것 같냐만은.

"파랑아. 지금 이건 그냥 의료행위일 뿐이니까 엘레나에게 말하면 안돼?"

나는 파랑이에게 노엘의 손을 잡으며 그리 말했다.

새에게 무슨 부탁을 하고 있냐고 누가 보았다가는 이상한 사람 취급할 수 도 있는 광경이었다만 나는 진지했다. 지켜본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녀석과 엘레나는 서로 대화가 가능한 것 같았으니 말이다. 자칫 정보가 잘못 전달될까,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말해도 내가 직접 말해야지.

엘레나가 친구랑 손 잡았다고 뭐라 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난번 연무장에서의 일을 떠올리다 보면 아무래도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그때와는 상황이 좀 달라졌기는 했다만 아무튼.

노엘의 손을 잡고 그 손을 통해 내력을 흘려보냈다.

자연 치유력이 뛰어난 노엘이었지만 그래도 옆에서 보조하는 식으로 이렇게 혈맥과 기도를 안정 시켜주면 보다 빠르게 회복이 될 것이다.

"으으..."

내가 기운을 흘려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엘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혹시 당장이라도 깨어나는 건가 싶어 기대를 하였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아니었고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이전에 하였던 잠꼬대와 비슷했다.

"쓰어요....데미안...쓰다니까요...으아앙..."

대체 뭐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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