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샛별 (33)
"성역『Sanctuary』."
오르커스가 땅을 짚으며 그리 말하자 손과 닿은 땅을 중심으로 황금빛 기운이 주위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땅을 금빛으로 물든 신성력은 순식간에 일정 면적을 덮어 버리더니 그것을 경계로 신성력은 어둠을 막아주는 벽이 되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둠이 넘어오는 것을 막아주었을 뿐 어둠 너머에서 둘을 향해 날아오는 검기를 막아내 줄 정도의 방호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역을 통과하자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검기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섯 갈래로 나뉘어져 날아오는 검기를 막고자 노엘이 오르커스의 앞에 섰다.
노엘의 손에 잡힌 검의 검신은 잠깐 사이 금빛으로 완연히 물들어 있었다. 노엘은 재빠르게 손을 놀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기를 어렵지 않게 튕겨내었다.
막아내고 난 후 좀 처럼 쉽게 멈추지 않는 손의 떨림이 상대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녔는지 약간이나마 가늠하게 해주었지만 그녀가 그로 인해 겁을 집어먹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 사실은 노엘의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었고 보다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공격을 막아내는 동안 노엘의 눈은 검기가 아닌 그 너머, 자신을 공격한 흉수를 향해 있었다.
강철 투구로 얼굴을 가린 의문의 검사.
검사의 복식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은 없었다. 가벼운 경갑에 어두운 색감의 망토. 대회에 출전한 이들이라면 대부분 이와 비슷하게 차려 입었기에 혹시나 싶어 집중해서 살펴보았지만 가문의 문양으로 보이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쉬울건 없다.
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하는 확인이었을 뿐, 눈 앞의 검사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처음 마주했을 때 부터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으니까.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신성에 이토록 강한 거부감을 들게 만든 것은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밖에 없었으니.
검사가 후속 공격을 잇기 전 노엘은 한 발자국 먼저 검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역시 남매끼리는 무언가 통하는게 있는 걸까.
노엘의 갑작스런 행동에 오르커스는 당황하는 것 대신 노엘의 움직임에 맞추어 성역을 넓혔다. 덕분에 검사가 퍼트린 어둠은 노엘의 공격이 닿는 영역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고 노엘은 손에 힘을 가득 담아 검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황금빛 오러로 벼려진 예리한 검기가 주위를 베어가르며 검사에게로 향했다.
오랜 시간동안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거목들이 노엘이 휘두른 검기에 의해 둘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엘의 검은 정작 베고자 한 것은 베지 못한 채 검사가 들이댄 검에 의해 멈춰서게 되었다. 분명 성역에 의해 약화가 되었을 터 인데 검을 받아낸 검사의 검에는 여전히 막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한번 공격에 실패했다고 당황할 정도로 노엘은 멍청하지 않았다.
처음 검사가 둘을 향해 검기를 날렸을 때의 복수인지 노엘은 거기서 딱 네번의 검격을 더해주고 뒤로 몸을 피했다.
기껏 사정권에 들어온 노엘을 그냥 가만히 내비 둘 정도로 검사는 자비로운 인물이 아니었지만 검사가 노엘과 검을 맞대는 사이 이미 오르커스의 마법은 완성되어 있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불덩이들의 세례를 피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는 노엘과 거리를 벌리는 수 밖에 없었다.
검사가 뒤로 물러나며 어느 정도 거리가 확보된것 같자, 오르커스는 노엘에게 물었다.
"할만 한 것 같아?"
"전혀요. 마치 단단한 바위를 때리고 있는 것만 같아요.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쉽게 막아내고 있어요."
"그럼 도망칠까?"
"상대가 전력을 안 보이고 있어서 잘은 모르겠는데 적어도 저희가 저 사람보다 다리가 빠를 것 같지는 않네요. 오라버니 뛰는거 자신 있으세요?"
"내가 기사도 아니고...없지."
오르커스는 아직 손에서 놓지 않은 활을 보며 그리 답했다.
그간 오르커스가 데미안에게 배운 것은 궁술이었지 기사가 되는 법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마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노엘과 같은 속도로 숲을 달릴 자신은 없다. 신체능력을 향상 시켜주는 마법은 알고 있으나 그것으로 오러 유저들과 대등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오르커스는 알고 있었다.
텔레포트라도 사용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룬프라우드 특성 상 그러한 고위계 마법을 숲에서 사용하려면 적어도 대마법사의 수준은 되어야 했기에 아무리 천재라 불리우는 재능을 가진 오르커스도 지금은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럼 지금은 이대로 버티는 수 밖에 없나.'
캠프에 수행원을 두고 오기는 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숲에서 상주하고 있다던 레인저들도 마찬가지. 저 검사가 바보가 아닌 이상 계획에 방해가 될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은 미리 치워두었을 테니 말이다.
다행이도 다른 이들에게 신호를 보낼 방법은 있었다. 문제는 신호를 보고 자신들을 찾아온다 한들 그때까지 목숨이 붙어있는냐가 관건이었다.
오르커스는 잠시 자신의 앞에 선 노엘을 바라보았다.
노엘의 얼굴에 두려움과 공포와 같은 감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 감성적으로 행동하던 모습을 잠시나마 잊어버릴 정도로 자신의 말괄량이 여동생은 매우 침착하고 차분하게 눈 앞의 적을 살피고 있었다.
공식적이지는 않다만 차기 황제로 낙점되고 나서 수 많은 목숨의 위협이 있었다. 황제와 신의 이름으로 보호받는 자리라고 하더라도 권력에 대한 욕심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오르커스는 어느 정도 살기라는 것에 내성이 있었다.
황가 내부에서의 권력에 대한 정리는 끝났기에 노엘은 이러한 암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것이 오르커스가 바라는 바 였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노엘의 모습을 보니 순간 오르커스는 혹시 황궁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는가 라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이렇게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것은 이번이 처음일 텐데 노엘의 행동은 침착하기만 하다. 마치 이런 일을 자주 겪은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노엘이 궁중암투에 엮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오르커스였기에 이러한 노엘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데미안은 대체 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친 건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저러한 노엘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분명 데미안과 만나고 나서의 일이었다.
오르커스에게 궁술을 가르쳤던 것 처럼 데미안은 노엘을 데리고 간간히 대련을 했었으니까. 아마 그때 그에게서 무언가 가르침을 받은 것 같다만 그것에 대해서 오르커스가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확실한 건 지금의 그의 눈 앞에 있는 노엘은 철 없는 여동생이 아닌 자신의 전방을 책임지고 있는 기사라는 사실 이었다.
오히려 오르커스 쪽에서 짐이 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서포트를 하여야 한다. 직접적으로 검사와 맞붙을 수 있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노엘 뿐이었으니.
오르커스는 노엘에게 여러 버프를 거는 것과 동시에 성역의 영역을 줄였다. 성역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신성력이 소모되니 장기전으로 갈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금 조금이라도 신성력을 아끼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캠프에 신호를 보낼 준비를 할테니 잠시 앞을 맡아줘. 먼저 앞서 나가는 것은 이제 자제하도록 해. 앞으로는 철저히 자리를 지키는데 집중하는 거야. 지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 살아남는 것과 우리를 도와줄 이들이 올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니까."
노엘은 오르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커스도 이 말을 전한 후 입을 열지 않았다.
거리를 벌린 뒤 가만히 둘을 지켜보고 있던 검사가 다시 행동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
오르커스는 검사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자 마자 하늘을 향해 높이 화염구를 쏘아 올렸다. 공중에서 터진 화염구는 작게 폭발했지만 그것이 남긴 소리는 숲에 있는 모두에게 전해질 정도로 컸다.
화염구의 폭발을 보자 마음이 급해진 건지 둘을 향해 달려드는 검사의 움직임에 여유는 보이지 않는다.
검사는 앞서 했던 것 처럼 검기를 날리거나 어둠을 움직이는 행동은 하지 않고 오직 검에 검기를 두른 채 오르커스와 노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성역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검사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라는 것이 없었다.
방금전 있었던 짧은 접전으로 후위가 상당히 성가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검사의 검 끝은 오르커스를 향하였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검사를 보자 오르커스는 곧바로 방어벽을 전개함과 동시에 공격을 준비했지만 당연하게도 그보다 앞서 나선건 노엘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히자 그로 인한 충격파가 숲을 뒤흔들었다.
"큭!"
"...."
이미 위치가 알려졌으니 검사로서는 더 이상 가릴게 없었다. 이전의 교전이 장난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검사는 아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힘으로 노엘의 검을 내리찍었다.
성역과 오르커스가 미리 걸어둔 버프로 인해 전반적으로 능력치가 올라간 노엘과 반대로 성역의 영향으로 어둠을 꺼내지 못하는 검사의 힘겨루기는 놀랍게도 백중세를 이루었다.
반동이 거셌는지 노엘의 입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색도 그리 좋지 않았는데 이것은 몸에 무리가 가서가 아니라 자신이 유리한 조건이었음에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르커스의 견제를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기에 힘겨루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오르커스가 쏘아대는 화염구 사이로 노엘은 검을 휘둘렀다. 여러 발 쏘아진 화염구들은 그 크기는 작지만 검사의 눈으로 부터 노엘의 검로를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검사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고 불덩이들 사이에 숨겨진 비수를 곧장 찾아내었다.
검사의 검에 맺힌 붉은 빛의 오러가 불길하게 타오르더니 세차게 뽑아져 나온 검기는 자신을 향한 모든 화염구들을 지워버렸다. 당연히 노엘의 검 또한 다른 화염구들과 같이 검기에 밀려 뒤로 튕겨나갔다.
검사가 노엘의 검을 떨쳐내자 곧바로 오르커스가 추가 공격을 퍼부었지만 눈 앞의 검사는 그것을 또 아슬아슬한 수준에서 피해나갔다. 유유히 몸을 피하는 그런 그의 모습은 꼭 둘의 합격술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일정거리 이상으로 간격이 벌어지자 노엘은 오르커스가 앞에서 하였던 말 처럼 접근하는 것을 멈추고 철저히 오르커스의 앞을 지켰다.
그녀는 검사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자신의 활동 범위를 성역 내부로 제한시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성역 밖으로 나오는 순간 검사는 어둠을 꺼낼 것이었고 그리하면 단 한번의 공격이라도 그것을 받아내는 노엘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으니.
그렇게 노엘이 좀 처럼 성역 밖으로 나가려 하지를 않자, 검사는 공격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도 성역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검사가 성역 안으로 들어오자 노엘과 오르커스는 잠시 서로 눈빛을 주고 받더니 먼저 공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아까전과 마찬가지로 검사는 자신에게로 오는 공격들을 모두 파훼 시키는 것에 성공했지만 이것이 둘에게 있어 의미 없는 소모전은 아니었다.
"계속 몰아붙여!!!"
오르커스는 자신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는 것을 보았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법들을 난사하였다. 성역을 유지하는 것에 더불어 아까부터 쉬지 않고 마법을 부리고 있었으니, 저쯤 되면 정신적인 피로도로 인해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오르커스의 얼굴은 피곤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은 아까부터 검사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노엘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경우는 있어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지친 기색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막대한 신성력을 품고 있는 오르커스와 노엘에게 있어 가장 자신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체력이었다.
눈 앞의 상대도 신성력을 사용하는 일종의 성기사라 할 수 있겠다만 그렇다고 해서 가지고 있는 신성력의 총량은 둘과 비교할게 되지 못하였다.
신성력이 가지고 있는 치유의 힘은 이들을 쉽게 지치지 않는 몸으로 만들어 준다. 그렇기에 둘은 이 강점을 최대한 살리기로 하였다.
방어를 하는 쪽에 있어 지치지 않는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검사와 부딪히고 나서 둘은 알 수 있었다. 상대의 기량이 둘의 힘을 압도하다 보니 방어에 전념한다 한들 언제 죽을지 모를 위기에 처한 건 매한가지라는 사실을 말이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듯, 그래서 둘은 반대로 검사에게 먼저 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백날 공격을 한다 한들 둘의 힘 만으로 검사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오르커스와 노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둘에게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도와줄 이들이 올 시간을 버는 것이었지 검사를 죽이는 것은 처음부터 목표로 둔 적이 없었다.
둘의 목적은 상대로부터 흐름을 가져와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장을 이끄는 것.
선수권을 가져간다고 하여 꼭 흐름이 둘에게 넘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끊임 없이 이어지는 공격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흡!"
잔뜩 기합이 들어간 노엘의 검이 검사의 망토를 스친다.
검사는 그대로 몸을 돌려 검격을 날리느랴 비어버린 노엘의 우측을 노렸지만 그 빈 공간에는 이미 오르커스의 마법이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오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공격에 검사는 성역 밖으로 몸을 피했다. 노엘 역시 다시 뒤로 물러났고 검사가 다시 성역 안으로 들어오자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검사의 공격이 둘에 비해 위력적인 것은 맞다만 그렇다고 노엘과 오르커스가 약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둘의 공격은 충분히 상대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였고 이러한 공격이 쉴 새 없이 몰아치니 자연히 검사의 행동에는 제약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고강한 무예를 지닌 검사라 한들 목숨은 하나였으니까.
어느 한쪽의 공격도 무시할게 되지 못하니 결국 공격하는 인물이었던 검사가 반대로 수비를 하게 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상대가 공격에는 공격으로 맞대응을 하니 그리 보일 뿐이었다.
"빌어먹을...."
그 결과. 여태껏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검사의 입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가득 담긴 욕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검사도 지금 상황이 자신에게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상황은 둘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