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샛별 (30)
"이제는 정말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이죠...."
수레를 끌고 있던 로빈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해수의 탑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로빈이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그의 옆에 새로운 해수의 사체가 놓아진다.
이번에 데미안이 잡아온 것은 큼지막한 어금니가 인상적인 검치호였다. 산맥에 뿌려져 있는 마력의 영향을 받아 커진 그 덩치는 일반적인 검치호와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살아있을 적 얼마나 강대한 힘을 가졌을지 사체에 남아있는 잔여 마력이 이를 알려준다.
어림잡아 최소 마물급.
만약 이런 녀석이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면 곧바로 줄행랑을 칠 자신이 있는 로빈이었지만 죽어있는 이상 도망칠 필요는 없다. 허릿춤에서 단검을 꺼낸다. 항상 하던대로 목에 칼집을 내는 것으로 사체의 피를 빼내기 시작했다.
높이 쌓인 해수의 탑에는 이제 새로운 입주민이 들어설 자리 따윈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옆자리에 동석을 해야할 것 같은데, 딱히 비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수레 위에서 말도 몰지 못하는 신세가 될 것 같아 이쯤에서 멈춰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결국 로빈은 참다 못해 그웬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단장님! 아무래도 이건 너무 심한거 아닌가요?! 이대로 가다가는 레기온에 사는 맹수들의 씨가 마르게 생겼어요!!"
"뭐, 어떤가. 도련님께서 오랜만에 의욕적이신게 보기 좋기만 한걸."
로빈은 이제는 검을 집어넣고 수레에 기대어 쉬고 있는 그웬에게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그에게 있어 그리 달갑지 않은 소리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인물 중 유일하게 대회 우승 이력이 있는 이가 바로 그웬이었으니 그가 하는 말이라면 데미안도 멈추지 않을까.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웬은 로빈의 말에 허허롭게 웃으며 데미안의 행동을 긍정했다.
"산맥은 넓다. 이 정도 가지고 생태계 걱정하기에는 아직 일러. 이건 레기온에 서식하는 해수들의 발톱의 때 만큼도 안돼."
"그래도..."
"여태껏 자신의 능력을 밖으로 내보이지 않으셨던 분이다. 그런 분이 이번 대회만큼은 단단히 마음을 먹으신 것 같으니 원하시는 대로 하게 두어라. 자 보아라. 즐거워 보이시지 않느냐?"
무뚝뚝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밝은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답하는 그웬의 모습에 로빈은 그가 데미안을 말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데미안이 사냥감을 많이 잡으면 잡을 수록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지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이었으니 데미안을 많이 아끼는 그웬의 입장에서는 굳이 그의 행동을 제재할 필요는 없던 것이다.
로빈은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무 사이를 뛰놀고 있는 데미안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여태 어떻게 참고 살아온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는 이 숲을 무대 삼아 마음껏 날뛰고 있었다. 한 발의 화살이 쏘아지면 둘 이상의 짐승이 잡히고 그의 손에서 섬광이 일때마다 숲의 어둠 속에 숨어있던 녀석들이 하나 둘 쓰러진다.
그 모습을 보자 로빈은 그웬의 말에 뭐라 답할 수 가 없었다.
데미안이 그간 자신의 재능을 밖에 내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견습 기사들이 기사단 훈련에 참가하게 되면 제일 먼저 경험하게 되는 것이 소가주의 재능이다.
비록 견습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지만 '기사'라는 초인에 가장 가까운 이들이 바로 견습기사들이다. 모래알 같이 많은 검사들 사이에서 거르고 걸러져 선택받은 이들이 견습기사이었지만 데미안의 곁에 있으면 이들도 떨어져 나간 이들의 감정을 공감하게 된다.
천재(天材).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
땅바닥에 붙어 사는 짐승이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 부러워 할 수는 있을망정 질투를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이 압도적인 격의 차이로 인해 질투심 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데미안의 앞에서는 태양 앞에 세워둔 성냥과 같은 로빈의 재능이었지만 그런 그라도 남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내보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과시욕이라고 한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다만 기사들이 목숨과도 같이 중요시 여기는 명예라는 것은 결국 자기자신이 아닌 타인에게서 인정받고 치켜 세워져야 생기는 것이었으니 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사라는 족속들에게서 떠나갈 수 없는 것이랄까.
크라우스가 명문가로 여겨지는 것도 전부 그들의 능력을 남들에게 증명해냈기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제국 제일의 검술 명가의 기사로서 자신이 가문의 이름에 걸맞는 기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로빈의 눈은 언제나 위를 향하고 있다.
한낱 가문의 견습기사가 이러한데 그 가문을 등에 짊어진 소가주라고 한다면 오죽할까.
자의였든 타의였든 간에 그는 언젠간 자기자신을 증명해야 할 것이었다. 가신들의 앞이 아닌 가문의 울타리 너머의 이들에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냥 대회는 데미안의 능력을 보여주기에 좋은 기회였다. 역사도 깊고 확실하게 실적이 눈에 보이는 대회였으니 단번에 그간 아무런 특색 없던 귀공자를 남부의 인기인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기에 로빈은 그웬의 말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알고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친거 아닌가요?'
이어지는 뒷말을 꾹 삼킨 채 로빈은 입을 다물었다.
이유가 납득이 간다고는 하나 지금 자신의 뒤에 쌓인 해수의 사체가 절대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으니, 거기에 더불어 이 해수들의 시체가 쌓이게 된 원인이 데미안의 약혼녀에 있다는 점이 로빈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뭐, 그녀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일이었겠지만.
여태껏 아슬아슬하게 눈에 띄지않는 행보를 이어가던 데미안이 이렇게 한번에 노선을 바꾼 원인이 그의 약혼녀에 있다고는 그웬도 로빈도, 데미안 본인도 부정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보다 이 이상 실었다가는 말 들이 무거워서 못 민다니까요."
"그러면 네가 뒤에서 밀면 되지. 넘치는 힘 뒀다가 어디에 쓸려고 그러는 거냐. 어차피 지금 껏 움직이신 건 도련님이지 네가 한게 칼집 내는 것 말고 더 있어?"
"....끝까지 한마디도 안 져주시네. 알겠어요. 알겠다구요. 이거 나중에 그레이엄 자작가에서 항의 들어와도 전 책임 안 질겁니다. 저는 두분 말렸어요?"
"자식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알았다."
입으로는 데미안의 행동을 긍정했지만 그 역시 지금껏 데미안이 잡아온 양이 이례적이라는 걸 인지하고는 있었는지 투정 부리듯 말하는 로빈의 말을 수긍했다.
매해 대회에 참가하는 그가 보기에도 데미안이 잡아온 해수의 사체는 역대급 수준이었다. 그 양은 작년도 우승 기록을 가볍게 웃돌았는데 특히 이번 대회에 많은 이들이 참가한 것을 감안 하자면 이 이상의 기록을 없을 터였다.
로빈의 말 대로 레기온에 살아가고 있는 해수의 씨를 말릴 생각으로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사실상 이미 우승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
그렇다고 그웬이 데미안을 말릴 생각이 있는 것은 또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태껏 강행군을 해왔으니 잠시 휴식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여기에는 로빈에 계속되는 칭얼거림이 한 몫 했지만 아무리 뛰어난 체력을 가진 데미안이라고 하더라도 굳이 무리를 하면서 까지 대회를 뛸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웬은 잠시 숲을 살피더니 로빈에게 말했다.
"이번에 도련님께서 돌아오시면 이제 충분하다고 말해라."
"네? 아니. 아까 제가 말 할때는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더니만..."
"됐고. 그런데 도련님께서 계속 하시겠다고 한다면 막지는 마라. 이런 것에 체력 분배 헛으로 하실 분이 아니시니."
"에에...알겠습니다."
로빈은 그런 그웬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영혼 없이 답했지만 그웬의 이런 말을 기대하고 있었던 터라 제자리로 돌아가 언제라도 자리를 떠날 수 있게 어질러진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녀석..."
헐레벌떡 뛰어가는 로빈의 모습에 옛 기억이라도 떠올린 걸까. 그웬은 그 답지 않게 푸근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가는 로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그웬과 로빈은 얼굴을 굳힌 채 숲의 어느 한 곳을 바라보았다.
"단장...!!"
"알고 있다."
다급해 보이는 로빈과는 다르게 그웬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다만 언뜻 침착해 보이는 그 목소리에는 절제된 긴장감이 담겨있었다.
그웬은 서둘러 작은 가죽 주머니에서 동물의 뿔로 만든 것 같은 호각을 하나 꺼내 들었다. 숲의 어둠에 몸을 숨긴 데미안은 아무리 뛰어난 기감을 지니고 있는 이라 할지라도 놓칠 정도 였으니 호각을 불어 그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는게 먼저였다.
둘의 기감에 동시에 걸려든 불가사의한 마력은 여태 상대해왔던 해수들이 뿜어내는 것에 비할바가 되지 않았다. 비록 바람에 실려온 잔향에 불과했지만 지금 이들이 서 있는 장소가 마물들의 서식지인 룬프라우드 산맥인 이상 이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고 한다면 데미안이 있는 곳과 정반대의 방향에 있다는 것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호각소리를 들은 데미안이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났다.
"소가주님! 어서 캠프로....!!!"
로빈은 데미안을 발견하자 마자 그를 향해 소리쳤지만 데미안은 그런 로빈의 외침을 뒤로 한채 어느 한 방향을 향해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그들이 느꼈던 마력의 근원지를 향해.
데미안은 호각 소리를 듣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마물의 마력을 느끼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나는 데미안의 모습에 그웬은 곧장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단장님?!"
원칙대로라면 곧바로 캠프로 돌아가 보고하는 것이 맞았겠지만 최고결정권자1, 2가 차례대로 현장으로 향하니 로빈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충분한 전력을 갖추었을 경우 빠르게 진압하라는 말도 적혀 있다만.
"으아아...미치겠네..."
로빈은 해수의 사체가 가득 실린 수레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이곳에 방치했다가는 다른 해수들이 몰려와 금세 난장판이 될 터. 앞서 떠난 두사람이 그 사실을 모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만 그럼에도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간 고생한게 있는데...'
그렇다고 이런 긴급상황에 혼자 남아 해수 사체나 지키고 있는 것은 못할 일이었다.
"에혀...난 모르겠다."
그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숨을 한번 내쉬며 그리 짧게 말하고는 로빈도 앞서 떠난 둘과 마찬가지로 수레를 숲속에 내버려 둔채 마력의 잔향을 쫓아 발을 움직였다.
***
"하아...하아...."
나무에 기댄채 검을 든 소년은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의 앞에 선 괴물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난입하여 가문의 기사와 수행원을 단번에 찢어버린 괴물.
그 장면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려 소년에게 있어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함부로 지워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용기를 끌어내어 검을 치켜들고는 괴물의 눈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 소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기합이라도 지르며 검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공포에 짓눌린 탓에 그마저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하기야 자신의 아버지가 자랑하면서 붙여준 기사를 간단하게 씹어먹은 괴물인데 이제 막 검을 든 새내기가 휘두른다 한들 생채기라도 낼 수 있을까.
다만 이대로 하찮게 죽고 싶지는 않아 겨우겨우 검을 들고 서있는 것이었다.
원숭이를 닮은 괴물의 얼굴이 기이하게 움직인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것만 같아 극심한 모멸감을 주었지만 기사를 씹어먹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마르지 않은 피가 괴물에 대한 소년의 공포심을 더욱 키워주었다.
괴물은 소년을 죽이지 않았다. 그저 내려다 보며 웃고 있을 뿐.
소년이 용기를 내어 든 검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알게 해주려는 것 처럼 조용히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괴물의 눈동자 없는 샛노란 눈을 보고 있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아버지의 등살에 떠밀려 별 생각 없이 대회에 참가했던 것부터 시작해서 집 안에서 기르던 개에 대한 쓰잘데기 없는 감상까지.
온갖 생각이 몇초 안되는 짧은 시간 안에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 쳤다. 그 속에는 여태 검에 인연이 없던 자신을 이런 곳에 떠민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영지 내에서 가장 신임하는 기사를 붙여주며 숲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자신에게서 눈을 때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동시에 투영되었다.
폭풍이 사그라드니 결국 소년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이러한 상황에 내몬 눈 앞의 괴물에 대한 순수한 분노였다.
"하아...이런 썩을..."
분노가 커지면 커질 수록 이상하게도 소년의 머리는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어지럽던 호흡을 고르게 하고 소년은 다시금 검을 든 손에 힘을 준다.
머리에 잡념이 사라지니 몸을 지배하던 압박감도 사라졌는지 이전보다는 강하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만 몸을 조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뿐 상황은 여전히 소년에게 좋지 않았다. 마음을 조금 다잡았다고 해서 없던 힘이 솟아나는 것은 아니었으니.
겁에 질려있던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는지 괴물은 더이상 기다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소년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검을 최대한 몸에 붙여 잡았다. 무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오러를 각성하지 못한 소년이었기에 강철과도 같이 단단한 괴물의 피부에 상처를 낼 가능성은 없었지만 그런 자신이라도 놈에게 피를 보게 해줄 수 있는 부위가 있음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놈은 여태껏 물어서 사람을 죽였다. 그렇다면 눈 하나 정도는...'
자신이 지금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 소년은 알 수 없었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괴물의 샛노란 두 눈 뿐. 물어 뜯기는 순간 곧바로 검을 찔러넣어야 했기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괴물과 소년의 거리는 서서히 좁혀져만 갔다.
그렇게 긴장감이 극에 달했을 때. 이유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지금 괴물이 자신에게 달려들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괴물은 소년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다만 소년의 예상과 다른점이 있다고 한다면 여태 입으로 물어 죽였던 이전의 행동과는 다르게 소년을 긴 손으로 낚아채듯 잡아올린 것이었다.
"젠장..!!"
예상과 다른 괴물의 행동에 소년은 서둘러 저항을 하려 하였지만 앞서 예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년의 검이 괴물의 살갗에 상처를 입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격렬한 저항은 괴물의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으아아아아!!!"
이것이 고통에 의한 고함인지 죽음을 앞둬서 생긴 용기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소년도 알 수 없었다. 소년은 자신을 붙잡은 손을 연신 검으로 내리쳤다. 안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포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지러운 시계 속에서 문득 소년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괴물의 얼굴을 보았다.
그 괴물은 웃었다.
방금전 자신을 나무로 몰아 겁에 질린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괴물이 여태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그 사실에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검을 한번 흘겨보고는 몸에 힘을 빼었다. 손에 들린 검은 마지막 대항 수단이었지만 소년은 쓸데없는 미련을 버리기로 하였다.
괴물의 머리와 거리가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된 계산은 되지 않았다. 그저 앞서 보았던 괴물의 팔길이 만큼 저 멀리 떨어진 거리에 괴물의 노란빛 눈이 보인다는 것 밖에 없다.
처음 계획했던 것 만큼 확실한 작전은 아니었지만 소년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괴물의 눈을 향해 검을 던졌다. 운 나쁘게 다른 곳에 맞고 튕겨 나갈지도 모른다만 어찌되었건 이것이 소년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
기분 나쁜 짐승의 울음소리가 숲에 울려퍼진다.
귀를 찢는 듯한 이 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소년은 자신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여기에 기뻐할 시간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괴물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지만 그것이 몸을 추스르는 시간은 빨랐고 검을 뽑아내는 그 즉시 곧바로 소년을 향해 입을 벌려왔다.
죽음을 눈 앞에 두어서 그런가. 소년은 그 순간 온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만약 소년에게 시간을 느리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한들 소년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소년의 몸은 괴물에게 단단히 잡혀있었고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괴물의 입은 천천히 소년을 향해 다가왔으니.
죽음을 앞둔 소년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애초에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니 검과 함께 미련도 던져버렸다. 다만 소년은 그 느려진 세계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어?"
괴물의 머리 뒤로 한 인영이 보인다.
어둠에 가려져 모든 것이 검게 보이는 이였지만 어둠 속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두 눈은 마치 서광과도 같았다. 그 눈을 마주하자 소년은 괴물과 처음 마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압도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그와 다른 안도감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서걱
결과적으로 괴물의 입이 소년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괴물이 소년에게 다가오는 것보다 괴물의 목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먼저였다.
어둠에서 뻗어난 검이 괴물의 목을 베자 뜨끈한 액체가 소년의 눈을 가렸다.
목이 떨어졌으니 통제가 되지 않는 몸 또한 땅으로 쓰러진다. 그렇게 지상으로 떨어지는 부유감과 함께 소년의 정신은 어둠 속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흐려지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소년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눈을 머리에 새기며 천천히 흐름에 몸을 맡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