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샛별 (29)
하릴없이 숲만 바라보고 있는 알폰스와 엘레나. 회장 안에 저 둘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몇인데 이 둘은 데미안의 귀환 말고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같은 자리에 서 있던 루이스는 아무래도 좋았다. 전날 데미안에게 부탁 받은 것도 있고 하니 두사람이 적적한 것을 원한다면 최대한 그 분위기를 지켜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것에 방해되는 요소는 최대한 제거한다.'
무엇이 방해가 되는지는 굳이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신의 등 뒤로 느껴지는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만 하더라도 어찌해야할지 충분히 답이 나왔으니까.
원래 이러한 자리에 간섭하는 것은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기사로서 주군의 명을 이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 무엇보다 주군으로 섬긴 이래 처음으로 받은 명령이었기에 루이스는 그의 말을 충실히 이행할 생각이었다.
루이스는 잠시 어제 밤 데미안과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오래만에 본 그의 얼굴은 이전과는 다르게 많이 풀어져 있었다. 본래 성격이 사납거나 날카로운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전에는 검집을 밖에다 버려둔 검과 같은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검을 검집에 넣다 못해 아예 천으로 꽁꽁 싸맨것만 같았다.
"루이스 경. 학과전 준비로 내일 있을 사냥대회에 불참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기사가 주군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댁은 아직 기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기사학부 생도는 모두 준기사로 인정됩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검은 용 기사단에 입단할 예정이니....."
"알겠습니다. 그만 말 하셔도 됩니다."
부탁.
루이스가 데미안과 알고 지낸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입에서는 처음으로 들어보는 말이었다. 언제나 홀로 모든 것을 해내는 사내였으니, 솔직히 말해 데미안이 루이스의 손 까지 빌릴 정도로 주변에 인선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희귀한 일이다.
남들에게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듣는 루이스이다만 그녀도 나름의 로망 정도는 있었다. 딱히 특별한 것도 아니다. 그저 기사로서 주군의 명을 수행하는 것. 하지만 그녀의 주군이라는 인간은 앞서 말했다 싶이 여태 단 한번도 사소한 부탁 하나 하지 않았다.
이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건 맞는지 그녀는 이러한 기다림에 매우 약한 편이었다. 그러니 이번 데미안의 말에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열정적인 얼굴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표정의 변화가 매우 드문 루이스 였기에 남들이 보기에는 다를게 없어 보였지만, 하여튼 그러하였다.
"제게 어린 동생이 있다는 것은 기억하시죠? 이번 대회에 그 아이와 제 약혼자가 동석하게 되었습니다."
"알폰스 도련님과 에델바이스 영애를 말씀하시는 것이 군요."
"네. 제가 부탁드릴 건...간단한 호위 임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호위. 혹시 내일 회장에서 무슨 일이 터지기라도 하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거창한 건 아닙니다. 다만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어서. 아시다 싶이 내일 저는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대회를 통솔하셔야 하니 그러한 자리에 계실 수 없을 테고. 아무래도 그 둘만을 회장에 내비두고 가자니 조금 불안해서 말이죠."
데미안은 조금 쑥스럽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형이 제 동생 걱정을, 남자가 자기 여자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루이스는 여전히 열정을 불태우는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알폰스는 똑똑한 아이지만 여태 다른 사람들 앞에 서 본 경험이 없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면 놀랄 수도 있으니 경이 옆에서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엘레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리는 데미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제 입으로 말하기를 부끄러워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루이스가 빤히 바라보고 있자 데미안은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서둘러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보니 머릿속에서 말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엘레나는....아름다워요. 아니다, 귀엽다는 말이 더 어울릴려나."
".....갑자기 여기서 자랑을?"
뜬금없이 왠 쌩뚱맞는 소리를 하는 데미안에게 루이스는 눈을 휘둥그래 뜨며 말했다.
"아..아..그..그러니까!! 엘레나에게 흑심을 가진 놈들이 접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여간 두 사람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경의 선에서 적당히 정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크게 동요하는 데미안의 모습에 루이스는 만족스런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아하니 둘의 사이가 여간 각별한게 아닌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무언가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 같아 루이스는 속으로 웃으면서 데미안에게 물었다.
"그렇게 걱정이 되신다면 공자께서 직접 옆에 계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공자님께서 대회에 뜻을 두고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대회의 성적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편이라는 것은 루이스가 잘 알고 있었다. 저렇게 걱정이 많은 걸 보아하니 차라리 둘을 같이 있게 해주는게 나아 보이는데. 대회야 데미안이 몸이 안 좋다거나 핑계 거리를 만들어 빠지면 그만이었다.
그런 루이스의 질문에 데미안은 잠시 멈칫하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렇죠. 예전이라면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이전 처럼 설렁설렁 움직일 생각은 없습니다."
멋진 모습 보여줘야죠. 라고 짧게 말을 흘리며 데미안은 자리를 떠났다.
이 때였다. 루이스가 이번 대회의 우승자를 확신할 수 있게 된 것이.
여태껏 자신이 봐왔던 그 어느 때 보다 밝은 빛을 내고 있는 데미안의 모습에 루이스는 그가 이번 대회에서 자신의 실력을 남들에게 가감 없이 보여 줄 것임을 확신했다.
***
루이스는 잠시 둘에게 먹거리를 가져오겠다며 말하고는 발코니를 나왔다.
둘은 데미안이 돌아올 때 까지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는게 뻔히 보였다. 다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저 멍하니 숲만 바라보기는 어색하니 뭐라도 해야될 것 같아 꺼낸 이야기였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그녀가 밖으로 나올 구실에 불과했다.
밖으로 나오고 보니 다들 뭐가 그리 궁금한게 많은지 한곳으로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던 이들 중 유일하게 엘레나와 오래 있었던 외부인이었으니 엘레나, 본인과 마주했을 때와는 다르게 루이스의 앞에서는 자신들의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는 것 같아보였다.
그녀는 발코니를 나오자 마자 알폰스와 엘레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커튼을 쳤다. 그러고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관중들을 한번 훑어 보았다.
루이스가 아무말 없이 자신들과 눈을 마주하고 있자 사람 한명과 수십명의 기묘한 대치가 시작되었다. 결국 루이스의 근처에 서 있던 몇몇 이들이 자신의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저, 루이스 경.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먼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던 남자는 갑자기 말을 하기를 그만두었다. 이내 차례대로 그의 뒤에 있던 이들의 입이 하나 둘 다물어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갑작스런 변화에 대한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이들도 서서히 바뀌고 있는 공기의 흐름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한때 남부제일의 무재(武材)라고 불렸던 그녀다.
그런 루이스가 뿜어대는 기운은 일반인이 받아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잠시나마 맞서려고 하던 이들도 있었지만 그녀가 그리로 고개를 돌리자 이내 금방 꼬리를 내리고 발코니에서 시선을 돌리었다.
단번에 그 시끌벅적하던 회장이 조용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만큼 그 크기가 넓은 연회장이었지만 루이스가 뿌려댄 기세가 워낙 강렬한지라 이를 느끼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다들 조용히 내색하지 않은 척 최대한 발코니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루이스가 다른 이들에게 '경' 이라 불리우며 기사 취급을 받고 있지만 아직 그녀는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받지 않은 아카데미의 학도였다. 특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 수많은 천재들이 모여있는 에스텔리아 아카데미에서 3년 연속 기사학부 차석을 해왔다는 것 일까나.
어찌되었든 일개 아카데미 재학생이 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방금전 행동은 너무 과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기서 그녀를 욕하거나 질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반발하는 이가 한명 쯤은 있을 법한데 모두 루이스가 벌인 일에 대해서 용납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것이 이곳 남부에 터를 잡은 이라면 루이스의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바보는 없으니 말이다.
황도에서 황제가 곧 법이 듯 남부에서는 크라우스가 곧 법이다. 같은 제국이라 하더라도 남부에서만큼은 크라우스의 위상이 결코 황가에 뒤지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제국에 속해 있으나 그들의 주인은 황제가 아닌 크라우스의 이름이었다.
그레이엄 자작가의 장녀가 크라우스의 비호 아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이전부터 익히 들려오던 이야기였다.
폐쇄적인 크라우스의 소가주가 그녀와 만큼은 연락을 하고 지낸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리고 그렇게 소문으로만 들려오던 이야기는 오늘에서야 사실임이 밝혀졌다.
그동안 한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크라우스 백작가의 차남이 루이스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었고 소가주의 약혼자 마저 그녀와 함께하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이들이 루이스 앞에서 꼬리를 내려야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방금전 좌중을 흔들던 기세가 범 없는 산에 여우가 주인 행세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만 이들에게는 루이스의 행동이 그러한 의미가 아님을 알고 있다.
루이스 그레이엄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은 편이다. 괜히 남부제일의 무재라는 별명이 붙었겠는가. 그만큼 그녀가 다른 누군가와는 다르게 대중들에게 있어 많은 인상 깊은 활약을 보여주었다는 증거였다.
루이스라는 인물의 인품, 실력은 적어도 남부에 자리 잡은 이들에게 있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 그만큼 그녀가 아무런 이유 없이 대뜸 기세를 일으켜 위협을 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은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루이스의 행동이 단순한 위협이 아닌 누군가가 보내오는 경고였음을 알았기에 이들은 조용히 눈을 내리 깔았다.
루이스가 발걸음을 옮기자 너도나도 할거 없이 모두가 자리를 비키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회장 전체에 내려앉았지만 루이스는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드는 건지 그녀의 발걸음은 경쾌하게까지 느껴졌다.
'임무 완료!'
그야 지금 루이스의 머릿속에는 데미안이 맡긴 임무를 해결했다는 것 밖에 들어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미약하긴 하지만 살기까지 담아 단단히 겁을 줬으니 목숨을 내놓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다들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데미안이 루이스가 이렇게 까지 강경하게 움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어찌되었건 그녀는 데미안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셈이다.
잠시 회장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루이스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자기들 만의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의 곁에 접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회장은 루이스와 나머지 사람들, 이렇게 단 둘로 나뉘어 진 것만 같았다.
더는 느껴지지 않는 시선과 소음에 루이스는 만족하며 음식이 준비되어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일전에 들은 것이 있어서 그런가.
그녀는 접시를 하나 들어 단 것 위주로 먹거리를 챙겼다.
준비된 다과의 종류가 여러가지여서 그런지 종류마다 하나 씩 만 챙겨도 접시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가 되었다. 혹여 먹다가 목이 매일 수 있으니 가볍게 입가심 할 만한 음료를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느정도 구성이 끝나자 그녀는 뿌듯한 얼굴로 다시 발코니를 향해 걸어갔다. 여전히 겉으로 보기에 변함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 정도는 티가 난다. 그렇기에 루이스는 발코니에 들어서기 전 다시한번 뒤를 돌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녀가 발코니에서 나왔을 때와는 다르게 한명도 루이스와 눈을 마주하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제 할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 광경에 그녀는 마치 이대로만 하라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커튼 뒤로 사라졌다.
그렇게 루이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속으로 나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