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샛별 (28)
"음, 다음에는 어디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까? 그웬 경."
"외측에 남아 있는 해수는 이제 없는 것 같습니다. 남아있는 흔적도 오랜된 것이 전부 입니다."
"그렇다면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도록 하죠. 너무 깊게 들어갔다간 레인저들이 제재를 가할테니."
데미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땅바닥에 널부러진 사냥감을 수습하며 숲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곁에 서 있던 그웬 경은 잘려진 해수의 머리 중 하나를 붙잡더니 그대로 수레에 매달아 땅을 쓸게 만들었다.
저렇게 끌고 다닌다면 이후 부산물로서의 가치가 크게 떨어질 테지만 그것은 그들이 신경쓸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저것을 대체할 것은 수레에 산더미 처럼 쌓여있었으니 그 많은 것 중 하나 정도 빠진다고 해도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하아..."
수레를 끄는 역할로 차출된 견습 기사 로빈은 점점 수레에 쌓여가는 마수의 산을 바라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 대회에서도 같은 보직을 맡은 경험이 있어 지원한 것이었지만 어째 그가 생각하던 그림과는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항상 적당히 쉬엄쉬엄 하시던 분이 올해는 또 왜 저렇게 열성적이신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지각을 한 것도 그렇고 평소에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데미안이었기에 무엇이 그를 달리게 만드는지 이곳에 있는 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그 이유에 대해 짐작 하고 있었다.
"이게 사랑인건가..."
"네?"
"으앗! 깜짝이야! 소가주님! 기척은 좀 내고 다녀주세요!"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데미안은 방금 잡은 것으로 보이는 늑대 한 마리를 어깨에 들쳐매고 있었다. 정확히 미간을 꿰뚫고 들어간 화살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그가 잠깐 정신을 놓은 사이에 그새 또 한마리를 잡아 온 모양이었다.
데미안이 늑대를 내려 놓고 다시 수레를 떠나자 로빈은 그가 두고 간 늑대에 박힌 화살을 빼내어 정리를 하고는 단도를 들어 다시 한번 늑대의 목에 칼을 찔러 넣었다.
수레 위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물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이 짓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으니 로빈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길 것만 같았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자 주변 풍경으로 시선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해수의 피로 얼룩진 학살의 현장 뿐이다.
원래 이런 역할은 비위 좋은 사람이 뽑히는게 순리였기에 로빈의 비위가 약한 편은 아니었다만 쉬지 않고 움직이다 보니 육체적인 피로와 정신적인 피로가 겹쳐져 그런건지 평소보다 빨리 지치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로빈의 눈 앞에 있는 이들은 지칠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사냥을 진행하고 있다.
조금 여유를 가지더라도 이대로만 간다면 우승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 일텐데. 대체 왜 저렇게 서두르는 것일까. 이대로 가다가는 다른 이들이 사냥할게 없어서 우승할 판이다.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숲에 도착한 데미안이었지만 그가 다른 이들과 합류하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늦게 합류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건지 대회가 시작된 이래로 이들이 휴식을 가진 적은 없었다. 거침 없이 앞을 향해 전진을 해 나갈 뿐.
완숙한 초인이나 다름 없는 데미안과 그웬에게 있어 이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로빈은 아직 견습 기사의 신분. 견습 기사라는 이름이 붙은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검은 용 기사단에 입단할 만큼 나름 견습 기사들 사이에서도 특출난 편에 속하는 로빈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둘의 페이스에 맞춰 따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평소였다면 틈틈히 부하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쉴 시간을 주었을 데미안이었지만 그것도 오늘 만큼은 예외인 모양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기에 로빈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작년처럼 조용히 풍경을 즐기려고 한 자신에게 내려진 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여 몸을 풀고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해수의 산을 정리하며 다시 수레를 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살기가 담긴 날카로운 시선이 피부를 할퀸다. 이를 눈치채자 마자 로빈은 서둘러 데미안을 불렀다.
"소가주님 저곳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살 한대가 숲을 가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일말의 단말마도 없었다.
무언가 터져나가는 파열음이 한차레 숲을 울리고 나니 더이상 이전과 같은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로빈은 시체를 회수하기 위해 수레에서 내렸지만 데미안이 아직 활을 거두지 않은 것을 보곤 안장에 고여 두었던 화살통을 하나 꺼내 데미안에게 건내었다.
"고맙습니다. 로빈 경."
머리를 끌고 다닌 보람이 있는 건지 사방에서 크고 작은 시선들이 느껴진다. 이에 로빈은 다시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허리춤에 둘러매고 있던 칼을 안장에 걸어두었다.
계속해서 해수의 시체를 들고 다니다 보니 허리춤에 들린 칼은 걸리적 거리기만 할 뿐 영 쓸 때가 없었다.
여러 무리가 동시에 이곳을 찾아온 건지, 귀에 들리는 울음소리가 제각각이다.
그만큼 많은 해수들이 이 수레를 노리고 왔다는 말이었지만 이들의 얼굴에 걱정이 되는 듯한 기색 따윈 보이지 않는다. 데미안과 그웬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고 로빈은 더는 공간이 보이지 않는 수레를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거 자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이미 한계에 달한 것을 여태 억지로 쑤셔 넣어 왔는데. 여기에 저 많은 손님들이 다 탈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
"...형님은 괜찮으실까요?"
발코니에서 대회가 열리고 있는 장소를 내려다 보고 있던 알폰스는 문득 이런 말을 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런지 알폰스의 곁에 다가가 주위를 살펴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무 위를 달리던 인영들이 하나 둘 숲을 벗어나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 대회에 감시역을 맡고 있는 레인저들의 등에는 해수에게 당한 것으로 생각되는 부상자들이 실려 있었다. 대회 중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숲 곳곳에 레인저들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대회의 규모가 워낙 크고 장소가 장소 인지라 이러한 사고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다행인 점은 아직까지 사망자는 없다는 점일까.
마물 토벌이라면 모를까, 사냥 대회의 경우 그 규모에 비해 인명피해가 잘 일어나지 않는 대회에 속했다.
룬프라우드 산맥이 금지(禁地) 중 한 곳에 속한다지만 그것은 숲 심층부에 셀 수 없을 만큼의 마물들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지, 마물들이 출현하지 않는 숲의 초입은 겨울이 되지 않는 한 마물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번 대회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부상자가 많은 편이었다. 참가 연령대가 낮은 편이어서 그런걸까. 하기야 참가한 이들 중 사냥이 아닌 황족과의 만남이 목적인 이들도 있었으니 부상자가 많은 것도 어느정도 납득이 된다.
아무리 알폰스가 영특하다고는 하지만 눈 앞에서 사람이 다치니 마음이 어지러운 모양이다. 그와 기사단과의 살기 넘치는 대련에도 꿈적 않던 아이가 안하던 형의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로 전해 듣는 것과 눈 앞에서 직접 보는 것은 느낌 부터가 다르다. 여태까지는 와닿지 않던 것이 현실이라 느껴지는 순간이었으니. 이전까지는 형에 대한 믿음이 이러한 마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아줬다지만 반대로 그가 저들 처럼 다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번 시작된 걱정은 왠만해선 끝을 맺기가 힘들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이유로 밤잠을 설치지 않았는가.
지금은 그러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 이유를 알폰스에게 알려 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데미안 공자는 괜찮을 겁니다."
먼저 말을 꺼내 알폰스를 달랜 것은 루이스였다.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이었지만 알폰스를 바라보는 눈에는 따스한 볕과 같았다. 다만 말 수가 적은 만큼 말도 너무 짧게 끝내는 그녀였기에 나는 루이스의 말에 조금 덧붙여 그와 그웬 경이 대련을 했을 때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루이스 경의 말이 맞아요. 데미안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폰스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요? 그웬 경도 이긴 그가 해수들에게 질리가 있겠어요."
더군다나 지금은 둘이 같이 있는데 말이지.
하늘에서 갑자기 드래곤이 뚝 하고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그 두 사람을 어찌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조금은 진정이 된건지 알폰스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걱정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이전보다는 나아졌는지 알폰스의 얼굴 빛이 다시금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렇죠? 하기야 형님에게 해수들이 상대가 되겠어요?! 분명 다른 누구보다 해수들을 많이 사냥하셨을 거에요!!"
다시 눈을 빛내며 숲으로 시선을 돌리는 알폰스의 모습에 나는 씁슬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알폰스는 처음으로 형이 나간 대회에 참관한 만큼 그가 우승했으면 하는 마음인 것 같았지만 그의 조심스러운 성격상 우승을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회귀 이전에도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그가 자신을 돋보일 수 있었던 자리를 피하는 것을 여러 번 봐왔던 지라 나는 이번 대회의 우승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언제나 가문의 명예를 유지하는 선에서 멈추는데 만족했던 그였다.
나중에 물어본 바로는 명성이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되어서 그런다나 뭐라나. 크라우스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 하기에는 웃긴 이야기였다.
아무튼 애초에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나와 거리를 두었던 그인데, 그런 그가 우승을 노릴 리가 있나.
만약 노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훗날 그가 가주의 자리에 오르고 난 뒤 가문의 면을 세우기 위함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기에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루이스 경의 발언이었다.
"물론입니다. 어제 만나보니 데미안 공자께서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의욕적이시더군요. 이번에는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와 알폰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하는 루이스.
어쩐지 방금 전 알폰스의 눈과 겹쳐 보일 정도로 그녀의 눈이 빛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그녀가 저렇게 길게 말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루이스가 알폰스의 말을 긍정했다. 물론 립서비스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녀가 그런 걸 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아무리 알폰스의 앞이라고는 하여도 그가 우승을 노릴 생각이 없다고 사실대로 말할 정도로 우직했기 때문에 그녀가 저리 답한 것이 놀라웠다.
루이스 경이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로 그가 이번 대회에 진심이라는 것인데...노엘과 오르커스 때문인건가?
워낙 많은 것이 예전과 달라져 그가 무엇 때문에 대회에 의욕적으로 변했는지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실력을 숨김 없이 드러내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그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없어진 이 세상에 그의 명성이 높아진다고 해서 나쁜 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의욕적으로 바뀌었다는 말에 마음 한 구석이 아파오는 것은 왜 일까?
무엇이 그를 바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게 거리를 두었던 요인 중 하나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고 하니 마음이 참으로 싱숭생숭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까부터 루이스 경의 시선이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