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샛별 (27)
잠시 회장이 술렁이기는 했으나 이들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 제 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렇게 보이도록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물결이 다시 잔잔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 듯 이들은 내색하지 않은 척 간간히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몇몇 이들과는 눈이 마주치는 경우가 파다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서로 목례로 인사만 나누었을 뿐 그들 중 누구도 내게 직접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자리가 애매하다 싶으니 나이가 찬 귀족들은 내게 접근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크라우스 가문의 약혼녀이기는 하나 아직 그 나이가 어리다.
열여섯이면 어느 정도 성인으로 인정 받는 나이이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내 곁에 데미안도 아서 경도 없었으니 대놓고 먼저 나서게 되었을 경우 자칫 잘못하다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를 말로 구워 삶으려는 녀석으로 취급받기 쉽상이다. 지금은 그저 서로에게 얼굴을 비추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만 이러한 제약을 받지 않는 이들이 존재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지금 나와 비슷한 나이의 또래 아이들이었다.
점점 꺼져가는 불씨처럼 다들 내게서 눈을 거두고 있었지만 연회장 한구석에서 만은 계속해서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대다수가 어린 여자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던 무리인 만큼, 이들이 대회에 출전한 사람들을 제외한 남부 귀족가의 자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의 눈을 보니 어서 내가 이곳으로 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회장의 인원 구성이 정확히 양분화 되어 있는 만큼 나 혼자 어중간하게 중간에 서 있을 수 는 없는 법이다. 호의적인 시선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그들의 기대에 따라 그리로 발걸음을 옮기었다.
'아가씨 화이팅!'
헤일리는 뒤에서 작게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고는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 자리를 떠났다.
뒤에 서 있던 헤일리의 기척이 사라지자 그제야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되었다. 낯선 곳에서 모르는 얼굴들 사이에 홀로 들어와 있는 것은 그리 기분이 좋지 않다. 그렇다고 긴장이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과거에서 질릴 만큼 경험해 본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에델바이스 영애, 이쪽으로."
내가 다가오자 자연스럽게 말을 건내는 이가 한명 있었다.
처음보는 얼굴인 것이 딱히 과거에 인연이 있던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내게 자꾸 눈빛을 보내오던 이들 중 한명이었는데,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나를 맞이하고 있다. 비록 겉만 포장된 호의라고 할 지라도 이를 짓밟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안내하는 자리에 앉았다.
주변을 한번 훎어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가볍운 목레로 인사를 건내었다.
"엘레나 에델바이스라고 합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참. 제정신 좀 봐라. 그러고 보니 통성명이 아직이었지요? 저는 프랑크 백작가의 미셸이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네. 프랑크 영애."
그렇게 인사로 시작을 하자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미셸을 필두로 통성명이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이 여자가 지금 내 앞에 선 파벌의 우두머리인 것 같은데...
미셸의 옆에 앉고 보니 이곳에 있는 이들과는 다른 소수의 인원이 한곳에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 있는 한 영애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는 말 없이 미소로 인사를 건내었고 나 또한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전에 느끼었던 헤일리와 같은 시선이 저쪽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내가 자리를 잘못 잡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좋다. 자리야 옮기면 되는 것이니까.
내게 질문 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미셸이 질문을 하였고 나머지 이들은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대하는 개와 같았다. 좋은 분위기는 아니다만 그래도 사방에서 목소리가 밀려오는 것보다는 생각하기가 편하였다. 나는 미셸의 질문에 답하면서 프랑크라는 이름에 대한 것을 기억 속에서 더듬었다.
다행이게도 그 이름을 떠올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상계에 관심이 큰편이 아닌지라 자세히는 기억하고 있지 않아 남부에서 손 꼽히는 상단을 경영하고 있다고만 알고 있다. 상단주가 여자라는 사실을 어디선가 흘겨 들은 것 같기도 하니 아무래도 정황상 훗날 소문의 상단주가 그녀인것 같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그와의 접점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선에서는 없다.
아카데미 시절 프랑크 백작가 휘하의 상단을 이용하는 것을 몇번 보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남부 출신 학생이라면 일반적인 행동이었다. 그가 아닌 데미안이었을 때도 미셸의 얼굴을 주변에서 본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 보니 문득 그녀가 내게 가진 적개심의 원인이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에델바이스 영애께서는 북부 출신이셨지요. 듣자하니 북부의 설원은 1년 내내 눈보라가 휘몰아 칠 때도 있다고 하던데, 이 남부는 영애께 있어 너무 더우시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그럴리가요. 따뜻한게 아주 마음에 드는 걸요. 무엇보다 다양한 꽃을 바깥에서 직접 볼 수 있어 즐겁답니다."
겉으로 걱정하는 것 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상 말의 진의는 북부를 눈만 있는 지역으로 깍아내리는 말이었다. 도시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없이 눈만 있는게 맞는 말이기는 하다만. 그건 미래가 되어도 바뀌지 않는 일이라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다.
북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신 아버지께는 미안한 소리이지만 남부가 더 체질에 맞는 건 사실이니까.
나는 고향을 깍아내리는 그녀의 말을 두둔하며 웃었다.
그런 내 행동에 그녀의 입가가 살짝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황당해 하는 건가?
이대로 끝내기에는 섭섭한지 미셸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계속해서 내게 질문 던졌다. 생각했던 것 만큼 공격성 넘치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프랑크 백작가가 남부에서 어느정도 위상이 있다고는 하지만 에델바이스라는 이름 앞에서는 태양 앞 반디불이에 불과했으니.
"그러고 보니 이번에 데미안 공자께서도 대회에 출전하셨다고 들었는데.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이전에도 출전하신 경험이 있는 만큼 영애께서는 공자님께서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내실 것이라 생각하시고 계신가요?"
"글쎄요. 성적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보지 않아서...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시는 것만 해도 충분할것 같네요."
"에델바이스 영애게서는 단 것을 정말 좋아하시는 모양이시군요. 손에서 다과가 떠날 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렇게 많이 드시다가는..."
"네? 왜 그러시죠?"
"아, 아니에요."
미셸은 내 허리 부근을 한번 훑어보곤 떨떠름한 얼굴을 지으며 서둘러 말을 물렸다.
이렇게 의미없는 미적지근한 공방이 계속되고 있으니 이러다가는 말을 받아주는 입장인 내가 먼저 질릴 것 같다.
어느정도 시간은 채운 것 같으니 이제 그만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게 좋을 것 같은데.
무슨 핑계를 대면 좋을지 생각을 하던 중. 때마침 내가 회장에서 그토록 찾고 있던 인물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아, 누님!!"
앳된 목소리에 나를 에워싸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틀어졌다. 그곳에는 밝은 갈색머리에 연두빛 녹안(綠眼)이 인상적인 한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여태 회장에 이렇게 어린아이가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다들 놀란 눈치다.
"알폰스."
미셸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알폰스가 누군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대체 왜 이 회장에 이렇게 어린 소년이 들어왔는지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하기야 알폰스의 얼굴은 아르웬을 닮은 편이었으니. 머리가 검지 않고 서야 모르는 이가 보았을 때 크라우스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요. 많이 찾았잖아요."
"헤헤. 잠시 테라스에서 숲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먼저 말씀 드리고 움직일걸 그랬나봐요."
"저, 에델바이스 영애. 이 아이는 대체..."
내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알폰스와 대화를 시작하자 당황한 미셸이 내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굳이 그녀의 질문에 답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알폰스의 오른팔에 새겨진 검과 용의 문장을 발견하곤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와 알폰스의 대화에 끼어들 생각은 없나 보다.
그렇게 미셸이 침묵하자. 나는 곧장 자리를 떠날 준비를 하였다.
알폰스 역시 그러한 낌새를 눈치채고 온 것인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나를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누님. 제가 방금까지 있었던 자리가 경치가 아주 좋아요. 그래도 혼자 있기에는 조금 심심한데...누님께서 같이 있어주시면 안될까요?"
"물론이죠. 죄송합니다. 프랑크 영애. 아무래도 이만 자리를 떠야 되겠네요. 꽤나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네, 네..."
알폰스의 장단에 맞춰 행동을 하니 나는 어렵지 않게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인파 속에 섞여 일행으로 부터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거리가 되자, 나와 알폰스는 서로의 손뼉을 부딪치곤 천천히 회장 안을 주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알폰스. 캔씨 없이 혼자 연회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거야?"
"아니에요. 마침 회장 내에 형님의 지인 분이 한분 계셔서 그분과 함께 있었어요. 아, 누님께서도 한번 만나보시는게 좋겠네요. 그분이 누님께 관심이 엄청 많으신 것 같더라구요."
지인?
알폰스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사람의 감정을 잘 읽어내는 알폰스가 저렇게 말 할 정도라면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는데, 마땅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내가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인물 선에서는 모두 대회에 출전하여 이 자리에 없는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 정체불명의 지인에 대한 의문은 알폰스가 나를 그녀의 앞에 데려갈 때 까지 풀리지 않았다.
알폰스가 나를 데려온 곳은 회장에서 살짝 떨어진 숲이 잘 보이는 발코니였다. 형제는 형제인가. 어째 그나 알폰스나 연회장에 있으면 향하는 곳이 둘다 똑같이 회장에서 떨어진 발코니다. 나는 그 사실에 소리 죽여 작게 웃고는 커튼 너머에 있는 발코니에 발을 걸쳤다.
그곳에는 이미 누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뒷모습이 많이 낯이 익다.
"루이스 경!"
커튼을 걸치고 발코니에 들어서자 마자 알폰스는 그곳에 서 있던 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적갈색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내게 있어 아주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것 같은 고동색 눈동자가 나를 마주한다.
아무것도 없는 도화지에 물감이 한방울 떨어진 것 마냥 그녀의 눈동자에 미세한 변화가 찾아왔다. 그렇다고 큰 변화는 아니었다만 이전에 미셀이 나를 바라봤을 때와는 확실히 정반대의 감정이 담겨있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마치 주군을 모시는 기사와 같이 기사의 예법으로 내게 예를 표하였다.
"루이스 그레이엄입니다."
루이스 그레이엄.
그녀의 소개를 듣지 않아도 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루이스야 말로 내가 이곳 남부에서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인연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분명 대회에 출전했을 거라 생각했기에 이런 곳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훗날 그와 끝까지 함께하였던 여섯명의 기사를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특히 루이스 경의 경우. 어떠한 상황에서든 시종일관 무표정을 고수했기에 기억을 못할래야 못할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때문인지 나는 미셸 때와는 다르게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인사를 전하였다.
"엘레나 에델바이스에요. 알폰스를 돌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그녀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젓고는 알폰스를 지긋히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때도 말 수가 없었구나.
통성명이 끝난 이후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다.
알폰스는 슬금슬금 몸을 빼더니 발코니에 팔을 걸치고는 숲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도 알폰스의 옆에 서서 숲을 바라보려 하였지만 이상하게도 내게서 눈을 때지 않는 그녀 때문에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기만히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만 있다.
"...."
"저, 혹시 물어보실 거라도..."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내 쪽에서 먼저 이렇게 말하는 수 밖에 없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건지 그녀의 귀가 쫑긋 움직인다. 그렇게 잠시 눈을 몇번 꿈뻑꿈뻑거리더니 그녀는 다시 나를 보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름다우십니다."
"네?"
그게 끝이었다.
루이스는 그렇게 짧게 말하고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갑자기 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칭찬을 받게 되어 기분이 얼떨떨하기는 하였으나 나쁘지는 않았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임을 알고 있음에 그런걸까. 다른 이들이 형식적으로 건내었던 말 백마디 보다 그녀의 말이 더 진실성 있어 보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루이스 경."
그렇게 답하자 루이스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깨가 살짝 숙여진 모습이 그녀는 뭐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우직한 곰이 수줍게 웅크린 것만 같아 귀엽게만 보였다.
어쩐지 쑥쓰러워 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인 걸까.
나는 그녀가 다시 이곳을 바라보기를 기다리며 숲을 향해 고개를 돌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