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샛별 (26)
엘레나는 숲 속을 향해 달려가는 데미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모습이 숲의 그림자에 가려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짧은 만남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가.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늦게 일어나지만 않았더라면 좀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그녀의 머릿속을 채웠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 되었으니 여기에 계속해서 미련을 가지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는 것을 엘레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쉬움은 잠시 뒤로한 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할 그녀의 눈 앞에는 태양과 같이 따스한 빛을 내뿜고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이를 확인하자 그제야 엘레나는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아무런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가 당장이라도 옆에 서 있는 것처럼 데미안의 기척이 매우 선명하게 느껴져왔다.
그렇다는 것은 그에게 넘겨준 크리스털이 정상적으로 제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힘을 사용한적은 처음인지라 혹시라도 제대로 된 역할을 해주지 못할까 걱정을 하던 엘레나였지만, 이제는 조금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다.
지각의 원인이 된것도 크리스털 때문이었는데, 만약 크리스털이 정상적으로 작동을 하지 않았다면 자칫 일이 복잡하게 꼬일 뻔 하였다. 크리스털이야 말로 엘레나가 세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나 다름 없는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노엘과 오르커스의 존재 때문에 메로힘 때와 같이 움직일 수 없는 지금은 이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거라도 전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무엇보다 그것은 계획의 열쇠임과 동시에 데미안을 만일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아주 중요한 물건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지금의 데미안은 엘레나가 기억하고 있던 시절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무엇이 동기가 된 것인지는 그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지금의 속도라면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최강의 검사 중 한명인 라인하르트, 그 보다 먼저 데미안이 초월의 격에 도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당장 실현되지 않는 이상. 엘레나가 데미안을 향한 걱정을 그만두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고 있는데 아무런 방호책 없이 그를 숲으로 보내는 것이 그녀에게 가능할리가 있겠나. 원래라면 푸른 새를 시켜 숲에 떨어 뜨려둘 크리스털을 그에게 건낸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흐야야야아아..."
그렇게 긴장이 풀리고 나니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탈력감이 뒤늦게 그녀를 찾아왔다.
밤새 크리스털을 재구성 하느랴 기력이 쫙 빠져나간 터라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정신은 멀쩡하더라도 몸은 그렇지 못하였다. 발이라도 잘못 내딛었다가는 그대로 고꾸라질 판이다. 다행이도 이를 눈치챈 헤일리가 서둘러 엘레나의 곁에 서서 그녀를 부축하였다.
"아가씨!!"
"아...헤일리 고마..."
헤일리는 엘레나의 팔을 잡자마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고맙다는 말을 건내려던 엘레나는 헤일리의 부름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말을 멈추었다. 처음에는 분명 자신이 쓰러질까봐 걱정하여 부르는 줄 알았는데, 정작 헤일리의 눈에는 사람을 걱정하는 것 같은 기색이 전혀 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언가 말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엘레나가 이러한 분위기의 헤일리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크라우스 백작가에서 지내는 동안, 아니 데미안과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항상 저러한 눈빛으로 엘레나를 기다렸기에, 엘레나는 그녀가 자신에게서 무엇을 듣고 싶어하는지 금세 감이 잡혔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주위를 둘러보니 헤일리와 같은 눈을 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데미안이 떠나기 전 그가 엘레나에게 한 행동은 주변인들의 이목을 확실하게 사로잡은 모양이다.
손등에 입맞춤을 하는 행동이 이처럼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대회에 출전하기 전 참가자들이 흔히 마음이 있는 레이디에게 하는 행동 중 하나이기도 한 만큼 지금도 다른 곳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을 터였다.
다만 이렇게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 된 것은 그 주체가 단순히 데미안과 엘레나였기 때문이다.
둘의 가문이 크라우스와 에델바이스라는 배경도 한 몫 하였겠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사람들의 이목을 한곳에 모을 정도로 빼어난 데미안과 엘레나의 외모에 있었다.
이제 막 성인으로 인정 받을 나이에 두 사람이 한 행동에 몇몇 어른들은 풋풋하다는 눈길을 보내왔고, 엘레나와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여러모로 아주 난리가 나 있는 상황이었다.
헤일리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질투, 안타까움과도 같은 감정이 담긴 시선도 여럿 느껴졌다.
하지만 엘레나가 이렇게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감정들에 반응 할 시간은 없었다. 자신을 붙잡은 헤일리의 입이 열리자마자 그녀의 입에서 이보다 더한 말들이 봇물 처럼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축하드려요!! 손 잡는 것만 해도 어려워하시던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손키스 정도는 가볍게 하실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군요! 솔직히 이번에 두 분께서 야영을 다니고 오신 후에 약간 거리가 멀어진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다행이도 기우에 불과했네요!"
"헤, 헤일리!! 알겠으니까 조금 조용히 말하렴!!"
"아, 그리고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는데...아가씨! 그런 선물은 또 언제 준비하신 거였어요?! 너무해요. 저에게도 말씀해주셨다면 당연히 도와드렸을 거라구요!!"
"알겠으니까아아...그만해애애..."
헤일리의 말에 겨우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 두었던 감정이 다시금 끄집어진다.
몇시간 전만 해도 어떤 얼굴로 데미안 앞에 서야 할지 고민하고 고민하던 소녀에게 있어 헤일리의 말은 진정시켜두었던 마음을 다시 폭발 시키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헤일리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 수록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엘레나의 얼굴을 뜨겁게 만들었다.
엘레나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게 된지도 오래되었건만 이 주제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헤일리가 이렇게 집요하게 놀리는 것이기도 하였다.
엘레나는 다른 이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도달할 때까지 모자를 푹 잡아 눌렀고 헤일리는 그런 엘레나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입을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
그의 배웅을 한 후, 나는 옷의 정돈을 위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대회에 출전하지 않는다고 하여 일정이 비는 것은 아니었으니 지금의 옷차림으로 남들 앞에 서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었다.
나와 같이 방청객의 입장으로 참석한 이는 성의 연회장에서 기다리거나 방에서 얌전히 있는다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다. 사실 나에게 있어 이러한 선택지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크라우스의 일원이 된 이상 나에게 연회장에서 있을 모임의 참석은 필수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쓰고 있던 모자를 내려놓고는 거울 앞에 앉아 여기저기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아침에 방에서 나갈 때는 워낙 정신이 없던 터라 그냥 대충 한번 흘겨보고 넘겼었지만 지금 이렇게 거울 앞에 앉아 찬찬히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그 모습이 상상 이상으로 엉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가기 전 대충이나마 세안을 하였기에 얼굴은 괜찮았지만 문제는 머리였다.
헝클어진 머리를 보여주기 싫어 머리카락을 모자 속으로 밀어 올렸더니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모자를 숙여 가리면 뭐하나. 결국 그를 만나게 되면 어차피 보여주게 될 것이었는데. 차라리 약간 부스스하더라도 모자를 쓰지 않고 나갈 걸 그랬나 보다.
봉두난발이 된 머리를 보며 이것을 그에게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을 칠칠맞지 못한 여자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이 들기도 하였지만 그것도 잠시, 여태 그와 함께 있었을 때의 자신의 행동을 생각해 보니 이러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체념에 가까운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다과를 먹을 때 마다 그에게 입가의 묻은 크림이 닦여진 적이 몇번이나 있던가.
처음 그 설레임에 중독되어 이후 반쯤 고의로 입가에 묻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기분이 좋은 걸 어떡하겠는가. 실제로 그의 앞에 서게 되면 마음이 흔들려 어수룩하게 변하는 것도 맞는 말이었다.
헝클어졌던 머리의 정리를 끝내자, 이번에는 거울에 비친 여기저기 어질러진 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 보고 나니 오늘 아침 이곳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나는 아수라장이 된 방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의 사고로 일어난 실수 이기는 하다만 이래서는 정말로 방 하나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어리숙한 소녀가 된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였다.
방에 헤일리를 들이지 않았기에 나는 홀로 이리저리 손가락을 움직이며 방을 정리해 나갔다. 진작에 헤일리와 같이 들어왔다면 이러한 수고를 들일 것도 없이 머리를 정리하는 사이에 방 정리가 끝났을 테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화가 다 풀리지 않았다.
"헤일리도 정말!! 사람들 다 있는 곳에서 그렇게 말을 하면 어떡해...."
사실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부끄러웠을 뿐이다.
헤일리가 저런 질문을 하는 것도 평소에 늘상 하던 것이었기에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면 될 일이었지만, 그놈의 사람들의 시선이 뭐라고...평소보다 약간 감정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물론 헤일리가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일단 헤일리가 한 말은 남들이 듣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그냥 당사자인 내가 부끄러울 뿐이지.
"이제 들어와도 좋아."
정리를 끝내고 들어와도 좋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헤일리는 기다렸다는 듯 쏜살같이 내 앞으로 달려왔다.
내 앞에 선 헤일리는 신나게 떠들었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은 반성하고 있다는 얼굴로 입을 닫은채 물끄럼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여태까지 이렇게 반응을 한 적이 없었으니 정말로 내가 삐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저...아가씨이이..죄송해요!! 그, 일부러 그러려던건 아닌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가씨랑 공자님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는게 기뻐서..."
눈동자가 이리저리 떨리면서 말하는 헤일리의 모습은 옛날에 빌헬름이 아끼던 검집을 부러뜨려 먹은 걸 내게 들켰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내가 아무말 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헤일리는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말을 하였고 나는 그것을 가만히 듣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안 그럴 거지?"
"네! 앞으로 놀리..!! 아니, 단 둘이 있을 때만 이야기 할게요. 이전처럼요."
방금 본심이 튀어나온 것 같지만. 뭐, 이정도면 될려나.
헤일리가 매우 반성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내오자 나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용서해 줄게. 나도..그,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말 하면 부끄럽단 말이야."
"암요. 앞으로는 자중하겠습니다!"
내 기분이 전부 풀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헤일리는 곧바로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면서 군기가 잔뜩 들어간 병사의 흉내를 내며 답했다.
정말이지 못 말린다니까.
헤일리가 웃자 나 또한 작은 미소로 화답했다.
"자, 그러면 이제 준비도 끝냈으니 연회장으로 가도록 할까? 알폰스는 먼저 가 있으려나?"
"네. 한스 아저씨와 알폰스 도련님께서는 먼저 가 계시겠다고 미리 말씀해주셨어요."
아버님은 바깥에서 기사들과 함께 그를 기다린다고 하셨으니 연회장에 참석하는 것은 나와 나이가 되지 않아 대회에 참가하지 못한 알폰스가 전부였다. 밖에 나오지 말고 실내에 있으라는 것이, 뭐라 따로 말씀을 해주시지는 않았지만 이번 대회에 다른 귀족가 자제들의 참석율이 높은 만큼 나름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보라고 배려를 해주시는 것 같았다.
바깥에서 그를 기다리는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친구를 사귈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과거에 인연이 없던 이와의 만남의 경우 아직은 조금 꺼리는 편이다. 하지만 지난번 메로힘에서 그가 그랬던 것 처럼 나 또한 남부에서 한번 얼굴을 알릴 기회가 필요했기에 나는 아서 경의 제안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렇게 연회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중, 헤일리는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생각이 난 것인지 나를 한번 힐끔 보고는 조용히 웃기 시작하였다.
"...?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헤헤. 그러면 어서 연회장으로 가도록 할까요? 다들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실거에요!"
또 평소처럼 실 없는 생각이라도 하는 것이겠지. 라고 넘겼던 나는 연회장에 들어서고 나서야 헤일리의 웃음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금 연회장에 있는 인원은 방금 전 바깥에서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을 배웅하던 사람들 중 일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와 그가 함께 있던 자리에 같이 있던 이들 또한 이자리에 참석해 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이전에 바깥에서 느꼈던 시선과 똑같은 시선들이 내게로 향하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리다 보면 분위기 적으로 묘한 압박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것에는 익숙한 터라 저들의 분위기에 짓눌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나는 저들의 시선을 느끼자 마자 그만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여러모로 뭔가 많이 피곤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