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샛별 (24)
지난날 내렸던 비가 남부지역 전체에 찾아왔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인지 저 멀리 보이는 숲이 잎에 맺힌 물방울에 반사되어 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물을 한바탕 크게 쏟아낸 하늘에 구름은 보이지 않는다. 높게 뜬 태양만이 푸른 하늘 위에 홀로 존재하고 있는게 퍽이나 보기 좋았다.
햇볕이 따스한게 참으로 기분이 좋다.
이 시기에 비가 내리는 것은 심심치 않은 일이다만 나는 되도록이면 숲을 돌아다닐 때는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한다. 젖은 땅이 질퍽거리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과거 비가 내리던 날 숲속을 돌아다니다가 일어난 일들이 자꾸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시기도 비슷한게 내가 아버지를 따라 사냥 대회에 나갔을 적의 일이었다.
그날은 무슨 마가 끼었는지 정확히 내가 자리잡은 구역에만 집중적으로 폭우가 쏟아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기에 평소라면 등장하지도 않을 마물 무리의 등장까지. 본래라면 겨울 중반에나 활동하는 놈들이 날이 풀려가는 봄날에 움직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그러한 일이 내게 일어났었다.
마을 쪽을 향해 계속해서 내려오는 마물들의 무리.
그리고 여기저기 비산하는 진흙들과 마물과의 전투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나.
데미안이 된 이후로 경험하는 첫 전투여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환경 때문에 굉장히 고단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진흙과 빗물이 주는 불쾌감도 있었지만 그러한 것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다 보면 금세 머릿속에서 잊혀지게 된다.
당시 가장 큰 문제는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파도 처럼 쏟아지는 나무와 바위가 뒤섞인 토사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이은 전투로 인해 몸의 피로가 극도로 달했던 터라 갑자기 발생한 산사태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휩쓸리고 말았었다.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튼튼한 크라우스 가문의 신체도 수십톤의 토사 더미 앞에서는 다른 이들과 똑같이 한명의 사람에 불과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뭐, 그 덕에 살아있는 것이지만은.
몇번 땅을 발로 두들기니 단단한 흙의 감촉이 느껴져왔다. 햇빛이 금세 땅의 물기를 지워내는 것이 오늘은 발밑이 무너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것 같다.
"비는 안 내리겠네."
"네! 날씨가 정말 화창하네요!!"
깜짝이야.
하늘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었다. 내 눈이 향한 곳에는 태양빛을 받아 환하게 반짝이고 있는 노엘이 서 있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것이 어지간히도 대회가 기대되는 모양이다.
진심으로 우승을 노리는 노엘의 눈은 흘러넘치는 승부욕으로 인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 역시 대회에 참가하는 경쟁자이다 보니 나를 바라보는 노엘의 눈빛에는 여러 감정이 비쳐보였다. 의욕 만으로 보자면 이미 대회를 우승하고도 남겠는데...그도 그럴 것이 노엘은 이번 사냥 대회가 처음으로 누군가 와 경쟁하는 것이 아닌가.
여태 제국의 황녀라는 독보적인 존재로 살아온 그녀다.
노엘의 옆에 오르커스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둘은 다른 귀족들처럼 서로 후계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서로 좋아하는 분야마저 다르기 까지 했으니. 그녀에게 남들과 무언가의 우열을 다루는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사소한 내기에도 승부욕이 불타는 것이 사람이라는 생물인 만큼 특히 이번에 참가하는 대회의 주제가 그녀의 흥미와 겹치는 분야이기도 하니 어찌 흥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당연히 이기고 싶을 것이고 정상에 서고 싶을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응원의 말을 따로 하지는 않았다.
우승을 노리는 경쟁자의 입장에 서 있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한쪽 손을 주먹 쥐어 올리고는 그녀와 글러브를 부딪치는 것이 끝이었다.
응원과 격려는 이것이면 충분하다.
"검은 안장 에다 매달면 되니 한 자루는 챙기는 게 좋겠습니다."
노엘의 복장은 전체적으로 가벼웠다.
사냥을 위한 활과 화살. 그리고 허리에 매단 단검 두 자루가 그녀가 준비한 무구였다. 목적이 전투가 아닌 사냥인 만큼 이는 과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정석과도 같은 것이었다. 며칠 간 숲에서 진행되었던 연습도 이와 같은 차림으로 진행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아, 그럴 줄 알고 미리 챙겨났답니다! 그...왠지 손 근처에 검이 있어야 약간 안심이 되더라구요."
"이해합니다."
이것을 끝으로 우리는 대화를 그만두었다.
내가 말재간이 없는 것도 한 몫 했지만 노엘의 시선이 내게서 숲으로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짙은 청록색으로 물든 공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언제나 활기찬 에너지를 뿜어내는 노엘이라도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긴장감은 피해갈 수 없었나 보다.
차츰 호흡이 안정되어 갈 때 쯤 노엘이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기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노엘의 얼굴에 그려진 표정을 보니 어느정도 짐작이 갔다. 어제 엘레나에게 차이고 나서의 나를 보던 아버지와 오르커스의 얼굴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룻밤 사이에 오르커스에게 옮아버린 것인가. 좋지 않은게 그녀에게 묻어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셨나요?"
"글쎄요..."
호기심 어린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지금 가장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내가 엘레나와 만난 것은 저녁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으니 말이다.
이전에 메로힘에서 처럼 그녀의 방에 찾아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엘레나의 그러한 반응은 나도 처음인지라 이것이 맞는 행동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아 결국 방을 떠나지 못하였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방을 나서지 않은 이유는 내심 엘레나가 먼저 내게로 오기를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한번 다가갔던 것 처럼 이번에는 그녀가 내게로 오기를 기다렸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은 약간 후회하고 있다. 그냥 내가 방으로 찾아갈껄.
아무튼 그렇게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침대 위에서 그날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웃었다. 한번의 입맞춤이 그간 있었던 일들보다 파급력이 강하다는 것이 웃기기도 했지만 진정으로 웃긴 것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나도 사춘기 온 남자아이 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신은 몸의 나이를 따라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그것이 설마 내게 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었다.
"...전하께서는 혹시 엘레나에게 뭔가 들으신 것 없으십니까?"
혹시나 싶어 노엘에게 물어보았지만 노엘은 천진난만한 미소로 해맑게 답하였다.
"전혀요!"
음, 정말로 모르는 것 같군.
그녀가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 얼굴에 티가 나겠지.
뭐, 별 수 있나. 기다리는 수 밖에.
어느순간부턴가 주위가 조금씩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커져가는 소리에 주변을 둘러보니 처음과는 달리 많은 이들이 밖에 나와 있었다. 대회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려주 듯 자신들의 가문의 문장을 내건 이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당연히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크라우스의 문장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바로 옆에서 안내를 받듯 따라오는 황실의 문장을 내건 깃발이 보였다.
선두에는 아버지와 오르커스가 나란히 서 있었다.
다른 한 쪽에서는 대회의 시작을 위해 간의로 만들어진 단상 위에서 레기온의 영주인 그레이엄 자작이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모두의 시선은 당연한 것처럼 둘에게로 쏠려 있었다. 다른 곳보다는 개방적이라 평해지는 이 남부도 나름 정치라는게 존재하는지라. 권력자의 등장에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습이다.
"이제 그만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죠."
"네."
두 일행이 서로 갈라지자 노엘과 나는 서로의 자리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일행 모두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같이 움직이는 것은 괜한 구설수를 불러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게 조금 거리를 두려는 찰나, 노엘이 갑자기 내게 질문을 걸어왔다.
"아. 마지막으로 질문이 하나 있는데 괜찮을까요?"
"무엇 말입니까?"
"오라버니가 이건 꼭 한번 물어보라고 하셔서...어.."
나를 멈춰세운 노엘의 얼굴이 드물게 붉은 빛을 띄우기 시작한다. 그 티 나는 반응 덕분에 나는 어렵지 않게 그녀가 무엇을 물어보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오르커스를 바라보자 오르커스는 나와 노엘을 보며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하. 그렇게 무리 안 하셔도 되시는데..."
"아니! 그, 저도!! 정말 궁금해서 그렇거든요..."
아무래도 오르커스 뿐만 아니라 노엘도 무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틀림없이 그 날의 일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라는 마음을 읽을 수 없어도 눈에 선히 보였다. 하기야 그렇게 티가 났는데 그동안 묻지 않은게 용하기도 하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자칫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아버지께서 어젯밤 내게 하신 질문 만으로 충분했다.
질문을 하는 것은 노엘이었지만 여기에 오르커스가 껴있다 보니 문득 질문의 수위가 어느 정도일지 심각하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버지처럼 갑자기 약혼식이 아닌 결혼식을 올려야 되겠냐라고의 수준은 아니겠지만 반대로 노엘이었기에, 순수한 만큼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던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타인에게 민감한 질문을 던질 이들은 아니니까.
그렇게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노엘의 입이 열리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저...그, 입맞춤.. 있잖아요...? 진짜 달콤한 맛이 나는 건가요?"
"네?"
"오라버니는 계속해서 신맛일 거라고 하시는 거 있죠. 하지만 지난번에 황궁에서 엘라가...아, 엘라는 저희 유모인데요. 아무튼! 엘라가 분명 예전에 저에게 초코 쿠키처럼 달콤하다고 이야기 해줬거든요!! 신맛 아니죠? 달콤한게 맞죠?!"
이걸 뭐라고 답해줘야 하는 걸까.
생각했던 것과 너무 정반대의 질문이 나와서 이건 이것대로 내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었다.
나는 끝내 내게 대답을 요구하는 노엘의 말에 답해주지 못한 채 저 멀리 보이는 오르커스를 향해 시선을 돌리었다. 여전히 능글맞은 미소로 이쪽을 바라보는 오르커스였지만 그 미소는 이전과는 달리 내게 여러모로 착잡한 마음을 안겨주었다.
저런 게 남주 후보라니...
이제는 아니다만.
내가 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딱히 없는 것 같다. 나는 오르커스가 있는 방향으로 주먹을 쥐어 살짝 위로 올리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힘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