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샛별 (23)
마치 몽롱한 꿈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분명 그 날의 일은 꿈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준 여운은 다음날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언제나 바래왔고 상상만 해오던 것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으아으우으..."
그 순간을 떠올리면 떠올릴 수록 자꾸 머리에 열이 치솟는 것 같다. 머리를 식히고자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보면 결국 끝에 가서는 그의 얼굴을 그리며 그 순간을 되새기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누구보다 이성적인 존재여야 할 마법사가.
그것도 전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위치에 올라섰던 대마법사가 이런 감정 하나에 휘둘리는 것을 과거의 나를 아는 이들이 본다면 과연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얼굴을 이불에 파묻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은 모를 것이다.
마법사란 족속이야 말로 인외의 영역에 들어서 그 안으로 깊게 빠지면 빠질수록 이성보다 감정이 몸을 움직이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것을.
초월이라 불리우는 곳에 오르게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다. 마법을 학문으로 보고 언제나 옳고 그름을 가리는데만 집중하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벽을 넘지 않으려 한다. 이는 위계를 올리면 올릴 수록 명확해지는 사실이다.
물론 대마법사라는 이름을 받을 정도라면 감정의 조절은 기본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지만. 나에게 있어 그와 관계된것 만은 예외의 일이였다.
열이 올라서 그런지 머릿속이 정상이 아니다.
마치 이리저리 엉킨 실타래를 풀다가 다시 한번 내 손으로 꼬아 엉망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태까지 자신의 행보를 되짚어 본다면 이와 같았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냐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온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하루라는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나는 레기온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였다. 마차 안에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기를 반복할 뿐, 정작 마차에서 내릴때 그가 내게 다가와 손을 잡으니 오히려 내 쪽에서 자리를 피하는 실수까지 하고 말았다.
아무리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거기서 도망쳐버리다니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그 상황에 대체 물은 왜 마시러 간다고 해서는!
"아으으으으...."
이제 와서 스스로에게 질책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만. 시간이 지나가고 나니 커져가는 아쉬움과 부끄럼에 기이한 신음소리만이 입에서 흘러나올 뿐이다.
이제 와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어째 자꾸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것일까.
다가가고자 결심했을 때는 한치 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면서 정작 그가 거리를 좁혀오니 내가 당황하며 뒤로 물러나는 꼴이 아닌가. 제 아무리 이 연심이라는 감정에 내성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간 회귀로 인해 보내온 시간이 있는데, 이처럼 빠르게 과열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다고 하여 반드시 그 감정에 솔직하게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경우에는 그것과 결이 다른 것 같기는 하다만.
"대체 어떤 얼굴로 당신을 봐야 할까요..."
푹신한 침대에 누워 바라보는 천장에는 어째선지 지금 이곳에 없을 그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그 때문일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내 입꼬리는 어느새 슬그머니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사실 답은 이미 나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지금과 같은 미소로 평소와 같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낸다면 된다는 걸 나 또한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그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이렇게 미리 생각을 해봤자 그의 앞에 서는 순간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가 버릴게 분명하였으니 말이다.
"어려워....."
어렵다.
분명 몸도 마음도 모두 한방향을 향해 있지만 정작 그에게 애정을 받을 때는 머리가 백지가 되어 버리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을 것이다. 이는 결심한다고 고쳐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기에, 몇분동안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다가 이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시간이 만능인 것은 아니다만 지금의 나에겐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며칠간 야영을 했기 때문인가.
낯선 장소임에도 부드럽게 등을 받쳐주는 침대의 촉감은 묘한 안정감을 심어주었다. 불편한 잠자리야, 회귀 이전에는 일상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익숙해진지 오래라고는 하여도 그것을 몸이 기억해 주지는 않는다. 그 때문인지 머리는 괜찮다고 느끼더라도 알게 모르게 쌓이는 몸의 피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야영지에서 사용했던 것들이 절대 질이 떨어지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장소의 차이 때문인지 천막 안의 침대 보다 느낌이 좋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야 시종들이 지속적으로 관리해 왔을 테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지도 모르겠다만은.
"흐아..."
그에 대한 생각 때문에 긴장하고 있던 몸은 시간이 지나자 천천히 풀리기 시작하였다.
몸이 풀리면서 이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감각이 찾아왔다.
숨을 한번 내 뱉으며 힘을 빼자 몸은 서서히 침대 속으로 가라앉았다. 보드랍게 살결에 닿는 천의 촉감이 좋아 여러번 팔을 움직이며 이불을 흩으려트리는 와중, 문득 침대 옆에 놓여진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앓는 소리를 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미 내 입가에 머금어진 미소는 떠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굳이 미소를 지우지 않고 거울 속에 비쳐진 나의 모습을 들여다 보았다. 살짝 입꼬리를 올린 채 눈웃음을 짓고 있는 소녀의 미소에는 어색함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야 당연할 것이 이는 내가 억지로 만들어 낸 미소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예전에 그가 내게 많이 웃으라 이야기 했던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이제 그런 말을 들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나를 웃지 못하게 만들 일들은 이제는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니.
톡톡-
"어?"
그렇게 행복감에 젖어드는 것도 잠시.
무언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밑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하던 감각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다.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자. 어두워지는 밤하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푸른 새 한마리가 손 위를 향해 날아왔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인공 생명체였기에 이것에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새의 눈에는 분명 있어서는 안될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약간의 마력을 담은 손으로 새의 깃을 어루만져주자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보던 푸른 새는 금세 안정을 찾아갔다.
"다행히 회로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오염의 흔적도 없는 것 같네."
인간이 아닌 용의 마법으로 만들어낸 마법 생명체이니 어지간한 오염에 물들 걱정은 없겠지만 지금 이 산맥에 감돌고 있는 기운은 드래곤인 알테어 그녀 본인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이 아이를 보내기 전, 미리 손을 써두지 않았더라면 지금 쯤 레기온의 하늘 위에는 푸른 거룡 한 마리가 나타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세상 그 어느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 이것은, 나와 닿자마자 제 집을 찾아낸것 마냥 내게로 옮겨왔다. 이러한 신성을 몸에 담는 것은 이를 다루는 이교도가 아닌 이상 못할 짓이었지만, 이는 내게 있어 바다에 물방울을 조금 떨어뜨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깃 끝에 묻어있는 신성의 잔재를 지워내자 새는 친애의 표시로 손에 부리를 비벼왔다.
"그렇구나..."
신성에 담겨진 기억은 온전히 내게로 스며들었다.
이교도라 생각되는 몇몇 이들의 격양된 감정과 함께 어떠한 장소가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숲이라 생각되는 공간과 그리고 그곳에 놓여진 기이한 구조체. 이전의 삶에서도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기에 그것의 용도에 대해서는 이미 아는 바가 있었다.
룬프라우드 산맥에 서식하는 수 많은 마물들.
지금이야 산맥 깊숙한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이를 통해 본 것에 대해서는 딱히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노엘과 오르커스가 이 남부에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몸을 사리던 녀석들이 지난번 메로힘에 대놓고 존재감을 드러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나의 존재가 놈들을 적극적으로 만든 것은 확실하였다.
새가 올라서지 않은 다른 한 손을 피자 그곳에는 희미하게나마 검붉은 빛을 내고 있는 보석 하나가 있었다. 이것이 내뿜고 있는 신성은 저 숲에 퍼진 것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수준이었지만 몇 겹으로 감싸고 있는 결계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보석을 발견한 푸른 새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손을 접어 보석을 원래 있었던 곳으로 되돌려 놓았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바뀐 것은 그와 나의 관계만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막을 수 없었던 것도, 누군가에게 손을 빌려야 했었던 것도 이제는 혼자의 힘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눈 앞에 보이는 짙어지는 숲의 어둠은 마치 헤어 나올 수 없는 심연과도 같았지만 지금의 내게 있어 그것은 언제든 치워 버릴 수 있는 얕은 물웅덩이나 마찬가지였다.
새를 다시 창 밖으로 돌려보내 준 후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거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거울 속의 소녀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