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샛별 (20)
명색이 크라우스의 소가주라는 내가 지내는 곳이지만 천막 안에 놓여져 있는 물건들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내가 잠을 자는 침대, 앉아 있을 수 있는 의자 하나와 작은 탁자 하나. 그외에는 이곳에 있는 동안 사용할 의복과 장비의 정비에 필요한 숫돌과 같은 몇개의 도구가 전부이다.
성에서와 같이 티세트를 준비할 수도 그렇다고 간단한 다과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나 내 수발을 들어주었던 켄 역시 이곳에 있지 않았다. 기사단과 동행하는 사냥 훈련에 굳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거니와 무엇보다 켄, 그가 야영을 매우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크라우스에서 일해온 그였지만 켄은 무인이 아닌 집사였으니. 그라면 지금 쯤 대회의 장소가 될 레기온에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현재 우리가 숲에 나와 있는 이유는 순전히 오르커스와 노엘의 연습을 위해서이기 때문이지 이것이 대회의 양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대회는 남부의 크고 작은 여러 가문이 참가하는 귀족들의 대회인 만큼 성 한 곳을 거점으로 두고 시작한다.
그런 생각에 나는 고개를 돌려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맞춰 그녀 또한 나를 바라봐 내게 미소를 비춰주었지만 나는 미안함에 작게 웃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아무래도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귀족으로 살던 아가씨와 도련님이 지내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노엘, 오르커스는 적응한 것 같지만 그들은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목적이라도 있었으니 그런것이지 대회에 참석하지 않는 엘레나는 켄과 함께 레기온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되었을 것이다.
훗날 그녀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이런 것들은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사소한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현재의 엘레나가 굳이 이런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자의로 따라오겠다고 하였을 때 기쁘기는 하였지만 이번만은 레기온에서 편하게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였다.
그런 내 걱정과는 다르게 그녀는 이곳에서 지내는 이틀 간 불편한 것이 없는 사람처럼 능숙하게 야영 생활을 보내기는 했다만 그렇다고 내 마음이 편한 것은 또 아니었다. 역시 다음부터는 엘레나가 바란다 하더라도 성에서 지내게 하는 편이 내게 이로울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어느 순간부터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이불로 눈길을 돌리었다. 원인을 찾는 것은 간단하였다. 바로 옆에서 닿고 있는 엘레나의 손이 그 원인었으니까.
그녀는 내가 사용하던 침대가 신기한지 말 없이 침대를 살피더니 마치 고양이 처럼 손바닥으로 침대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분명 침대에 관해서는 오르커스와 노엘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것 역시 나와 같은 것으로 준비해두었을 텐데 무언가 다른 점이 느껴지기라도 한 것일까?
음....
이거 뭔가 조금 부끄러운 걸.
침대 시트를 꾹꾹 누르고 있는 엘레나의 모습이 귀엽기는 하였지만 지금 그녀가 만지고 있는 곳이 평소 내가 사용하는 이불이라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인다.
분명 아까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그녀가 내 침대에 꾹꾹이를 하고 있는 것이 문제인 걸까.
"축축해..."
"네?!"
그렇게 신경이 집중되어 있던 와중 엘레나의 중얼거림에 나는 그만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축축하다니...내가 이불에 뭔가 흘린 적이 있었나?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나는 당황스런 얼굴로 침대를 덮고 있는 이불을 한번 쓸어 만졌다.
지금 내게는 그녀가 어떤 오해를 할지에 대한 걱정 만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이불을 더듬고 있는 내 표정이 우스꽝스러운지 엘레나는 나를 보곤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들며 그녀가 말한 의미가 단순히 습기를 잔뜩 머금어 찝찝하게 변한 이불을 이야기 한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다시 고개를 들어 엘레나를 보았을 때는 그녀의 장난스런 미소만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왜 그렇게 당황하시는 건가요?"
"음...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위에서 차를 마신 적이 한두번이어야지.
물론 축축하다고 느낄 정도면 내게 기억이 있을게 분명하다만, 방금전까지 침대에 누워있었던 사람이 그것을 모를리가 있나.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말에 당황한 것이 내 실수였다.
내 대답에 엘레나는 맞닿아 있는 손가락을 툭툭 건들더니 반대쪽 손을 들어 허공을 이리저리 휘젖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손을 따라 움직이는 마나의 흐름에 지금 엘레나가 하고 있는 것이 그저 단순한 손짓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작은 물알갱이들이 그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향해 모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 우리의 밑에 깔려진 이불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 위로 물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히더니 그것들은 곧 그녀의 손 위로 떠올랐다. 엘레나가 축축하다고 말한 이불은 이제는 방금 햇빛에 건조 시킨 것 처럼 보드라워졌다.
대기 중의 수분을 모으는 것이 꼭 제습기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제습기와는 달리 육안으로 보일정도로 공중에 맺혀 반짝이는 물방울들이 한곳으로 향하는 광경은 매우 신비로워 보였다.
어느세 엘레나의 손 위에는 작은 물의 공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둥그런 구의 형태를 띄고 있었지만 그것이 물이었음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롭게 계속해서 일렁이는 흐름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엘레나가 손으로 물의 공을 건드렸지만 공은 터지지 않았다.
꼭 젤리를 누르는 것 같이 깊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곧 그녀의 손가락을 튕겨내었다. 내가 그것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자, 엘레나는 다시금 손을 움직이며 공중에 떠있는 물로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공에서 시작된 투명한 물줄기는 곧 선이 되어 그녀의 손을 따라 움직이더니 점점 새로운 형태를 갖추어 갔다. 나는 완성되어 가는 그림을 바라보며 엘레나가 무엇을 그리려는지 알아 맞추어 보기로 하였다.
"음..."
일단 사람은 아닌것 같고. 그럼 동물인가?
형태를 이루는 윤곽선이 점점 선명해져 간다.
작은 물줄기에서 시작된 그림은 어느세 완성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동물인 것은 확실한데, 개과 인건가? 아니며 고양이인가? 귀가 위로 삐죽 쏫아 나 있는 것을 보면 둘 중 하나는 맞는 것 같은데 어느쪽인지 확신이 서지를 않는다.
이게 대체 뭐지?
그림을 완성한 엘레나가 기대하고 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평소였다면 마주보며 웃어주었을 테지만 지금만은 저 반짝이는 자줏빛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졌다.
엘레나...그림 못 그렸구나.
이건 소설에서도 나와 있지 않던 부분인데.
그녀에 대해 하나 더 알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 기뻐해야 마땅할 일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그림은 이미 옛적에 완성되어 있었고 이제는 답을 말해야 할 차례. 여전히 저것이 개인지 고양이인지 확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엘레나의 눈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기나긴 고민 끝에 더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개....인가요?"
내 대답과 동시에 우리 사이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설마 답이 틀렸나?
역시 고양이로 했어야 했던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내 머리를 채우기 시작할 때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쉬운 기색이 비쳤지만 움직이고 있는 입술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개...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정답은 늑대에요."
"아, 그렇군요. 아쉽네요."
늑대였구나...
저게 늑대였어.
나름 정답에 가깝게 말해서 그런지 엘레나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에델바이스 가문의 문장에 들어가 있는 동물이 늑대였던 것 같은데, 고양이라 말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니면 여우라던지.
"그러면 곧바로 다음 문제로 넘어가도록 할까요?"
아.
내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엘레나의 손은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내 심정은 피가 마르는 것만 같았지만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는 그녀를 보니 차마 그만하자고 말을 꺼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틀렸다고 뭐라 할 만큼 엘레나가 속이 좁은 사람도 아니고.
결국 빠르게 체념한 나는 그녀가 그리는 그림이 아닌 다시 엘레나에게로 시선을 옮기었다. 어차피 지금 보거나, 완성되고 보나 예측 못하는 것은 똑같으니 그녀가 웃는 얼굴을 보며 마음을 편히 하는 쪽이 더 괜찮은 선택인것 같았다.
그렇게 몇분을 보고 있었을까. 엘레나는 갑자기 그림을 그리는 것을 멈추저니 내게 말을 걸어왔다.
"데미안. 데미안도 하고 싶으세요?"
뜬끔없이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엘레나. 그림은 보지 않고 계속 다른 곳을 보고 있었기에 그런걸까. 그저 당신이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 보고 있던것 뿐인데. 나는 뭐라 답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레나는 내 한쪽 손을 붙잡더니 아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나를 움직이었다. 마치 시원한 기운이 손을 통과하는 것 같다. 스쳐지나가는 바람과는 다르게 그 기운은 계속해서 내 손의 근처를 머물고 있었다.
"이제 됐어요. 한번 해보세요."
그녀의 말에 다라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우자 아까전 그녀와 마찬가지로 공기 중의 수분이 내 손가락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본 나는 연필을 처음 만진 사람 처럼 쭉 한번 그어 일직선인 물줄기를 만들어냈다.
"뭔가 신기한 기분이네요. 시원하기도 하고."
"그렇죠? 그럼 이제 한번 그려보세요. 이번에는 제가 맞춰볼게요!"
자신있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움직이었다.
***
"와...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고개를 올려 푸르게 변한 천장의 모습에 나는 탄성을 내뱉었다. 물로 그려진 그림들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은 마치 현실에서 벗어난 몽환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것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그것들은 구름과 같이 둥실둥실 내 천막의 천장을 부유하고 있었지만 흰색도 아니었거니와 구름처럼 가벼운 느낌도 없었다.
이와 비슷한 느낌. 예전에도 경험해 보았던 것 같은데...그래. 마치 수중 아쿠아리움에 들어온 것 같았다. 꼭 물고기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 처럼 보이던 수중 아쿠아리움. 그곳과는 다르지만 비슷하게 이곳에는 물로 만들어진 동물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엘레나도, 나도 처음부터 이런 풍경을 만들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그림을 그리는 것에 열중했을 뿐, 더는 그릴 공간이 없어져 천장을 올려다 보니 우리 주변의 풍경은 어느세 이렇게 변해있었다.
"음, 이렇게 할까요?"
더는 여유 공간이 보이지 않자, 엘레나는 여태 그렸던 그림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하였다. 모두 물로 만들어진 녀석들이었기 때문인지 그림들은 서로에게 닿자 마자 하나의 거대한 물방울로 변화하였다.
저렇게 많은 물이 이 방안에 있었던 걸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방의 천장을 가득 매우는 거대한 물방울 하나가 내 눈 앞에 나타났다. 그것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자랑스럽다는 듯 손으로 물방울을 가리키며 내게 말하였다.
"이제 이걸로 그리면 되겠네요."
아무래도 그녀는 나와 같이 한 그림놀이가 매우 즐거웠던 모양이다.
나중에 집에서 알폰스와 같이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물방울을 향해 손을 올리었다. 이번에는 나와 엘레나의 손이 동시에 움직였다. 언제 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서로에게 문제를 내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엘레나는 손바닥을 펴 둥그렇던 물방울을 네모나게 펴기 시작했고 나는 그 위에서 손을 움직여 땅과 하늘을 만들어 갔다. 색이 칠해지는 것이 아닌 그저 선이 들어갈 뿐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봐 줄 만한 그림이 되어 갔다.
엘레나는 동물만 그리지 않는 걸로...
그렇게 하나 둘 완성되어 가는 그림을 앞두고 문득 손에 잡히는 이불의 촉감이 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이전처럼 습기를 머금은 것이 아닌 보송보송한 이불. 나는 다시 이불에서 손을 때 이번에는 반대 손으로 손바닥을 만져보았다. 비가 왔을 때 특유의 찝찝함은 더이상 손에 남아있지 않았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투두둑 들려오는 천막과 땅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듣기 좋은 배경음악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다. 아직 저 비가 그칠려면 멀었다는 것을 말이다.
내 머리 위에는 저렇게 거대한 물방울이 떠 있었고 천막 밖의 하늘에서는 어디 구멍이라도 난 것 처럼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내게 습기로 인한 불쾌감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물방울을 만들었을 때 가져간 것은 내 피부에 묻어있던 수분 역시 극소량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입술이 마를 정도로 건조해 진것은 아니었다만 비가 오지 않은 봄날을 맞이 했을 때의 것과 같았다.
손을 매만지며 피부의 습도를 확인한 나는 그대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
딱히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닿으면 괜히 찝찝함만 주지 않을까 싶어 이전처럼 손 끝만 맞대고 있을 필요가 사라졌으니, 단지 그것 뿐이었다.
엘레나의 어깨를 잡은 나는 그녀를 나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엘레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멈추고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었지만 나는 뭐라 말은 하지 않은채 그녀와 머리를 맞대었다.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이 쓸리며 내 머리를 간질인다.
엘레나는 얼굴을 붉히지도, 이전처럼 고개를 숙이며 내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이전에 같이 나들이를 나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게 편히 기대어 왔다.
"헤헤..."
내가 손으로 턱을 간질이자 엘레나는 배시시 웃으며 손의 온기를 쫒듯 더욱 내게로 다가왔다.
노래처럼 들려오는 빗소리와 공중에 떠 있는 그림 덕분인지 이곳은 내가 지내었던 천막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날아 온 것만 같았다.
하나의 세상에 단둘이 남겨져 있는 것만 같은 그러한 느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미소에 이끌린 것일까. 내 머리는 점점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 가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나를 엘레나는 밀어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녀 또한 나를 바라보며 나와의 거리를 좁혀만 갔다.
서로의 숨결이 피부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같이 춤을 추었을 때도 이만큼 가까워 진 적이 없었는데. 그때 얼굴을 붉히며 눈을 피하던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나의 이런 행동에 내게 남아있는 데미안이라는 존재의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이 행동에 있어 그녀와 가까워질 때마다 느끼었던 이전과 같은 광증은 더는 내 마음속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숨을 내쉬는 것도 멈춘채 나는 그녀의 입술을 응시하였다.
"음."
엘레나에게로 다가가는 그 시간은 찰나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바깥과는 다르게 기나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인간을 넘어선 범주에 있는 사고처리 능력이 이럴때 발목을 잡을 줄이야. 덕분에 그저 한순간에 끝낼 수 있었을 행동에 여러 생각이 겹쳐져 내게 긴장감만을 얹어 주었다.
그렇게 거리도, 두근거리는 내 심장의 심박수도 고점에 달했을 때. 계속해서 들려오던 빗소리와는 다른 어떠한 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어왔다.
찰팍
물을 잔뜩 먹은 질퍽이는 진흙이 튀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소리. 고개를 돌려 이곳에 온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는 곧바로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로 누가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데미안!! 큰일이에요! 오라버니가 많이 아프신 모양이에요!! 비가 그치면 사냥에 나가자고...."
촤아아아악-!
이어지는 노엘의 목소리는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에 묻혀 내 귀에 닿지 않았다. 우리의 머리 위에 떠다니던 그림은 하나의 거센 폭포가 되어 방안을 적셔 갔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로 이렇게 될 줄이야.
아쉬운대로 나는 우리를 덮은 물줄기를 가림막 삼아 그녀에게 짧은 입맞춤을 하곤 다시 태연한 얼굴로 노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방금 잘 못들었는데. 다시 이야기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노엘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