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62화 (62/131)

< 62화 > 샛별 (19)

제국의 남부.

안정된 기후와 더불어 비옥한 토지 덕에 주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루덴을 제외한다면 동부와 더불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으로 평가 받는 곳이다.

하지만 신은 공평하다는 말과 같이 이 남부지역에도 북부의 기후와 같은 골칫덩어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남부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룬프라우드 산맥이었다. 옛 크라우스 가문의 전설에 나오는 사룡(邪龍)이 살던 곳이라 전해지는 그곳은 대륙 최대의 마물 서식지이자 아직까지 명확히 조사가 되지 않은 마경(魔境) 중 하나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언제나 그 접견 지역에서 마물들과 죽고 죽이는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만, 그럼에도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마물들이 본격적으로 내려오는 시기는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드는 겨울. 그 넓은 산맥 안에서 먹을 것이 동나기라도 한 것인지 마물들은 겨울을 주기로 산맥에서 내려온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이 세계의 기반이 된다고 생가되는 책을 읽은 나조차 알지 못한다.

책에서 알려준 것은 그저 그렇다고 하는 설정이 있다고 알려준 것이 전부였기에 나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산맥 내부의 먹이가 부족해서 라고 어렴풋이 추측만 할 뿐 거기에 대한 답을 내릴 수 는 없었다.

하여간, 겨울이 다가오면 사르함을 비롯하여 남부의 도시들은 대규모 마물의 토벌을 벌이는 것으로 겨울이 왔음을 알린다.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내기만 한다면 이 남부에서 겨울철 걱정거리는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남부의 봄철 사냥대회 역시 이와 비슷한 취지에서 열리게 된 것이었다.

겨울이 지나가면 산맥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마물들과 마주칠 위기는 사라지게 된다지만 산맥을 끼고 있는 영지들에게 있어 위험이 되는 것은 마물만이 아니었다.

유독 다른 곳들과는 달리 대기중 마나의 농도가 짙은 룬프라우드 산맥.

산맥에서 서식하는 마물들의 생태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원인인지는 모르겠다만 마법의 발현에 지장이 갈 정도로 짙은 마력은 마물 뿐만이 아닌 산맥에서 사는 동식물들에게도 영향을 끼치었다.

같은 종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다른 지역의 동식물들과 비교했을 산맥에서 사는 동식물들은 그것들이 가진 모든 능력들이 극한으로 발달되어있다.

워낙 산맥 내부의 생태계가 다양한 만큼 서식하는 맹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였고 이렇게 마력을 품고 자라난 맹수들의 위험도는 어지간한 마물들과 견주어도 될 정도였다. 옛날 옛적 호랑이가 마을에 내려왔다 하면 호환(虎患)이라 하여 재해의 일종으로 여길 정도였는데 마력을 머금어 더욱 강해진 호랑이라니, 말 다한 셈이다.

사냥 대회라 하여 각 가문간의 무예를 겨루기 위함도 있었지만 본질적인 의미는 마물 토벌과 같이 영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해수들을 토벌하는 것이다.

마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험성이 줄어, 대회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다만. 뭐, 대회에서 우승한 가문이 다스리는 영지에서는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축제가 벌어지기도 하니. 넓게 보자면 남부 가문간의 친목도 다지고 힘든 겨울을 이겨낸 영지민들의 흥도 돋구는 연례행사라고 할 수 있겠다.

오르커스가 기를 쓰며 대회에 참가하려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을 하려는 생각으로 참가하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남부에 위치한 가문들의 성향이 마법보다는 무(武)에 집중되어 있으니 말이다.

노엘이 있기는 하여도 황위를 노리는 그로서는 남부의 귀족들에게 좋은 인상 하나 정도는 남겨두는게 좋을테니.

"어, 비다."

여느때와 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 검을 휘두르러 밖에 나오자 하늘에서 떨어진 물방울 하나가 내 볼을 건들인다. 무슨 일인가 하여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태양이 떠있어야 할 곳에는 흐릿한 먹구름들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한 방울씩 떨어져 흙에 점을 찍어내던 빗방울들은 어느샌가 거새지더니 땅을 흠뻑 적시기 시작했다.

어쩐지 전날 잠자리가 조금 습하더라.

나는 곧장 천막 안으로 들어가 밖을 둘러보았다.

점점 강해지는 빗줄기 탓에 사람들은 서둘러 짐들을 안으로 들이기 시작했다. 금세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걸까.

병사들의 움직임은 빗줄기가 강해질 수록 그 속도가 빨라져 갔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밖을 채우던 인기척은 모두 사라져, 다시 빗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땅이 질퍽해질 정도로 비가 내리고 있으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제국의 하나밖에 없는 황자에게 이런 날에까지 연습을 하자고 말 할 수 는 없었다. 그가 스스로 자진해서 나선다면 모를까.

어젯날 숲에서의 사냥을 성공한 것에 기뻐한 걸 생각해 본다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작은 가능성이 지금 이 빗줄기 사이를 헤집으며 밖을 나선다는 선택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실낱같은 가능성이 일을 내, 오르커스가 내게 밖에 나가고 싶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오르커스의 말에 반대할 것이었다. 아무리 이곳이 초입이라고는 해도 룬프라우드의 이름이 어디가는 것은 아니었으니. 괜히 이런날 무리해서 사냥하겠다고 나섰다가는 작년과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오르커스와 노엘.

그 두 남매가 사르함에서 지낸지 어느덧 일주일이 되어간다. 사냥대회까지는 앞으로 나흘이란 약간의 시간을 남겨두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이전처럼 무리하게 오르커스의 연습량을 늘릴 필요는 없었다.

일주일간 가장 변화가 컸던 이를 꼽으라고 하면 당연히 주저 없이 노엘을 뽑겠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오르커스의 실력 또한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대회의 우승을 노릴 정도는 아니다만 그래도 남들에게 찬사를 받을 정도는 된달까.

내가 보기에 애매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본인이 만족한다면야 괜찮겠지.

둘이 머무는 천막이 쳐진 방향을 보았지만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그곳 역시 조용하기만 하다. 노엘, 그녀라면 이런 날씨에도 숲으로 뛰쳐 나갈 줄 알았는데, 오르커스가 옆에서 말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휴식인건가..."

나는 그렇게 중얼 거리며 천막 안에 준비된 간이 침대에 앉았다. 약간 딱딱한 것이 성의 방에 있는 것 보다는 못하면서도 이렇게 바깥에서 야영을 하는데 사용하기에는 충분히 과한 물건이었다.

습기 때문인지 평소보다는 조금 일찍 일어나 다시 잠에 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만 세차게 천막을 두들기는 빗소리 때문인지 그렇게 잠을 자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결국 할 것을 찾지 못한 나는 빗방울에 흔들리는 천막의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어느순간 부터인지 점점 비워지는 머리에, 이것도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한 공백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루함이라는 감정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절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그대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우의를 찾았다.

"지금은 자고 있겠지."

이미 자신의 입으로 그녀를 만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는 것을 말했음에도 몸은 엘레나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 걸려있는 우의를 겉에 걸치고는 아직 비가 쏟아지고 있는 밖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기세 좋게 밖을 나서려던 앞의 행동과는 다르게 천막 틈 사이로 보이는 밖의 풍경을 보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빗줄기는 이전보다 더욱 거쌔졌지만 그것이 내 발을 멈출 이유는 되지 못하였다. 그저 이제 이 천막 밖을 나설 이유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천막 너머로 보이는 인영에 나는 발을 때지 않은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내게로 다가오고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찰팍-

물이 튀는 소리와 함께 내 시선의 끝에는 나와 같은 검은 우의를 둘러 쓴 이가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우의의 검은 천 위로 삐죽 튀어나온 물에 젖은 하얀 머리카락이 반짝인다. 나는 바로 옆 의자에 두었던 천을 들고 다가가 우의를 들추고는 그녀의 머리 위에 천을 살포시 올려다 놓았다.

그래도 우의가 제 역할을 하였기에 비에 맞은 부분은 극히 일부였지만 나는 그녀의 머리를 감싸듯 천을 머리 위에 둘러 천천히 아래로 쓸어내렸다.

얇은 천 너머로 부드러운 머리의 감촉이 전해져 온다. 느닷없이 머리 위에 천을 끼얹었으면 당황할만도 한데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하였다. 가만히 내 손에 머리를 맡기고 있는 것이 마치 얌전한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아 나는 말 없이 눈으로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풀어진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던 것도 잠시, 내 눈에 담긴 의미를 눈치챈걸까. 엘레나는 날카롭게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아도 이미 그녀의 눈이 머릿속에서 연상된 것과 겹쳐져 엘레나의 뜻과는 달리 위협은 되지 않은채 내 입꼬리만 올릴 뿐이었다.

내가 계속해서 미소로 일관하자 되려 그녀의 얼굴만이 붉어진다.

고개를 다시 아래로 숙이기 시작하는 엘레나. 나는 계속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그녀의 머리를 털었다. 털었다고 하기 보다는 쓰다듬는 것에 가까웠지만. 더는 물기를 닦기 위함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변질되어 버렸지만. 뭐, 어떤가?

엘레나는 계속해서 내 눈을 피하려고 하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엇을 발견한 것인지 그녀는 갑자기 작게 웃더니 미소를 머금은채 다시 나와 눈을 맞추었다.

"어디 나가시려고 하셨나봐요?"

비에 젖지 않은 우의. 말은 저리 하여도 그녀는 이미 내가 이 우의를 입은 이유를 알고 있는 듯 하였다. 나는 그녀의 말에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랬습니다만, 이제 나갈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나는 그리 답하며 엘레나의 젖은 우의를 천과 함께 의자에 널어 두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침대로 가 앉았고 나 역시 우의를 벗고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