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샛별 (18)
노엘이 떠나 남자 둘만이 남은 사격장.
사람이 한명 줄었을 뿐인데, 나와 오르커스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둘만 남은 이 공간에는 오로지 오르커스가 쏜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어느 정도 감각을 잡은것일까. 나는 그의 화살이 점점 중앙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주신의 신성을 이었다는 것이 헛말은 아니었는지 오르커스의 전체적인 근골은 잘 단련된 무인에 가까웠다. 그는 노엘과 같이 꾸준히 단련을 한것은 아니었지만 마법사가 아닌 숙달된 전사라 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완성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몸과 전투의 감각은 약간 다른 영역에 있는 것이었지만 지금 그의 일진월보하는 활솜씨를 보았을때 적어도 오르커스가 걱정하는 것 만큼 사냥대회에서 부끄러울 일은 없을 것 같다. 그에게 병기에 뛰어난 재능은 없어도 단련한 만큼 그에 대한 실력의 향상은 분명했으니 말이다.
열번째 화살이 과녁에 박히자, 나는 잠시 그를 멈춰 세우고는 과녁의 거리를 30보 뒤로 물렸다. 멀어지는 과녁의 모습에 오르커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거리를 다시 잰 것인지 스스럼 없이 시위를 당기었다.
퉁
중앙은 아니었지만 화살은 과녁을 벗어나지 않았다. 화살이 과녁에 들어갔다는 것이 만족스러운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는 오르커스.
그렇게 자신감을 얻은 오르커스의 손은 처음과는 다르게 조금씩 속도가 붙고 있었다. 단순히 속도만 빠르게 쏘았다면 뭐라 지적을 했을 테지만 속도와 함께 명중률도 올라갔기에 나는 아무말 없이 그의 사격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의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에 틀어박혔다.
이때까지 소모된 화살은 총 서른여섯발.
서른여섯번의 활질만에 첫번째 성공인것이다.
이쯤되면 환호성을 부를만도 한데, 오르커스의 입은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화살을 잡았던 손을 불끈 움켜쥐는 것이 확실히 기쁘기는 한 모양이다.
슬쩍 내게로 고개를 돌리는 오르커스의 눈은 노엘처럼 크게 티는 나지 않았지만 분명 그녀와 같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도 남매라는 것인가. 닮은 것이라고는 머리색과 눈색만 있는 줄 알았다만.
나는 그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뒤로 30보만 더 물리도록 하죠."
그러자 오르커스의 눈이 찌부러지기 시작한다.
왜? 이걸 원한게 아니었나?
나는 오르커스의 따가운 시선을 모르쇠로 일관하며 넘기었다. 나와 자신의 밑에 놓여진 화살더미를 번갈아 바라보는 것이 '조금 양을 줄이는 것이 낫지 않는가.' 라고 무언으로 시위를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오르커스의 발밑에 놓여진 화살더미들.
노엘을 그냥 보내어 준 나는 오르커스에게는 그녀와는 다르게 매우 많은 화살들을 숙제로 내주었다. 쉽게 본인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오르커스가 살짝이나마 식겁하는 얼굴을 드러낼 정도로 매우 많은 양의 화살이었다.
그야 사격장에 비축분으로 가져다 놓은 화살들을 전부 가져다 놓았으니 그 양이 많을 수 밖에.
아무래도 중앙을 맞추었으니 할당량을 조금 줄여달라고 하는 것 같은데. 애초에 처음부터 그에게 이 많은 양의 화살들을 전부 쏘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지금 내가 가져다 둔 화살을 전부 사용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훈련이 아닌 훈련의 탈을 쓴 고문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굳이 이렇게 많은 화살들을 그에게 할당량이라고 가져다 준 이유는 오르커스가 처음에 어느정도의 훈련량을 생각하던 그것을 정하는 것은 나였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아마, 오르커스 스스로도 자신의 훈련에 어느정도 성과가 있다면 내가 조절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처음 내가 상식 이상으로 훈련량을 설정했더라도 그것에 반박하지 않았던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지금 오르커스의 행동은 어느정도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가 생각했을 때의 성과와 내가 생각했을 때의 성과에 차이가 있었음을 그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오르커스는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거기에 대해 뚜렷하게 발전이 드러나는 녀석이다. 그런데 내가 고작 중앙을 한번 명중 시킨 것 가지고 만족할 수 있을리가 있나. 그렇지 않아도 남부의 사냥대회는 다른 일반적인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어중간한 실력으로는 그 마경에서 토끼 한마리 잡는 것 조차 어려울 테니, 적어도 200보 이내에서는 자유롭게 원하는 표적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갈 길이 먼데, 벌써부터 긴장을 늦출 수는 없는 법.
그렇게 내가 다시 과녁을 움직이러 자리를 벗어나려 할때, 오르커스는 깊게 한숨을 쉬더니 갑자스레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네가 느끼기에는 어땠는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방금 전 화살을 이야기하시는 것이라면 정말 잘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기세를 몰아 30보만 더 물리도록 하죠."
"아니, 그것 말고. 노엘 말일세. 노엘."
노엘?
갑자기 그녀의 이야기는 왜 꺼내는 것이지?
생각지도 못한 대화의 주제에 나는 옮기려던 발걸음을 잠시 멈춰세웠다. 그의 말에 걸리는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오르커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르커스는 내가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잠시 주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혹시 노엘이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있는 걸까.
워낙 탁 트인 곳에 만들어진 사격장이었기에 그녀가 근처에 있다고 한다면 곧바로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주변에 구조물이 없는 곳이라 몸을 숨길 곳도 없어, 오르커스는 주위에 노엘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오늘 노엘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
"대화의 집중을 못하신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겁니까?"
"그러게 말이야. 어제 이후로 약간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했다네."
오르커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설마, 이 녀석. 지금 노엘의 행동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어제라.
나는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어제 있었던 만찬장에서의 만남. 무언가 이변을 느낀 것은 그때부터였으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유독 나와 엘레나의 시선에 자꾸 섞이었던 그녀다. 우리를 계속해서 번갈아 보고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지 않나, 그러다 또 엘레나를 보면 갑자기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있지를 않나. 참으로 일관성 없는 행동의 연속이었다.
방금전 연습에서도 그녀 답지 않게 오르커스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다른 생각에 빠져있지 않았던가. 상황을 보았을 때 그가 원인을 나라고 특정짓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엘레나도 포함이 된다만은.
계속 신경이 쓰이던 부분이었기에 그런걸까.
나는 어느세 오르커스가 던진 화제에 진지하게 빠져들어 버렸다. 뭐, 고민을 해 본다 한들 내가 그녀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답을 얻을 수 있을 리 없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부족한 상상력을 자극해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를 써내리는 것 뿐이었다.
그런 와중 갑자기 던져진 오르커스의 말 한마디가 내 머리를 때렸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노엘이 자네를 좋아하는 것 같네."
"뭐?"
오르커스의 말에 무심코 나는 경어가 아닌 평어체로 답하고 말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뒤이어 날아올 오르커스의 질책에 변명하려 하였지만 내게 들려오는 것은 그의 웃음소리가 전부였다.
황실의 권위를 중요시 하는 그였기에 나의 언행에 주의가 날아올만도 했지만 그는 내 반응을 보고는 웃기에 바빴다. 그 웃음에 나는 방금전 그의 말이 내게 던진 장난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순간 식겁했네.
노엘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르커스가 그렇게 말하니 분명 말이 안된다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잠깐이나마 그의 말을 진심으로 생각할 뻔 하였다. 내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오르커스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자네, 그런 얼굴도 할 줄 아는구만.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이로군."
"장난이셨습니까?"
"음? 설마 아쉬운건가?"
"그럴리가요. 단지 황녀 전하께서의 행동도 전하께서 설계하신 장난인지 궁금한 것 뿐입니다."
"그건 아닐세. 그, 내가 이런 말 하기에는 뭐하다만. 노엘 그 아이가 그런 치밀한 연기를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네.
내가 자신의 말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오르커스는 쓰게 웃었다.
"그렇다면..."
"어제 자네들과의 만남 이후 노엘에게 고민이 생긴 것은 사실이 맞다네. 방금전 했던 이야기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 정도겠지."
결국 노엘의 변화에 나와 엘레나가 관련되어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대체 노엘의 고민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에게 있어서 그녀와의 만남은 잠깐 대련을 하고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였기에 그녀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아내기에는 정보가 턱 없이 부족했다. 오르커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내게 더 이상 질문을 던지는 일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곧바로 내게 말해 주었다.
"믿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노엘이 자네와 엘레나 공녀의 약혼 사실을 안 것은 바로 어제였다네. 정확히 말하자면 알고는 있었는데, 기억이 난게 어제라고 할 수 있겠군."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오르커스의 말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애초에 저들이 이곳에 온 표면적인 목적이 나와 엘레나의 약혼을 축하하기 위해서인데 정작 당사자 중 한명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나는 이어진 오르커스의 말에 곧바로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노엘이 검에 관심이 많지 않은가. 아니, 많은 정도가 아니지. 내 생각에 그 아이는 검에 미쳐있어. 아무튼 노엘의 성격이 그렇다 보니 말을 전달했을 때 사르함에 간다는 이야기만을 걸러들은 모양이야. 어제 내가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말해 주기 전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던 모양이더라고."
"하."
오르커스의 말을 듣고나니 그제야 모든 것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왜 그녀가 나와 엘레나를 번갈아 보고는 얼굴을 붉혔는지. 왜 엘레나를 보면서 안전부절 불안해 했던 그 모든게 설명이 되었다.
연무장에서 엘레나의 앞에서 내게 스스럼 없이 대한 것은 그저 그녀의 성격이 밝고 순수했기에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그녀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니. 그 때문에 알고 나서는 행동이 묘하게 조심스러워 진 것이었구만.
어쩐지 일부러 나를 피하는 경향이 있더라니.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녀가 일찍히 사격장을 떠난 이유도 어쩌면 엘레나를 만나기 위함일지 모르겠다.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아니여서 다행이네.
오르커스에게 답을 듣고나니 그간 신경 쓰이던 것이 풀려 마음이 개운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은 남아있었다. 나는 노엘의 이야기를 하며 웃는 그를 향해 물었다.
"그럼 전하께서는 갑자기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의 질문에 오르커스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그는 더이상 소리내어 웃지 않았지만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채 내게 말했다.
"친구가 되기 위해서. 친구라는 건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만드는 것이라고 하던데 아닌가?"
"그건 아닙니다만.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렇군. 생각했던 것보다 평범한 이유였네.
오르커스의 대답을 듣고 궁금증이 완전히 풀린 나는 다시 과녁을 움직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과녁에 박힌 화살을 뽑고 다시 한번 뒤로 30보 후퇴시킨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황당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오르커스가 있었다.
나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향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음,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달라서 말이야. 혹시 잘 못 들었는가?"
"아닙니다. 친구가 되고 싶으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그럼?"
"뭐, 더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그 말은 내 말에 승낙한다는 뜻으로 알아 들어도 좋겠는가. 그걸 묻는 걸세."
오르커스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웃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
"친구가 되는 것에 무슨 승낙이 필요합니까. 전하께서 저를 친구라고 여기시면 친구인 것이고 적이라 여기시면 적인 겁니다. 이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지는 저와 전하가 결정하는 것이지요."
인간관계라는게 어떻게 만들어 질 때부터 그 방향을 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황성에서 수많은 정적들에게 치이고 산 오르커스가 모를리 없었지만 이러한 바보같은 질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그에게 친구라는 것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말을 듣자 어째서 황제가 이들에게 친구를 만들라고 하라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르커스는 내가 건낸 답의 의미를 알았는지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내게 손을 건내며 말했다.
"그런가. 앞으로 잘 부탁하네. 데미안."
나 또한 그가 건낸 손을 잡으며 답했다.
"저 역시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오르커스."
과연 그가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아니면 그저 도구로 생각할지는 나 역시 모른다.
소설 속 오르커스 에스텔리아는 계산적인 면이 돋보이는 사내였으니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친구가 됨으로 인한 손익을 계산하고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그가 나를 친구로 대한다면 친구로 대할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 그저 정치적 도구로만 여긴다면 나 역시 그를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이용할 도구로 여길 뿐이다.
내게 이름으로 불린 오르커스는 듣기에 어색했는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가족이 아닌 이에게 이름으로 불리니 조금 어색하긴 하군. 음,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야. 데미안. 이제부터 사적인 자리에서는 편하게 대해도 좋다네. 아니지, 아니야. 내가 먼저 바꾸는 게 낫겠어. 앞으로 편하게 불러도 좋아."
황자라는 위치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닌 그의 어조는 분명 평소와 같이 절제되어 있었지만 사람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해야하나, 오르커스라는 퍽퍽한 빵에 노엘이라는 슈가파우더를 뿌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전과 같은 가식적인 점이 조금은 사라져 보기에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래. 그렇다면."
오르커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곧바로 경어를 그만두었다. 이에 다시 한번 오르커스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그의 발 밑에 놓여진 화살더미에서 화살을 한대 뽑아 그에게 건내주며 말했다.
"30보 뒤로 밀었으니까 이제 다시 시작하도록 하지."
"이런 제길."
어딜 얼렁뚱땅 넘어갈려고.
아직 갈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