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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60화 (60/131)

< 60화 > 샛별 (17)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송이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하얀 눈의 색과는 달리 저 하늘 위에서 눈을 흩뿌리는 구름의 색은 회색이다. 하늘을 올려다 보던 노엘은 문득 그러한 구름의 색에 문득 의문을 가졌지만 이내 시선을 거두고는 땅에 내려앉은 눈으로 인해 새하얗게 변한 세상을 둘러 보았다.

눈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만 노엘은 지금 자신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살짝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 이전에는 보지 못하였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태 황성의 밖을 나가본 적이 없는 그녀가 지금 서 있는 곳은 황성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황성을 나온 그녀가 처음으로 발을 밟은 곳은 다름 아닌 1년의 절반을 눈과 함께 지낸다고 알려진 제국의 북부의 중심. 메로힘이었다.

눈의 도시라는 별명과도 같이 시선이 향하는 곳마다 눈으로 덮힌 순백색의 세상만이 눈에 들어온다.

여태 시찰에 자식들을 동행시키지 않던 황제였지만 이번 북부 시찰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르커스와 노엘, 자신의 두 자녀를 동행시켰다.

현왕이라 불리우는 황제였기에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오르커스는 생각하는 모양이다만 그런 오르커스와는 다르게 노엘은 이유야 어찌되었든 지금 자신이 황성을 나왔다는 그 사실이 즐거웠다.

오죽하면 이렇게 가만히 서서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질까.

현재 수도 루덴에서도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이것은 눈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지금 노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아닌 여태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새로운 장소라는 사실이었다. 에델바이스의 겨울성이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황성에 비할바는 아니었다만 항상 보았던 지긋지긋한 황성의 건물보다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겨울성을 걷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 즐거운 일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과 함께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다.

겨울성과 함께 메로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여명의 탑. 탑의 꼭대기에는 구름이 잔뜩 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구름을 찢으며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거대한 건물들이 즐비한 루덴이라고 하여도 여명의 탑과 같은 규모의 건축물은 흔치 않았다. 더군다나 마탑이라는 이름답게 하늘 높이 솟은 탑의 벽면에 새겨진 마법수식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신비로운 느낌을 풍겨왔다.

"예쁘다..."

당연하게도 그런 여명의 탑의 모습은 노엘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관의 신비로움에 의한 관심일 뿐. 그녀는 여명의 탑에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여명의 탑은 마탑(魔塔). 저 거대한 구조물은 마법을 연구하는 기관이자 마법사들을 키워내는 교육기관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마법보다는 검과 같은 무술에 관심이 큰 노엘에게 있어 여명의 탑은 '멋지게 지어진 건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만약 들어간다 하여도 열람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제한되어 있어, 황족이라는 신분 만으로는 마탑의 깊은 곳 까지 들어갈 수 는 없었기에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저위계의 마법이 정리된 이론서가 전부였다.

저위계라고는 하나 마탑에서 보유하고 있는 물건인 만큼 마법사들에게 있어 하나 하나 중요한 책 임은 틀림 없었지만 마법에 큰 흥미가 없는 노엘에게 있어 그런 이론서는 시중에 파는 싸구려 소설보다 못한 것이었다.

"오라버니는 좋겠어요~ 마탑도 들어가고..."

노엘은 여명의 탑을 보곤 그곳으로 향한 자신의 쌍둥이 남매. 오르커스를 떠올렸다. 쌍둥이라고는 하나 서로 재능에 있어서는 그 분야가 극과 극으로 다른 둘이었다.

오르커스는 마법, 노엘은 검.

그렇기에 노엘과는 다르게 그에게 있어 대륙에 일곱개 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탑. 여명의 탑은 보물창고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으으으음..."

황성 밖으로 나온 것이 즐겁기는 하다만 자신과는 달리 좋아하는 것을 찾은 오르커스의 모습을 떠올리고 나니 노엘은 무언가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아쉬웠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밟으면서 본적없는 풍경을 보는 것도 충분히 즐거운 일이었지만 이왕 밖으로 나온 거, 노엘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관련된 새로운 자극을 원했다.

그런 생각을 한지 몇분이 지났을까. 여명의 탑의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지켜보던 노엘은 결국 자리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마법명가로 유명한 에델바이스 공작가이지만 그렇다고 기사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연무장에 가본다면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연무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그녀는 자신의 눈을 스쳐지나간 무언가를 보곤 발을 멈추었다.

노엘의 눈이 향한 곳에는 밤하늘의 별빛을 머금은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한 소녀가 성의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소녀를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방금전만 하여도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으니 그녀가 누구인지 노엘은 알고 있었다.

"엘레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노엘은 소녀를 발견하자 마자 그녀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그녀의 뒤를 쫒기 시작했다.

어째서 엘레나의 뒤를 밟았는지는 노엘 본인도 그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하였다. 말을 걸었다면 되었을 걸. 그 자리에서 말을 걸었다면 몇마디 인사말을 나누고 헤어지게 될 것 같아 그런걸까. 아니면 순수히 그녀가 어디를 가는지 궁금해서 그랬던 걸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채 노엘은 계속해서 엘레나를 따라갔다.

기나긴 복도를 지나 몇번 코너를 꺾자 엘레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어떤 문의 앞이었다.

엘레나가 문을 밀어 열자 열린 문틈의 사이로 북부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따스한 공기가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와 동시에 실려온 향긋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황실의 정원에서나 느꼈던 꽃향기가 어째서 겨울성의 안에서 느껴지는 것일까.

그러한 의문을 해결하는 것도 잠시, 갑작스레 바뀐 공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노엘은 그만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잊어 버리고 말았다.

다시 문을 보았을 때 이미 엘레나는 문 안으로 사라지고 난 뒤였다. 자연스래 그녀를 따라 문에 손을 가져다 대는 노엘. 하지만 닫힌 문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이 문을 열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앗."

엘레나가 눈 앞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멈춰있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낯선 복도의 풍경에 그간 잊고 있던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이곳은 황성이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황녀라는 신분이 허용되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엘레나가 들어간 방이 어떤 곳인줄 알고 제멋대로 들어간다는 말인가. 애초에 아무말 없이 다른이의 뒤를 밟았다는 것 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만. 결국 뒤늦게 찾아온 죄책감에 노엘은 문을 열지 못한채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죄책감이 문제가 된다면 이대로 이곳을 벗어나 다시 밖으로 나오면 될 일이었지만 노엘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엘레나가 사라진 문의 옆으로 걸어가 왜 자신이 그녀를 따라왔는가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막상 따라올때는 쉽게 결론 지을 수 없었던 문제가 혼자 남게 되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간단하게 풀리고 말았다.

여러가지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사실 이 하나에서 시작된 부가적인 것에 불과했다.

답은 간단하였다.

노엘은 엘레나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황성을 나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또래의 여자아이다.

첫만남 때 인사를 나누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어떻게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궁금하기도 하였고 엘레나에게 이곳, 메로힘의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하였다. 그녀가 원한다면 황성은 어떤 곳인지 이야기 해줄 수 있고 말이다.

그렇게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노엘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정작 당사자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전혀 없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노엘이 아니었다.

문 뒤에 어떤 방이 있을지, 엘레나가 언제 방에서 나올지 노엘이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녀가 방에서 나올때까지 노엘은 자리를 지키기로 마음 먹었다. 문 옆 벽에 등을 기댄채 노엘은 조용히 엘레나가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렇게 몇분이 지났을까.

문을 타고 넘어오는 온기와 바깥의 찬 공기가 맞물리자 이상하게도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가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주위에 은은하게 퍼져있는 꽃향기는 조금씩 노엘의 마음을 풀어가고 있었다.

"읏! 자면 안돼!"

눈이 감길때마다 자신의 볼을 한번씩 꼬집는 걸로 깨고 있는 노엘이었지만 그것도 한계인듯 몇분이 지나자 더 이상 그녀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벽에 반듯하게 붙어 서 있던 노엘의 몸도 넘어오는 온기로 인해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완전히 바닥에 앉아 골아 떨어진 노엘.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서둘러 그녀를 깨워주었겠지만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드문 것인지 그녀가 잠에 빠진 사이 그 어떤 사용인도 이 복도를 지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잠에서 꺼내 줄 이가 아예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어느덧 세상을 비춰주던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져 하늘이 검게 물들기 시작할때

끼익-

문이 열리며 엘레나, 그녀가 문 밖으로 나왔다. 문에 들어갔을 때와는 다르게 엘레나의 얼굴에는 꽃과 같은 화사한 미소가 피어있었다.

"흠냐냐...."

"..!"

다만 문 옆에서 쓰러진듯 잠을 자고 있는 노엘을 발견하자 언제 그랬냐는듯 엘레나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갑자기 눈 앞에 황녀가 복도에서 골아 떨어진채로 발견된다면 그 누가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나? 엘레나는 그녀를 깨울 생각은 하지 못한채 어찌할 줄 몰라하며 노엘을 가만히 내려다 보기만 하였다.

그렇게 기묘한 대치가 10분 정도 이어졌을 쯤일까. 엘레나는 결심을 했는지 허리를 숙이고는 노엘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전하. 황녀 전하. 일어나세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론 노엘이 그런 작은 목소리로 깨어날 일은 없었다. 엘레나에게 있어 처음으로 가족 이외에 누군가에게 용기를 내 스스로 말을 건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것이 노엘의 귀에 엘레나의 말이 닿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결국 엘레나는 노엘이 눈을 뜰 때까지 계속해서 그녀를 부를 수 밖에 없었다.

***

"앗."

"노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가, 엄청 미안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노엘의 말에 엘레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그것이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는지 다시 화원을 향해 시선을 돌리었다.

노엘 또한 엘레나를 따라 그녀의 곁에서 조용히 눈 앞에 펼쳐진 화원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입이 트인 노엘에게 더는 망설임은 없었다. 하지만 꽃과 함께 있는 그녀를 보았기 때문일까, 이렇게 꽃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으니 처음 그녀와 친구가 되었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 처럼 쌓여있었지만 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추억들이 계속해서 떠올라 물어보는 것도 잊은채 과거에 잠겨갔다.

넓게 펼쳐진 하늘 아래 각양각색의 꽃들이 활짝 피어, 눈에 담기는 세상의 모습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가슴에 구멍을 뻥 뚫어 준 것만 같은 청량감을 주는 풍경.

하지만 노엘은 지금 눈에 비쳐지고 있는 화원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주었던 엘레나의 화원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본 노엘은 웃으며 엘레나에게 말했다.

"아름답네요."

노엘의 말에 엘레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로 밝은 미소로 답해주는 그녀의 모습에 노엘은 다시한번 엘레나를 향해 미소짓고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엇에 대해 먼저 물어봐야 할까? 약혼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지금 이곳에서 지내는 생활은 어떤지에 대해 물어봐야 하나?

하늘을 보며 노엘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엘레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물어보아야 할지 그것이 문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평소였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속사포로 질문을 뱉어냈을 노엘이었지만 지금 이 시간만은 그녀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가 고민하는 시간은 길어져만 갔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하는 노엘의 생각을 멈추게 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엘레나의 부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엘레나는 그녀에게 손을 건내며 물었다.

"노엘. 잠깐 걷지 않을래요?"

엘레나의 말에 노엘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노엘이 손을 잡자 엘레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화원의 안으로 노엘을 이끌었다.

화원의 안에서 펼쳐지는 풍경에 노엘은 다시금 감탄을 내뱉었다.

바깥에서 보았을 때와는 그 느낌이 달라, 화원을 걷는 것은 마치 그림속으로 들어간 것만 같았다. 몇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바뀌는 꽃들의 변화는 꼭 여러 세상들을 합쳐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엘레나는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둘러보는 노엘의 모습에 작게 입꼬리를 올리었다.

"그러고보니 전에 황성에 오면 노엘이 저에게 황성의 정원을 구경시켜준다고 했지요. 노엘이 보기에는 어떤가요? 황성의 정원도 이곳만큼이나 아름다운가요?"

그녀의 질문에 노엘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멈추고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나지 않아 엘레나를 본 것이 아니었다.

'이 다음에 엘레나가 황성에 오게 된다면 제가 직접 황성의 화원을 안내해 드릴게요!'

처음으로 사귄 친구와 한 약속을 그녀가 잊어버렸을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와 친구가 되었던 유리화원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그것이 혼자만의 추억이 아님을 확인하자 노엘은 엘레나와 잠시 눈을 맞추었다.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엘레나의 자색빛 눈동자. 그 맑은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분명 엘레나가 본다면 여기보다 황성에서 더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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