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샛별 (16)
만찬장에서의 만남이 있은 이후 그 다음날.
데미안은 노엘과 오르커스를 크라우스의 영주성 귀퉁이에 마련된 자그만한 사격장으로 이끌었다.
사격장은 제국 굴지의 무가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허전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표적이 될 과녁과 활과 화살을 수납하는 함 몇개만으로 단촐하게 구성되어 있어, 오르커스는 저 멀리 놓여진 과녁을 보고는 작게 중얼 거렸다.
"저 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거지?"
"약, 80보 정도 됩니다."
"멀군."
"그렇게 먼 편은 아닙니다만."
"아니야. 멀어."
데미안의 대답을 단박에 부정하는 오르커스.
뛰어난 마법사인 그에게 있어 먼 거리의 표적을 맞추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마법을 사용하였을 때의 이야기였다. 마법을 익히기 전에 한번은 잡아보았던 활이지만 그의 기억에 따르면 활은 그리 썩 쉽게 다룰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데미안은 과녁을 바라보며 거리를 가늠하고 있는 오르커스를 뒤로 한채 말 없이 나무 막대를 하나 집어 들더니 그의 앞에 서 땅을 향해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가가각-
단순하기 짝이 없는 동작이었지만 그 한번의 움직임에 땅에는 길다란 경계선이 하나 그어졌다. 바로 뒤에 서 있었음에도 어떠한 마나의 움직임도 감지 못한 오르커스는 땅에 새겨진 검흔을 유심히 바라보곤 데미안을 향해 말했다.
"역시 자네에게 부탁하길 잘한 것 같군."
"과찬이십니다."
지금 그들이 있는 장소의 주인인 아서는 이곳에 있지 않았다.
그 역시 사르함에서는 황제와도 같이 바쁜이 였으니, 아무리 황자와 황녀의 교육을 위한다고 하여도 그가 낼 수 있는 시간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황제가 보내온 이야기도 있고 하여 그 결과 상대적으로 시간이 널널한 데미안이 오르커스와 노엘의 훈련을 지도하게 된 것이었다.
온갖 기재들이 모여 있는 황성에서도 천재라 칭송받는 노엘이 데미안의 실력에 대해서 말해 주기는 했어도 말로 듣는 것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제 나이대의 또래와의 만남이 적었던 오르커스였기에 그가 다른 이들에 비해 어떠한 위치에 서 있는지 명확히 알지 못하였지만, 이전에 노엘과 크로멜의 소가주간의 대련을 보았던 이로서 방금 데미안이 보여준 것이 결코 둘에게 밀리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데미안의 실력에 대한 의심을 지웠다.
오르커스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활을 들고는 데미안이 만들어 낸 선의 뒷편에 섰다.
자리에 서 다시 한번 일직선으로 놓여진 과녁을 보니 그 거리가 이전보다 더 멀어진 것만 같이 느껴졌다. 비록 흐릿한 옛 기억 이지만 그래도 이전에 한번은 취해 보았던 자세를 잡으며 그는 화살을 한개 집어 시위에 걸어 올렸다.
자신이 맞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눈에 담은 후 자신과의 거리에 대해서 계산을 하기 시작한다.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과 풍속. 마법으로 만들어낸 탄환을 쏘아낼 때도 숱하게 연산하였던 것이었기에 그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꼭 들어가야 할 자신이 주어야 할 힘에 대해서는 정확한 값을 내기 어려웠다. 자주 몸을 움직이지 않았던 그 였기에 얼마만큼의 힘으로 시위를 당겨야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최대한 당길 수 있을 만큼 시위를 당기고는 자신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 멎자, 그는 곧바로 시위를 놓았다.
그래도 기본적인 근골이 좋았기 때문일까. 오르커스가 쏜 화살은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차게 공기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오."
중간에 땅으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앞을 향해 잘 날아가는 화살의 모습에 오르커스는 작게 탄성을 내었다. 반듯하게 잘 날아가는 화살에 그는 '혹시 첫발에 중앙을 맞추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결과적으로 화살은 그대로 과녁의 위를 지나 그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아..."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까운 것은 어쩔 수 없는지 오르커스의 입에서는 작게나마 아쉬움 섞인 소리가 새어나왔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데미안은 그에게 화살을 하나 건내며 물었다.
"혹시, 이전에 활을 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딱 한번. 역시 생각대로 잘 되진 않는군. 마법이었다면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만."
"자세는 약간의 교정이 필요하겠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나쁘지 않았습니다. 익숙치 않은 자세를 취해서 그런지 손의 떨림이 심하더군요. 이는 반복해서 연습한다면 해결될 문제이니 금세 과녁을 맞추실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런가?"
"그리고 활을 잡으실 때 너무 높게 올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전하의 생각보다 완력이 강하신 편입니다. 힘을 강하게 주실 것이라면 살짝 들어올리는 것 만으로도 충분 할 것입니다."
"충고 고맙네."
생각보다 괜찮은 평가에 오르커스의 입가에는 호선이 그어졌다. 오르커스는 데미안이 건낸 화살을 잡아 다시 시위에 걸고는 자세를 바로 하였다. 힘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당길 수 있는 최대로 주고 초점은 이전 보다 낮게 잡았다.
다시 한번 화살이 공기를 가른다.
팍!
거리가 있어 소리는 매우 작았지만 화살이 과녁에 박히는 소리가 오르커스의 귀에 들려왔다. 과녁의 중앙을 맞추지는 못하였지만 화살이 표적에 적중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잘하셨습니다."
"아까워. 조금만 더 밑으로 내렸다면 중앙이었을 텐데. 확실히 자네의 말대로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군."
"원래 처음은 그런 법입니다. 무엇이든 반복이 중요한 법이지요. 그래도 두번 만에 과녁을 맞추셨으니 전하께서 재능이 없으신 건 아닙니다."
"그대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만. 음, 노엘? 이번에 네가 해볼터냐?"
"네?"
"사격 말이야. 연습 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아니요. 할게요."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노엘은 오르커스의 말에 시선이 모이자,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허둥지둥 일어섰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오르커스가 과녁을 맞추었을 때 소리라도 질렀어야 정상이었다만 노엘이 이렇게 얌전히 있는 것은 분명 이상현상이었다.
하지만 오르커스는 노엘의 행동에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행동의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어서 그런것인지 그녀에게 활을 건낼 뿐 뭐라 말을 더 하지는 않았다.
노엘이 오르커스에게서 활을 받고 자리에 서기 전 그녀와 데미안의 눈이 마주쳤다.
다만 어제 대련을 할때와는 달리 그녀는 일부러 그에게서 거리를 두려는 듯 노엘은 서둘러 시선을 거두었다. 데미안은 그런 달라진 노엘의 행동에 의문이 들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구태여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 노엘에게 건내었고 노엘은 그것을 말 없이 받았다.
데미안에게 화살을 건내받은 그녀는 과녁을 한번 보고는 곧바로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앞서 오르커스가 하였던 것 처럼 준비의 시간은 필요치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단숨에 시위를 당긴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오르커스가 쏘았을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과녁을 향해 날아갔고 정확히 과녁의 중앙에 박혔다. 오르커스는 그것을 보자 작게 탄식하더니 웃으며 데미안에게 말했다.
"재능이란 저런 것을 재능이라 하지 않겠나? 그건 그렇고 어떤가? 노엘은?"
"완벽합니다. 자세에는 흔들림이 없고 감각 역시 날카로워 어떻게 쏴야 목표물에 맞는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황녀 전하께서는 이곳이 아니라 숲에 들어가 직접 사냥을 하며 경험을 쌓는게 좋겠군요."
"..."
데미안의 칭찬에 노엘은 이전처럼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지만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것이 누가보아도 그녀가 칭찬에 기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르커스는 그런 노엘의 모습에 작게 미소를 짓더니 다시 데미안에게 물었다.
"이렇게 우리 둘의 실력은 모두 보여준 것 같군. 우리를 가르쳐 줄 스승의 실력을 한번 볼까 하는데 괜찮겠는가?"
"원하신다면야."
오르커스의 말에 데미안은 노엘에게 활을 받고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그가 활을 들자 다시 데미안을 향한 노엘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방금전만 하여도 눈을 피하던 노엘이었는데, 순식간에 바뀌는 그녀의 행동에 오르커스는 그저 소리 죽여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르커스도 다시 데미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었다.
그 역시 노엘과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실력이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범상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것은 앞서 가지었던 실력에 대한 의심이 아닌 호기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데미안의 손은 매우 가볍게 움직였다.
힘을 어느정도로 주었는가는 보는 것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당기는 것 만으로도 상당한 힘이 드는 팽팽한 시위를 당기는 그의 손은 힘을 준것인지 모를 정도로 가볍고 빠르게 움직였으며 그가 활에 화살을 거는 것과 동시에 화살은 어느새 그의 손을 떠나 있었다.
콰직-!
오르커스와 노엘이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던 것은 그가 쏘아낸 화살이 노엘이 과녁에 적중시킨 화살을 둘로 쪼개며 과녁을 꿰뚫었다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하셔야 할 것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
노엘은 사격장을 벗어나 이실리아관을 향해 걸었다.
그녀의 곁에는 데미안도 오르커스도 없었다. 지금 그녀는 홀로 길을 걷고 있었다.
데미안에게서 과제로 화살 다발을 건내받은 오르커스와는 달리 그녀는 데미안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다.
"저는요?"
"전하께는 제가 무엇을 하라고 말씀 드릴 것이 없군요. 굳이 찾아 본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실전에 가까운 경험입니다. 다음날 부터는 대회 준비를 위해서라도 룬프라우드로 이동하게 될테니 오늘은 원하시는 것을 하시면 됩니다."
"그 뜻은?"
"자유입니다. 평소 처럼 검을 연마하시든지 아니면 오르커스 전하의 옆에서 같이 활을 연습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혹시, 활 필요 하십니까?"
생각지도 못하게 자유를 얻어버렸다.
평소였다면 그곳에서 좋다고 화살을 쏘아대며 연습을 하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가야할 곳이 있었다. 활을 가져다 주겠다는 데미안의 말에 고개를 저어 거절하고는 그대로 사격장을 나왔다.
아직 그녀가 영주성의 길을 모두 외운 것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화원이 옆에 놓여진 건물이라고 한다면 이곳에서 이실리아 관이 유일했기에 노엘이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개한 꽃들의 향기를 따라 걷기만 하여도 이실리아 관은 금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실리아 관에 가까워질 수록 세상에 수놓아진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는 꽃들의 모습은 절로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러한 꽃들을 재치고 그녀의 눈을 가득 채우는 것이 하나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별과도 같이 빛을 내는 새하얀 머리카락.
엘레나 에델바이스.
그녀는 화원에 놓여진 의자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형 같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엘레나의 외모는 같은 여성인 노엘 본인이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눈을 감고 조용히 햇빛을 받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노엘은 문득 메로힘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좀 처럼 입을 잘 열지 않는 소심한 소녀.
그리고 꽃을 매우 좋아하는 소녀.
그것이 노엘이 기억하고 있는 엘레나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진 엘레나였지만 꽃들 속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님을 노엘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엘레나가 이실리아 관에서 지낸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었기에,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이는 지금 사격장에서 오르커스를 지도하고 있는 그녀의 약혼자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노엘이 엘레나를 향해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이유였다.
노엘은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자신의 양볼을 꼬집었다. 처음 이곳에서 엘레나를 발견하였을 때 그녀는 단지 사르함이라는 타지에서 아는 얼굴을 찾았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잊어버린채 말이다.
크라우스와 에델바이스의 약혼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 오르커스에게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크라우스에 가게 된다는 사실에 취해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처음 엘레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자신을 보았음에도 눈인사만 해주고 그대로 지나쳐 데미안에게로 간 것에 심술이 나기도 하였지만 이후 자신이 한 행동을 떠올린다면 얼굴이 화끈거릴 뿐이다.
어째서 자신과 대화를 하면서 그것에 집중하지 못하였는지, 그야 약혼자가 눈앞에서 다른 여성의 손을 잡고 있는데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일을 벌인 원흉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이것 만큼이나 부끄러운 일이 따로 없었다.
혹시 어제의 그 일 때문에 엘레나가 자신을 좋지 않게 생각하게 되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노엘이었지만 어째선지 지금 엘레나를 변하게 만든 것은 데미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그것이 아니라 하여도 그 둘은 자신과는 달리 오랜 인연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둘의 사이를 건드렸다는 것은 노엘에게 있어 상당한 불안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단 하루 뿐이 만남이었다고는 하여도 엘레나. 그녀는 노엘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든 친구였다.
몇달 사이 엘레나는 그녀가 아는 모습에서 많은 것이 변하였다. 워낙 짧았던 만남이었기에 그녀의 변화와 함께 엘레나에게서 자신은 이미 스쳐지나간 인연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노엘은 그것이 걱정이 되었다. 거기에 더불어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그런 걱정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으으으으...."
결국 말을 걸지도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발을 동동 굴리고만 있는 노엘. 하지만 그런 그녀를 향해 누군가가 천천히 다가왔다.
"전하?"
"앗!"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엘레나의 얼굴에 노엘은 그만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엘레나는 그런 노엘의 손을 붙잡고는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겨 다시 일으켜 세웠다.
"왜 계속 보고만 있으셨던 거에요."
엘레나의 말에 노엘은 그녀가 자신의 시선을 한참 전 부터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말에 다시 한번 얼굴이 뜨거워질 것 같았지만 노엘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엘레나의 손을 떠올리곤 그녀의 손을 꽉 쥐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에, 엘레나!! 오랜만이에요!"
어째서 다른 말도 아닌 이런 인사말이 나간 것일까.
노엘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곧이어 자신의 눈에 비춰지는 엘레나의 환한 미소를 보자, 그간의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져갔다.
"오랜만이에요. 노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