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샛별 (15)
태양이 가장 높이 뜨는 시각. 낮 12시.
이 날의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푸르러, 지상을 향해 내려쬐는 햇살을 막을 것은 없어 보였다. 겨울에서 완전히 벗어나 청녹색으로 물들어 버린 숲 속도 예외는 아니었다. 빛은 우거진 잎새의 틈을 파고 들어 땅에 내려왔다.
틈새로 흘러나온 빛이 무언가에 닿자 그림자에 가려져 어둠이 내려앉아 있던 숲에는 여태 어둠에 숨어 있었던 금빛이 번쩍였다. 갑자기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빛을 본 것에 놀란 것인지 조용히 나무아래에서 풀을 뜯고 있던 사슴 한 마리가 숲 안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앗!!"
갑자기 자리를 벗어나는 사슴의 모습에 노엘은 탄성을 내뱉으며 사슴을 쫒기 시작했다. 자신의 머리에 반사된 햇빛에 놀라 도망친다는 것도 모른채.
"거기서!!"
사슴을 향해 소리치며 달리는 노엘.
마음만 먹는다면 단숨에 사슴의 앞에 설 수 있는 그녀였지만 숲에 들어오기전에 약속 때문인지 그녀는 신성도 오러도 사용하지 않은채 순수히 육체의 힘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슴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질 것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노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노엘은 지금 달리고 있는 그 순간이 즐거운지 그녀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갈 줄을 몰랐다.
몸을 움직일때마다 주변의 풀이 바스락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무들 사이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들의 지저귐이, 달리고 있는 자신의 몸에 부딪치는 바람의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어릴 적 황제가 성안에서 달리는 것을 금한 이후로 이렇게 제대로 달려 본 게 얼마만일까. 아무런 제약 없이 움직일 수 있다라는 자유로움에 노엘은 한껏 취해 바람을 갈랐다.
안 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마경(魔境)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곳곳에 나무가 기묘한 형태로 빽빽히 자라난 것이 움직임에 상당한 제약을 주었지만 인간을 넘어선 감각과 운동신경을 가진 그녀에게 있어서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못하였다.
타다다닥-
점점 빨라지는 사슴의 속도에 노엘도 힘을 끌어올려 추적에 박차를 가했다.
아무리 그녀가 오러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고는 하지만 평범한 사슴이었다면 지금 쯤이야 따라잡히는 것이 정상일텐데. 초입이라고는 하나 룬프라우드라는 마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슴답달까. 일반적인 사슴과는 그 능력이 궤를 달리 하였다.
줄어들 줄을 모르는 사슴과의 거리에 노엘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활을 바라보았다.
병장기를 다루는 것을 좋아하는 노엘이었지만 그녀가 그 중 가장 자신있어 하는 것은 활이 아닌 검이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노엘은 검을 들고 다녔지만 지금 그녀에게 있는 장비는 허릿춤에 매여있는 도축용 단검 한자루와 손에 들린 활, 그리고 등에 달린 통에 남은 화살 몇개가 끝이었다.
오러를 사용할 경우라면 몰라도 어느정도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상 이렇게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장검은 오히려 행동에 제한을 준다고 생각하여 놓고 온 것이었는데, 어째선지 지금과 같은 상황에 놓이고 보니 검이 없는 것이 허전하게만 느껴졌다.
노엘은 달리면서 활대를 들어올려 보았지만 격하게 흔들리는 활대를 보자 곧바로 손을 내렸다.
그녀가 천재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은 맞다만 그렇다고 하여도 평소에 다루어 보지 않던 무기를 달인과도 같이 능숙하게 다루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방금전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것도 활로 녀석을 잡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이었는데 달리는 중에 빠르게 움직이는 표적을 맞추라니, 아직 제자리에서 쏘는 것에도 상당히 많은 정신력을 소모하는 그녀에게는 난이도 높은 미션이 아닐 수가 없다.
삐익-!
여태껏 조용하던 숲속에서 갑자기 그녀의 귀를 찌르는 휫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노엘은 이 휫파람 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의 주변을 멤돌고 있는 레인저들이 더 이상 진입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 이상 안 쪽으로 진입하면 지금과는 달리 실제로 마수(魔獸)라고 불리우는 마물들이 나오는 곳에 들어가게 된다는 신호였으니.
"으으음..."
노엘은 휫파람 소리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원래 이곳에 들어오기전 약속했던 것에는 레인저의 지시에 반드시 따르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것 같은 사냥감을 놓치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너무 컸다.
오러를 사용한다면 한 발자국 만으로도 사슴을 따라 잡는데 충분하였지만 그렇다고 오러를 사용하기에는 노엘은 황녀였으며 또한 기사였기에 그것만은 그녀의 명예가 허락하지 않았다. 오러를 사용할 바에는 차라리 사슴을 놓치는 편이 좋다.
그렇게 노엘이 추적을 그만두려고 하려는 찰나, 그녀의 손 끝에 가죽에 매여진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다시 손을 가져가 대 가죽 주머니에서 꺼내니 짧은 단검 한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엘은 잠시 단검과 앞에서 달려가고 있는 사슴을 번갈아 보더니 곧장 자신과 사슴 사이의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았다.
어디를 노려야 할까.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리를 부러뜨려야 하나? 아니면 바로 머리를.
그래. 머리로 하도록 하자.
맞춰야 할 곳이 정해지자 행동은 빨랐다. 다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그녀의 손에서 섬전과도 같이 단검이 쏘아졌다.
이것은 한줌의 오러도 사용하지 않은 순수히 그녀의 육체에서 나오는 폭발력으로 만들어낸 기예였다. 벌어진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던 탓인가, 노엘이 던진 단검은 그녀의 손을 떠남과 동시에 정확히 사슴의 뒷통수를 꿰뚫었다.
그렇게 머리가 뚫린 사슴은 단말마 한번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와아아아아!!"
사슴이 쓰러진 곳으로 달려간 노엘은 사슴이 숨을 거둔 것을 확인하자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녀는 정확히 나무 한 곳을 가리키더니 그곳을 향해 소리내어 말했다.
"이것 보세요! 제가 잡았어요!!"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것 같은 나무의 위에서 한 인영이 나타나더니 이내 아무말 없이 박수를 쳤다. 곧이어 이곳저곳에서 그와 같은 차림을 한 이들이 나타나더니 노엘이 잡은 사슴을 들어 올렸다.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인저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 중 대장격으로 보이는 이가 한명 노엘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였다.
"매우 깔끔한 단검술이었습니다. 다만 다음번 부터는 부디 첫번째 신호에서 돌아와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전하. 아무리 저희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곳에서는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앗, 죄송해요...저, 그..."
"도련님과 아가씨께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의 말에 노엘은 다시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노엘은 이곳에서 사냥하는 동안 오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중요히 여겼지만 다른 이들에게 우선 순위는 그녀가 너무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곳에 온 첫날 레인저들의 경고도 잊어버린채 안쪽으로 진입 했을 때 엘레나와 데미안에게서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는가. 그러한 경험을 다시 겪는 것은 싫었기에 노엘은 그들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레인저의 말에 웃으며 현재 거점으로 사용하고 있는 캠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께서는?"
"황자 전하께서는 아직 활에 익숙해지지 않으신지 데미안 공자님과 함께 훈련을 하고 계십니다."
그의 대답에 노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을 하면서도 어느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답이었다.
오르커스의 몸에 부족함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까지는 병장기와 접점이 없던 그였으니 훈련이 오래 걸릴 것이라는 것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는 노엘 본인도 사슴을 활로 쏘아 잡은 것은 아니었다만. 어디까지나 이번에 참가하는 것은 궁술이 아닌 사냥 대회였으니 노엘은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회색천으로 지어진 천막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 주변에 크라우스의 문양을 새긴 이들이 곳곳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곧바로 그녀의 눈에 잡힌 이는 다름 아닌 자신과 같은 머리색을 가진 쌍둥이 남매. 오르커스였다.
"오라버니!!"
"노엘? 자, 잠시만! 쉿!!"
이유는 모르겠지만 입구 족 천막 뒷편에 서 있던 오르커스. 그는 노엘의 외침에 곧바로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보내었다. 조금 의아한 점이 있었지만 노엘은 오르커스의 말대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오르커스는 노엘이 다가오자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다시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노엘을 맞이 하였다. 노엘은 그런 오르커스의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니. 아무 일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일찍 돌아온 것을 보니 오늘 사냥은 성공한 모양이구나."
"네! 이것 좀 보세요!!"
다시 올라가는 노엘의 목소리에 오르커스는 다시 입가에 손을 올리며 목소리를 죽이라는 사인을 보내었다. 그것에 노엘이 의문을 넘어 불만어린 눈빛을 보내었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며 노엘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허..."
그곳에는 레인저가 내려 놓은 머리 뚫린 사슴이 땅에 쓰러져 있었다.
땅에 놓여진 사슴의 모습에 오르커스는 할말을 잃은 것인지 멍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단검이라고는 하지만 초인(超人)이라 할 수 있는 노엘의 공격에 당했으니 사슴의 머리가 멀쩡할리 없었다.
"저것...정말로 노엘 네가 그런거야?"
"응!"
솔직히 말해서 정확히 머리가 두쪽으로 쪼개진 사슴의 사체는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신에게 이를 소개하는 노엘의 모습에 오르커스는 이전에는 그녀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역시 그때 검을 배우게 두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을 확고히 하며 말이다.
"음, 그런데 오라버니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으셨던 건가요?"
"그, 그건..."
노엘의 질문에 말을 흐리는 오르커스. 무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노엘이었지만 그에 대한 답은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절로 그녀의 곁에 다가왔다.
"여기 계셨군요."
"흡!"
익숙한 한 목소리가 노엘과 오르커스의 귀에 동시에 들려왔다. 노엘은 그 목소리를 듣자 눈을 반짝였고 오르커스는 그와 반대로 눈에 빛을 잃었다. 오르커스가 조용히 고개를 위로 들어올리자 그의 푸른 눈에는 금빛을 담은 용의 눈이 비쳐졌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디 가셨나 했더니 이곳에 숨어 계셨던 겁니까."
"숨다니. 보다 싶이 나는 동생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네."
"대화는 연습장에서 해도 괜찮습니다."
데미안. 그와 오르커스의 대화를 듣자 노엘은 일이 어찌 흘러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전과는 다른 느낌의 노엘의 미소를 본 오르커스는 한숨을 쉬며 붉게 변한 자신의 손가락을 데미안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것 좀 보게나. 손이 완전히 붉게 달아올랐어. 이제는 시위를 당길 때마다 손가락이 따가워 더는 못 당긴단 말일세. 그러니 오늘은 그만 쉬도록 하자고....악! 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오르커스의 말에 데미안은 그가 내민 손가락을 쿡하고 눌렀다. 거기에 오르커스가 곧바로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덤덤히 답했다.
"아직 괜찮습니다. 손에 점점 굳은살이 생기기 시작했고 조금만 더 연습하신다면 더는 시위를 당기 실때 아프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놈의 조금만은!!! 자네, 아까 전에도 똑같은 말 한거 알고 있나?! 그 이후로 벌써 100번은 넘게 화살을 쏘았다고!"
"그렇지만 대부분 과녁 외측이었지요. 실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전하께서도 앞서 제게 실력이 나아질 때까지 혹독하게 다루어 달라고 부탁하셨지 않습니까."
"실력이라면 자네가 나아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초심자는 과녁에 맞춘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며! 점점 중앙을 향해 다가가는게 보이는데!! 이제 그만 쉴때가 되었네."
"그러니 지금 더욱 열심히 하셔야지요. 대회에서는 지금 처럼 가만히 서서 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감각을 잡는게 좋습니다."
"으아아아아!!!"
결국 오르커스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언제나 황성에서는 조용하고 기품있던 오르커스가 이리 행동하는 것은 참으로 색다른 일이었기에 노엘은 눈을 반짝이며 광분하는 자신의 쌍둥이 남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럼 이제 다시 연습장으로 가도록 하시죠. 내일은 황녀 전하처럼 숲에서 사냥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됐네!! 됐어!! 그냥 노엘만 대회에 나가라고 하게나! 애초에 나는 마법사 아닌가? 어째서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면 안되는 것이지?! 이건 분명 문제가 있어!"
마법을 사용한다면 그에게 있어 화살을 과녁의 정중앙에 박히게 만드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물론 이것은 마법이 아닌 무예를 겨루는 대회였기에 안되는 것이 당연하다만. 오르커스의 말에 데미안은 이렇게 답하였다.
"저희 엘레나도 마법사입니다만. 전하도 아시다 싶이 그녀는 마법 없이 잘만 쏘지 않습니까. 그러니 얌전히 훈련하러 가시도록 하시죠. 전하께서 말씀 하신대로 못난 모습은 안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데미안의 말에 오르커스는 더 이상 말하기를 그만두었다.
그가 엘레나의 이야기를 하자 오르커스의 눈에는 다시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영주성에서 처음으로 활을 쥐었을 때, 엘레나와 가볍게 한 대결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했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둘다 여태 병장기를 잡아 본적이 없는 이였기에 이는 순수히 재능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오르커스, 그의 자존심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게 더는 저항하지 않는 오르커스였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듯 데미안은 그의 오른편에 서서 오르커스의 오른쪽 팔뚝을 붙잡았다. 이어서 데미안과 노엘의 눈이 마주쳤다. 노엘은 곧장 오르커스의 왼편에 서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그의 팔뚝을 잡았다.
"헤헤헤..."
오르커스의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노엘. 갑작스런 그녀의 반응에 둘의 시선은 절로 노엘을 향하였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며 둘의 시선을 흘려 넘겼다.
연습장으로 향하는 길. 노엘은 천천히 발을 내딛으며 다시금 크라우스의 영주성에 왔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