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샛별 (12)
조용한 성의 복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인지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 도착한 날 부터 성의 분위기가 매우 조용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정적의 원인이 오르커스와 노엘의 방문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성이 조용하다고는 하여도 사용인들과 복도에서 마주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내가 그와 손을 잡고 그의 방으로 향하는 모습이 그들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비쳐졌을 지는 몰라도 지금 이 정적을 만들어 낸 것에는 그들에게 보여준 나의 행동이 아주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겨울성에서도 해 보았으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로맨틱한 일을 하기 위함은 아니었지만, 다른 이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에 나는 그가 들어간 방문을 등지고 편히 기댈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달려서 이곳에 도착했기 때문인걸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딱히 숨이 차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무리를 했다면 당연히 느껴져야 할 통증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찾아오지 않았고 되려 다리에서 시작된 탈력감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마치 영혼을 빼내는 것만 같이 나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그렇게 몇번의 심호흡을 반복하자 파도 위에 놓인 모래성과 같이 무너질 것만 같던 몸에는 미약하게나마 힘이 돌아 오고 있었다. 머리는 지금 상태에 대한 원인을 찾고 있었고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인지 그 답에 가까워지면 가까워 질 수록 나의 회복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져만 갔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방금전의 탈력감도,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충만감도 모두 만족스럽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자 성의 창문에는 내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유리창 속에 들어있는 순백의 소녀는 작게 눈웃음을 지으며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렇게 창에 비친 내 얼굴과 마주하자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문득 이곳에 오기 전 그가 내게 하였던 말이 생각났다.
혹시 질투했냐고.
"그야 당연하죠..."
이전에 내가 리처드와 마주한 그를 앞에 두고 했던 말과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오히려 그것을 노리고 일부러 내게 그리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나는 그때의 그와 달리 솔직하게 나의 마음을 말하였다.
사실 그의 질문에는 반드시 진실된 답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내게 그러한 질문을 던진 것 만으로도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으니까.
다만 여기서 한가지 오류가 있다면 그때 내가 느끼었던 감정은 단순히 질투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엄연히 따지자면 내가 그에게 말한 것도 그가 알아차린 것 모두 반쪽짜리 답인 것이다.
분명 노엘과 만나기 전만 하여도 나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정리하였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다시 과거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채 그렇지 않다고, 그저 호기심일 뿐이라고 되내어 왔지만 내심 이 대련으로 인해 과거가 반복되어 버리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절정에 달한 것은 노엘이 그의 손을 잡았을 때의 일이었다.
이전 까지만 하여도 그에 대한 걱정에 가려졌던 불안감이 단숨에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엘에게 있어 그의 손을 잡은 그 행동은 단순히 치료 그 이상 그 이하의 것도 아니었지만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음에도 내 마음은 이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질투.
이 또한 맞는 말일 테지만 나는 거기에 더해 절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감정을 느끼었다.
'어째서 네 마음을 전하지 않는거야? 다 알고 있으면서.'
그의 손을 잡으며 내게 말을 건내는 현재의 그녀가 꼭 내게 그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전의 노엘이 자신에게 하였던, 그 어떤 말보다 날카로운 비수 같아던 그 말이 메아리치듯 머릿속을 울린다.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확실히 전하였다.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머리를 울리는 이명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여태 회귀 이후 내가 겪었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 해지는 것만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 한번 잡은 것에 참으로 과하게 생각했다고 말 할 수 있다만, 이성이라는 것이 마비된 내게 있어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할리 없었다.
이 마음을 그에게 곧이 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회귀를 겪지 않은 이전의 삶의 기억이 없는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그가 나의 손을 잡아줌으로서 더는 의미가 사라진 것이었기에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낼 필요도 없다.
그의 손길이 느껴지자 그제야 머릿속을 채운 이명이 사라져간다.
이제야 조금이나마 과거에서 벗어난 것 같다.
회귀 이후 거의 모든 것이 뒤바뀌다 싶이 했는데 내게 가장 큰 안식을 준 것이 그가 노엘의 앞에서 내 손을 잡아 준 것이라니. 조금 씁쓸하면서도 내가 이렇게나 속이 좁은 사람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뭐, 속이 좀 좁으면 어때. 이렇게나 기분이 좋은걸.
나는 그렇게 소리 없이 웃다가 문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발을 움직였다. 천천히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구두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몸을 돌려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소리가 멎자 문이 열리며 단정히 옷을 차려 입은 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살짝 구겨진 내 드레스 자락을 보더니 걱정스런 얼굴로 내게 물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그럴리가요."
나는 웃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
***
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나는 잠시 엘레나와 같이 앉아 시간을 보내었다.
노엘에게 다시 인사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지만 영주성의 크기가 작은 것도 아니고 일일히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아다니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황족이라고는 하지만 크라우스의 소가주인 내가 그렇게 졸졸 따라다닐 필요는 없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은종을 쳐 시종을 부르고는 그에게 다과와 마실 것을 내오라 하였다.
이렇게 해두면 대강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버지에게 위치가 알려질 테니 나와 엘레나는 방에서 아버지께서 부를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될 일이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만은....사실은 이쪽이 본심이 맞다. 그야 그럴것이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황족이라는 폭탄을 만나버렸으니, 심력의 소모가 말이 아니었다.
노엘이야 엘레나에게 있어 선연이라 한다 하여도 오르커스, 그 남자는 나 한테 따지자면 악연이 될 수도 있는 인연이다. 그가 엘레나에게 반하게 되는 계기가 한참 뒤에 일어나는 어떠한 사건 때문이기는 하다만 어찌되었거나 그 역시 세명의 남주 후보 중 한명이었으니 말이다.
오르커스가 약혼자가 있는 사람을 건드릴 쓰레기는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다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다.
다만 그러한 것들을 제치고 생각한다 하여도 황가의 방문은 조금 생각이 필요한 문제이기는 하다.
설마 노엘, 그 아이가 아무리 순수하다고는 하여도 '크라우스 백작가의 기사들은 매우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더군요! 그렇기에 대련을 신청하러 왔습니다!!'라는 이유로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들이 움직인데에는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 이다.
그에 관해서는 가주이신 아버지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테니 딱히 걱정은 되지 않는다만, 무언가 불안한 기분이 들어 그 이유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기로 하였다.
만일 진정 심각한 문제였다면 귀뜸이라도 해주셨을 테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내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알고 있는 것이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시간이라도 때울겸 한번 이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도련님. 다과와 차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오게."
때마침 입가심 할것도 준비되었으니 잘 되었다.
시종은 탁자 위에 티 세트와 다과들을 정렬하고는 고개를 한번 숙이고 아무말 없이 방을 떠났다. 혹시 아버지께서 무슨 말이라도 남기셨을지 궁금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엘레나와 나 사이에 놓여진 찻잔들에 차를 따르고는 시종이 가져온 커버를 열었다.
그곳에는 한동안 보지 못한였던 주방장이 만든 것으로 생각되는 익숙한 다과들이 모습을 내비췄다. 엘레나는 내가 커버를 열자 마자 그대로 마카롱 하나를 집어 한입 베어물었다.
"냠~"
속이 크림으로 꽉찬 마카롱을 베어물은 탓인지 입가 옆으로 크림이 묻은 엘레나.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손에 들린 마카롱을 마저 입에 넣기 시작했다.
이 또한 사르함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겨울성의 주방에서 만드는 마카롱은 그녀의 입맛이 아닌건지 이것 처럼 즐겨 먹지는 않았으니까.
일주일인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 모습도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나는 턱을 괴고 그녀가 마카롱들을 하나씩 잡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속수무책으로 엘레나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마카롱들. 물론 마카롱은 손발이 없기 때문에 얌전히 먹힐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순식간에 접시 위에서 사라지는 마카롱. 이제 이곳의 마카롱의 흔적이라고는 엘레나의 입가에 조금 묻어 있는 크림이 전부였다.
그렇게 멍하니 엘레나가 먹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보니 어느새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챈 것은 접시 위에서 마카롱들이 모두 사라져 그녀의 손이 움직이지 않을 때였다.
엘레나는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투명한 유리 속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훤히 보여 괜시리 미소가 지어졌다.
눈빛이 참 노골적이신데.
이전에 마카롱 먹여줬다고 얼굴 빨개지던 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하지만 나는 순순히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접시 위에 놓여있는 다과들 중 나는 한뼘 정도 크기의 막대과자를 쥐었다.
막대과자를 들어 그녀의 입 앞에 두자 엘레나는 잠시 나를 흘겨 보고는 고민을 하는 것 같더니 이내 막대과자를 갉아 먹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일부러 무표정을 고수하지는 않았다. 방금전 마카롱을 먹은 것 처럼 자연스런 미소와 함께 막대과자를 입에 넣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어느덧 한뼘 크기의 막대과자는 작은 몽당연필 만큼이나 작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이 만큼이나 그것을 쥐고 있는 내 손가락과 그녀의 입술 사이의 거리도 가까워졌다.
엘레나도 지금 상황이 이전에 어떤 상황과 겹쳐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이전과 같은 부끄럼이 없었다. 이전처럼 소심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한번 입을 움직일때마다 대담하게 이동을 한다.
나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도득
막대과자가 씹히며 그녀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한번만 더 움직이면 엘레나의 입술과 내 손가락이 맞닿게 된다. 이에 엘레나는 지체없이 막대과자를 물었다. 다만 내 손이 엘레나의 입보다 조금 더 빨랐다.
나는 엘레나의 입술과 닿기 직전에 막대과자를 부러뜨렸다.
내 행동이 의외였는지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하지만 내 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는 아주 조금 남은 막대과자를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거기서 살짝 남아있는 크림을 떠 내 입에 넣었다.
"어?"
그제야 엘레나의 표정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역시 그녀는 저렇게 붉게 물든 얼굴이 더 잘 어울린다.
"달달하네요."
나는 막대과자를 씹으며 조용히 맛의 감상을 읊었다.
마카롱의 크림이 너무 달기는 한데 막대과자의 텁텁함이 그것을 오묘하게 중화시켜준다. 그래도 달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막대과자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나는 그 텁텁함을 넘기기 위해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제 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달달하네요."
"풉!"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만 차를 들이키다 입 밖으로 내치고 말았다. 다행인 점이라고 한다면 내가 차를 입에 넣으려고 했던 그 순간이었다는 것일까. 하마터면 차를 죄다 바깥으로 쏟아버릴 뻔 하였다.
나는 젖어버린 입가를 손수건으로 한번 닦아내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의 주인은 나의 오래된 가족이자 집사. 켄이었다.
대체 언제 들어온거지?
내가 그에 대한 질문을 하려고 하자, 그는 다시한번 우리를 바라보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달달하네요."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