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샛별 (11)
수정보다 맑디 맑은 자색빛의 눈동자에 나의 얼굴이 비춰졌다. 엘레나의 눈에 비친 나 또한 그녀를 눈에 담고 있었다.
그렇게 엘레나와 눈을 마주하자 이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던 감정이 전해져 왔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에게서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라 하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
처음에는 내가 노엘과 같이 서 있는 것에 엘레나가 질투하고 있다는 그런 형편 좋은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절대로 그러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곧바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얼어붙은 호수를 마주하는 것이 이러한 느낌일까. 나는 그녀의 시선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그녀의 감정에 나는 당황해하면서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떠올리기 위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미 내 발은 그녀의 코 앞에 멈춰 서 있었고 가까워진 거리 만큼이나 내가 이유를 떠올릴 시간은 촉박하기만 하였다.
"데미안."
엘레나는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내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닫혀있던 시야가 다시금 켜지기 시작했다.
내 앞에는 황녀인 노엘이 서있었지만 엘레나의 눈에는 그녀가 보이지 않은 모양인지 노엘을 그대로 지나쳐 나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의 주위에는 봄의 향기가 실린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메로힘에서 지독하게 겪었던 삭풍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 손을 잡은 엘레나의 손은 예상과 달리 그리 차갑지도,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에 내가 잡았을 때와 같던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이었다. 감정이 격해지면 그 감정을 마력을 통해 분출해내던 엘레나였지만 지금은 어딘가 이상이 생긴것은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로 그녀의 주위는 조용했다.
다시 엘레나의 눈을 들여다 보았지만 그녀가 품고 있는 감정은 여전하였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얼음장 같던 그녀의 눈에는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서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였더니 엘레나의 눈길을 쫓자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잘려나간 소매자락 사이에서 아주 작게 그어진 혈선이 보였다.
큰 상처는 아니었다. 그저 겉 피부가 살짝 긁히는 정도로, 혈선이라고 해봤자 피가 몇방울 새어나온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대련을 하면 일상다반사나 마찬가지인데, 이게 과연 그녀의 화를 살 정도의 일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잠시 내 옷 상태가 어떤지 한번 둘러보았다.
잘려나간 부분은 소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웬 경과 엎치락 뒤치락 흙먼지가 휘날리도록 뒤엉켜 겨루었던 만큼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지금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차라리 엉덩방아 찌어 흙이 묻은 편이 더 나아보일 정도로 겉옷 부분은 대부분 칼질이 나 멀쩡한 곳이 거의 없었으며 온 몸 곳곳에 잔상처가 가득하였다.
'이러면 할 말이 없네....'
상처라는 것 대부분이 피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얇게 베인것이 대부분이다만, 겉으로 보기에는 어디 전쟁터에서 구르다 왔나 싶을 정도로 망신창이가 되어 있었기에 지금 엘레나에게 뭐라 말하는 것은 변명 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엘레나였다. 엘레나는 작고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내게 말하였다.
"데미안. 제가 오늘 아침에 무어라 말했었죠?"
"오늘 대련은 이제 그만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엘레나의 차가운 눈빛에 내 마음이 얼어붙는 것 같이 시려왔다.
분명 내가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에게 이런 눈빛을 받은 적은 처음이어서 그런가. 굉장히, 굉장히 견디기가 힘들었다.
만약 선의가 아닌 다른 감정이 담긴 눈으로 이와 같은 시선을 마주했다면 어땠을까. 내가 원작의 데미안과 같은 녀석이었다면 그런 시선을 받았겠지. 그저 상상이라고는 해도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엘레나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은채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굽히었다. 알폰스에게 검을 가르쳐 준다고 해놓고 대련을 하였으니 이것은 명백히 그녀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었다. 그 상대가 황녀, 노엘이라고 하여도 나는 그녀의 신청을 충분히 거절 할 수 있었으니까, 결국 뭐라 말을 꺼내어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하였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엘레나는 나의 사과에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거기에 쓰게 웃으며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앞으로 3일간 대련은 자제하도록 할게요."
그제야 엘레나는 얼음을 녹이며 이전과 같은 따스한 눈으로 나를 비추며 내게 미소 지어주었다.
"이번에는 지키셔야 해요?"
"노력..아니, 알겠어요. 약속 할게요."
조금이나마 여지를 남겨두려 하다가 다시 급변하는 그녀의 분위기에 나는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눈 앞에서 쓰러진게 그렇게 큰 충격이 되었던걸까. 하기야 나도 내 눈 앞에서 엘레나가 마법을 연구한다고 퀭한 얼굴로 찾아와서 쓰러진다면 며칠간 책 근처에 다가가지 못하게 했을 것 같다.
엘레나는 잠시 내 몸을 한번 훑더니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이게 뭐에요...옷은 완전히 넝마가 되어버렸고. 적어도 옷은 갈아입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완전히 못 쓰게 되어버렸네...."
"음, 그건 미처 생각을 못했군요."
"상처도...평소보다 더 많이 생겼네요..?"
"...잘못했어요."
어째 평상시의 분위기로 돌아간 엘레나가 더 나를 잘 갈구는 것 같은데.
하지만 죄다 맞는 말이라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내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던 그녀는 핏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그곳을 손수건으로 한번 지우더니 포션을 가져오겠다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엘레나가 자리를 떠나려 손을 놓은 그 순간, 누군가 내 손을 낚아채듯 잡아 올렸다.
갑작스런 접촉에 나는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고개를 돌리었지만 손의 주인은 다름아닌 방금전 나와 대련을 하였던 노엘이었다. 주변에서 아무 말도 없길래 알폰스의 곁에 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갑자기 나의 손을 잡은 노엘의 행동은 엘레나의 발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하였다.
이에 엘레나는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노엘이 붙잡은 손을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런 엘레나의 시선을 느낄 수 없었다. 노엘이 잡은 손을 통해 내 체내로 들어오는 이상한 황금빛 기운에 시선이 쏠렸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체내로 들어오는 낯선 기운에 전신이 민감하게 반응하였지만 이내 그것이 가져다 주는 충만감에 다시 잠잠해지기 시작하였다.
마치 몸 깊숙한 곳에 연료를 태우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뜨거운 기운이 전신의 세맥을 파고 돌더니 심장으로 들어가 끝에는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활력을 키워주었다. 이 기운은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영향을 끼쳤다. 빛이 지나간 자리마다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나는 이것이 노엘이 가진 신성이라는 힘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쩐지 힘은 넘치는데 몸이 나른해지더라니, 근본이 태양의 신성이어서 그런가. 왠지 모르게 잠이 몰려올것 만 같은 느낌이다.
몸을 감싸고 있던 빛이 사라지자 내 몸은 그웬 경과 대련하기 이전의 깨끗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미약하게나마 몸에 남아있던 근육통과 같은 자잘한 것들도 회복된 듯 하다.
나와 엘레나가 모두 노엘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뾰로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노엘은 기다렸다는 듯 밝게 웃으며 말했다.
"헤헤..드디어 다들 여기를 바라보시네요. 상처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모두 치료했답니다!!"
노엘은 엘레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해맑은 미소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내었다. 엘레나는 그런 노엘의 인사를 웃으며 받아주고는 다시 그녀가 잡고 있는 나의 손으로 시선을 돌리었다.
"그러고 보니 엘레나 공녀. 정말 오랜만이에요!! 분위기가 많이 바뀌신게 보기가 매우 좋네요!"
"그, 그런가요. 칭찬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저, 근데..."
노엘이 계속해서 말을 걸었기에 엘레나는 노엘에게 자꾸 눈을 맞추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잡고 있는 손이 신경이 쓰이는지 엘레나의 눈은 어지러히 움직였다. 나는 그런 엘레나의 모습에 조용히 소리 죽여 웃었다.
지난번 연회에서 내가 리처드를 경계한 것에 그녀가 질투라고 말했던가. 맞는 말이다. 나는 그녀와 대화를 하고 있는 리처드에게 질투를 하였다. 다만 이런 감정이 다행이게도 나만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엘레나의 모습은 색다르면서도 귀엽게만 느껴졌다. 동시에 그녀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묘한 안도감이 들기도 하였다. 다만 내가 그러했듯 그녀 또한 나와 같은 고민을 할 것을 생각하니, 아무리 귀엽다 하더라도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못할 짓이었다.
아무래도 노엘이 나와 엘레나의 분위기가 이상한듯 해서 한번 환기를 시켜줄려고 한것 같은데,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주변의 날씨가 봄이 아니라 겨울이 되게 생겼다.
"고마워요."
"네?"
나는 몸을 움직여 노엘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그녀가 잡고 있는 손을 살며시 빼내어 엘레나의 손을 잡았다. 슬슬 손에서 한기가 올라오는 것이 어지간히 신경이 많이 쓰였나 보다.
내 손이 엘레나의 손과 맞닿자 반사적인 행동인지 엘레나는 힘을 주어 내손을 움켜쥐었다.
자연스래 그녀의 곁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다시 노엘에게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주변에도 들릴 수 있도록 목소리를 키워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를 건내었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가히 태양의 은혜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아? 아, 네. 그렇군요. 그렇게 칭찬해주시다니 고맙군요! 데미안 공자!!"
나의 인사에 노엘은 잠시 얼을 타더니 다시 평소의 텐션으로 돌아와 맞받아쳤다. 나는 약간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알폰스에게 눈빛을 보내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건지 알폰스는 아무말 없이 이곳으로 다가와 노엘의 옆에 섰다.
약속도 못 지킨 못난 형인데, 이렇게 계속 부탁이나 하고. 미안하다. 알폰스.
"제가 직접 성의 안내를 해드리고 싶지만 지금 꼴이 이 모양인지라. 대신이지만 알폰스가 마저 안내를 도와드릴 겁니다. 잠시 환복을 한 후에 다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넝마가 된 겉옷을 벗어 팔에 걸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안에 입고 있던 셔츠에는 비교적 검흔이 적어 겉옷을 걸친 것 보다는 그 모습이 나았다. 그렇다고 보기에 좋다는 것은 아니다만. 어디까지나 비교적 낫다는 소리이다.
"엘레나."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기대듯 붙었다. 내가 발을 움직이자 엘레나는 거기에 맞추어 걸었다. 어디로 간다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목적지가 내 방이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연무장을 벗어나 본성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자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전의 연회장 그녀가 내게 보내었던 눈빛이 어떠했더라. 나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최대한 기억 속의 엘레나와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질투하셨습니까?"
아무렇지 않은 것 처럼 말하였지만 나는 내심 그녀가 어떤 반응을 내비칠지 기대가 되었다. 아까와 같이 다시 한번 화를 내어도 좋았고, 이전처럼 저 새하얀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 또한 좋았다. 그냥 어떤 반응이 나오든 기분이 좋을 것 같다. 그것의 원인이 나를 향한 마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마냥 기분이 좋을 따름이다.
엘레나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의 말에 크게 한번 미소를 그리더니 아주 짧고 담백하게 답하였다.
"네."
이건 생각 못했는데.
어쩐지 후련해 보이기도 한 그녀의 미소에 나 또한 마주 웃었다.
그것도 잠시, 나와 발을 맞춰 걷고 있던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속도를 올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속도에 내가 끌려가는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다. 엘레나가 내 앞에 선 탓에 더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나는 굳이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속도를 맞추지 않았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엘레나는 앞을 향해 걷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뒤에 있었다. 우리의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손은 길게 늘어진 게 마치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지만 나는 그렇지 않기 위해 어느 정도 속도를 맞추어 걸었다. 엘레나 역시 마냥 독주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따라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느새 우리는 성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실제로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풍경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같이 매우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그 초속의 흐름 속에서 여전히 나와 엘레나는 손을 잡고 있었다.
***
알폰스와 노엘은 데미안과 엘레나가 자리를 떠나고 난 후 기사들의 대련을 조금 지켜보다가 본성으로 향하였다. 노엘을 처음 연무장으로 안내한것 역시 알폰스였기에 노엘은 이 어린 소년의 안내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일까.
처음 이곳에 와서 알폰스에게 안내를 받았을 때는 느끼지 못한 아쉬움이 들었다.
본성에 도착하자 성의 입구에서는 노엘과 같이 영주성에 온 오르커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르커스는 노엘을 맡아주고 있던 알폰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는 알폰스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었다. 알폰스가 성에 들어가자 오르커스는 불안한 눈빛으로 노엘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 또 사고쳤니?"
보자마자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인사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장소가 장소인 만큼 오르커스가 노엘의 행동에 대해 예민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착하자 마자 포탄처럼 마차 문을 박차고 뛰쳐 나갔으니 이런 말이 나올 수 밖에.
하지만 이번에는 오르커스가 말한 사고라고 할 만한 일이 없었기에 노엘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답하려 하였지만 이어진 오르커스의 말에 합죽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아까 데미안 공자와 마주쳤다. 옷이 완전 넝마가 되었있더구나. 설마..."
"아, 아니에요! 그건..."
부정을 하다 말고 잠시 말을 멈춘 노엘.
분명 그것은 데미안이 그웬 경과 대련을 하면서 생긴 일이었지만 따지고 본다면 그가 대련을 하게 된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다 보니 오르커스의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결국 노엘은 끝을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아하하하..?"
"너어...아니다."
뭐라 말을 꺼내려다 그만둔 오르커스.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측은한 표정으로 노엘을 바라보더니 그녀를 데리고 성의 안으로 들어갔다. 오르커스가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나 노엘과 함께 성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의 일이었다.
둘은 아서가 마련해둔 손님방으로 이동하는 동안 그들이 이곳에 있으며 느끼었던 것들에 대해 대화하기 시작하였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설령 지나가는 사용인들이 들었다 한들 상관 없을 정도로 간단한 이야기 였기에.
노엘의 입에서 데미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오르커스는 특히 그것에 대해 집중하는 것 같았다. 데미안의 옷차림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알게되는 것도 이때였다. 오르커스는 데미안의 옷을 그렇게 만든 것이 노엘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다가도 그녀가 일격에 검을 부려뜨려 먹었다는 사실에 놀라워 하였다.
"허어. 소가주의 무위가 그렇게나 뛰어나단 말이야? 그렇다면 그가 현재 삼대 무가의 자제들 중 가장 뛰어나다는 이야긴가?"
"으음, 글쎄요?"
노엘은 오르커스의 말에 따로 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 었으니까. 크로멜 공작가의 소가주와도 검을 부딪친 적이 있었지만 그가 자신의 신분 탓에 대련에 제대로 임하고 있지 않음은 알고 있었다.
때문에 라인하르트, 그와 데미안 둘 중 누군가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현재의 그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둘의 승패가 어떻든 노엘, 자신이 데미안보다 밑이라는 사실은 확고했으니,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고마워요.'
노엘은 문득 데미안이 건내었던 감사 인사가 떠올랐다.
자신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이야기를 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그는 그렇게 인사를 건내고 다시 또 고맙다고 말했던 것일까. 그 이유를 모르겠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그가 자신의 손을 벗어나 엘레나의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었다.
오르커스가 그 생각을 읽은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오르커스는 엘레나의 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렇다면 엘레나 공녀도 만나봤겠구나. 그, 뭔가 많이 바뀐것 같지 않니? 약혼을 하면 사람이 바뀌는 건가..."
상념에 잠겨있었기 때문인지 노엘은 오르커스의 말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옆에서 느껴지는 오르커스의 시선에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무언가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에게 물었다.
"네? 뭐가요?"
"엘레나 공녀 말이야.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몇달 사이에 사람이 저렇게 바뀔 수가 있나?"
데미안에 대한 화제가 나오니 절로 엘레나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노엘은 오르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확실히 오늘 자신이 본 엘레나는 이전에 그녀가 만나보았던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작은 소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노엘은 오히려 지금의 엘레나가 더 보기 좋았다.
한번 뿐이었던 짧은 만남이었지만 처음으로 만난 또래 아이여서 그런가, 속으로는 그녀를 친구라 여기었던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전과는 분위기를 비롯하여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노엘은 그런 엘레나의 모습을 보고는 멋지다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하였다.
다만 그런 훈훈한 사고는 다른 방향을 향해 이어지게 되었다.
"어? 그런데 엘레나는 분명 에델바이스 가문의 사람 아니었나요? 여기는 사르함인데? 그녀는 왜 여기에 있던 걸까요?"
데미안과 대화하는 것을 보아 꽤 오랫동안 둘이 교류하고 있던 것으로 보였다. 아마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닐까 싶다며 노엘은 멋대로 둘의 관계를 단정 짓고는 자신 또한 둘과 같은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중얼거리었다. 그 작은 혼잣말을 들은 오르커스는 노엘의 말에 눈살을 찌뿌리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우리가 왜 이곳에 온지 잊은 모양이구나?"
"분명 크라우스의 약혼....어."
오르커스의 말은 짧았지만 그것은 노엘이 품은 의문에 있어 명확한 답이 되었다.
태양에 잠시 구름이 드리운 것과 같이 오르커스의 답을 들은 노엘의 얼굴에서는 잠시 동안 이나마 빛이 사라졌다. 오르커스의 말 한마디에 잠시 세상이 반전된 것 같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 복잡 미묘한 감정에 노엘은 이것을 대체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