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샛별 (10)
솔직히 조금 놀랐다.
노엘과의 대련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건 아니다. 그녀는 천재라고 말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이였지만 나의 시간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실력의 차이는 명확하였고 나는 내가 그녀와의 대련에서 이길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노엘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내게 검을 들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놀란 점은 나와 노엘이 치루었던 대련의 과정에 있었다.
노엘이 떨어뜨린 검을 보았다. 그 검은 정확히 검신이 두동강이 나 제대로 된 검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낸 광경이지만 여전히 황당하기만 하다.
설마 대련용 검이 부러질 것이라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품질이 불량이었던 것일까. 공방에서 크라우스에 납품되는 것들에는 아버지께서 관여하고 계시기에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을 텐데. 무엇보다 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면 검을 들었던 노엘이 처음부터 그 검을 사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에는 내가 저리 만들었다는 소리인데. 이게 말이 되나..?
분명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검을 휘두른 것은 맞았다. 여기에 실력을 과신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저 할 수 있기에 그리 했던 것 뿐이다. 다만 대련이 끝나고 이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이게 또 말이 되지 않는다.
메로힘에서 검에 진전이 있던 것은 맞다.
그에 대한 것 역시 그웬 경과의 대련을 통해 완벽히 파악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녀의 검은 첫 합에서 부러졌으면 아니되었다.
검은 검사에게 있어 생명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렇기에 검의 손상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은 검사의 실력과 직결된다.
대련용 검을 베어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만 지금 이곳에 있는 기사 누구에게나 검을 쥐어주고 내게 방금 전과 같은 일을 행해보라고 한다면 가능은 하더라도 한합 안에 이루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분명 내가 파악한 그녀의 실력이었다면 검이 부러지지 않게 흘려낼 수 있었을 터. 정말로 검에 이상이 없는 것이라면 그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는 것인데, 노엘은 대체 왜 검을 부러뜨리도록 내버려 둔 것일까?
여러가지 의문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눈 앞에서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채 내 앞에 서 있는 노엘의 모습을 보니, 이유가 무엇인지는 찾을 수 없어도 검을 부러뜨린 나의 행동이 그녀가 원하던 답이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노엘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인다.
불타오르는 푸른 불꽃처럼 변모한 그녀의 눈빛은 이전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투쟁심이 깃들어 있었다. 다시 한번 대련 신청을 하려는 것일까, 라고 생각은 하였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노엘이 내게 건낸 말은 다름아닌 감사의 인사였다.
"고마워요. 데미안 공자."
짧은 말 한마디 였지만 잔잔하게 내 귀에 울려퍼지는 그 목소리에는 황녀라는 신분에 어울리는 고귀함이 담겨있었다. 정녕 내가 알고 있는 노엘 에스텔리아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 어조 모든 것이 달라져 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대련은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한 합 밖에 되지 않았던 그 짧은 대련에서 무슨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하지만 노엘의 말이 그저 형식 뿐인 인사가 아니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노엘의 말에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고 있었고 내가 그녀의 무엇을 채워 주었는지 그 답이 들어 있다.
나는 나와 마주하고 있는 눈 앞의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제국의 황녀였지만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그녀의 눈은 기사의 것이었다.
설마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대로 연무장을 떠나려 하는 노엘에게 이리 말하였다.
"그렇게 재미가 있으셨다면 다시 한번 더 하시지 않겠습니까."
나의 대답에 노엘은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 가까이 다가와 나를 살짝 올려다 보고는 나지막히 미소지었다.
평소 모두가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환하게 웃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작은 미소 하나가 내가 보았던 그녀의 미소 중 가장 보기가 좋았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이 노엘의 얼굴은 어느새 모두가 알고 있는 노엘 에스텔리아로 변해 있었다.
노엘은 내게서 몸을 돌리더니 이전과 같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히히...나중에요. 조금만 더 연습한 다음에 도전할래요."
"또 검을 부러뜨릴것 같아서 그렇습니까?"
"음? 헤헿. 그래도 다음번에 신청할때는 이렇게 쉽게 물러가지는 않을거에요!! 아마, 제가 이길 때까지 계속 신청할지도 몰라요?"
"그러면 끝이 안나겠는데요."
나의 말에 노엘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라고 힘차게 답하고는 발걸음을 이었다. 나 또한 대련용 검을 뒷수습을 하고 있는 기사에게 건내어 주고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고보니 엘레나와 노엘의 만남에 대해서 생각했었지 나와 노엘의 만남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은 없네. 소설의 내용을 생각하면 데미안에게 있어, 노엘에게 있어 그 둘은 서로 악연이었으니까. 하기야 데미안이 선연인 인물이 있겠냐만은.
그래도 지금의 나에게 있어 노엘, 그녀와의 만남은 그리 나쁘지 않은 시작을 한 것 같다. 첫단추는 잘 꿰맨 것 같으니 부디 이것이 선연으로 이어지기를.
"어?"
앞서 걷고 있던 노엘에게서 이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그녀의 모습에 나 또한 발걸음을 멈춰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익숙한 새하얀 빛이 비춰지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던 것일까.
엘레나. 언제 보아도 반가운 그녀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알폰스의 옆에 앉아 나와 노엘의 귀환을 지긋히 지켜보고 있었다. 노엘은 아는 얼굴을 보아서 반가운 것인지 해맑은 얼굴로 엘레나에게 눈빛을 보내었지만 엘레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언제나 따스했던 아름다운 그녀의 자색빛 눈동자가 오늘따라 차갑게만 느껴진다.
***
회귀를 경험하면 가끔씩 다르지만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지금 노엘과 그의 만남이 그러하였다. 그 둘은 본디 에스텔리아 아카데미의 기사학부 반배정 시험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마법학부인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관해서는 노엘에게 이미 여러차례 들은 바 있었다.
당시 기사학부의 시험은 학생들간의 간단한 대련이었다.
분명 운명이란 것은 사라졌을게 분명한데 어째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연무장에 도착하자 노엘의 모습이 보였다. 쌍둥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르커스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녀의 해맑은 미소를 보자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의 모습에 먼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다만 이것이 두번째로 시간을 돌리었기에 그랬던걸까. 처음으로 재회했을 때와 같은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물론 이러할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첫번째 삶에서의 이별과 두번째 삶에서의 이별은 명확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연무장의 위에서는 그와 노엘이 검을 맞대고 서 있었다. 이를 보자 나는 절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 낼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이전과는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 누님!"
"안녕하세요. 알폰스. 오랜만이에요."
알폰스가 반가운 목소리로 내게 인사하였지만 나는 간단히 답하고는 자리에 앉아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어떠한 감정으로 연무장을 보고 있는지는 나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두려움. 아니, 두렵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이것은 호기심에 가까울 것이다. 정말로 누군가의 장난인지 회귀 이전과 마찬가지로 노엘과 그의 첫만남은 대련이었고 과연 이번에도 이전의 삶과 같은 결과가 나올것인지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호기심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나는 자세를 잡는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중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의 옷차림이 문제였다. 그는 오늘 아침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이전에는 없었던 군데군데 칼에 베인듯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반면 그의 상대로 서 있는 노엘의 옷은 깨끗하기만 하였다. 나는 여기에 이상함을 느껴 계속해서 둘의 대련을 지켜 보았을 알폰스에게 물었다.
"알폰스. 혹시 데미안이 이전에 누군가와 대련을 하였나요?"
"네! 그웬 경이랑 한번. 아, 누님 그거 아세요? 드디어 형님이 그웬 경을 완전히 꺾으셨어요!!"
나의 질문에 알폰스는 신난 얼굴로 답하였지만 그 답을 듣자 내 얼굴에는 오히려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웬 경이 누구인지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크라우스의 가장 큰 전력인 검은 용 기사단의 단장으로 빌헬름 경과 더불어 소드 마스터를 제외한 이들 사이에서 여러번 회자되는 뛰어난 기사 아닌가. 그의 실력은 회귀 이전에 직접 본 적도 있었지만 그가 이곳에서 하루도 빠짐 없이 그와 대련을 하였기에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그와 그웬의 전적은 무승무패. 그렇기에 그가 이겼다는 사실에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게 맞을테지만 나는 조금 화가 날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빌헬름 경과의 대련을 내가 무엇 때문에 말렸는데, 사르함에 돌아오자마자 그웬 경과..."
"누..누님?"
자세히 살펴보니 멀쩡하지 않은 것은 옷 뿐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그웬 경과 겨룰 때 마다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지만 오늘은 이전처럼 그냥 넘길 수 가 없었다. 그가 빌헬름 경과의 대련으로 한번 쓰러졌다 다시 일어난지 이제 3일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대련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말린 것이었는데.
그러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미 대련의 결과에 대한 것은 뒷전이었다. 아무렴 어떤가.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